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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작가 Apr 04. 2024

중력을 거슬러, 출국!

초보 여행자의 우당탕탕 수속 해프닝!





어제  TV에서 영화 “마션”을 했다.

마션 영화를 몇 번이나 봤었지만 산티아고를 다녀온 후 나의 시야는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영화 마션 화성 탈출 준비 장면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이 마지막 주인공 마크가 화성 생활을 정리하고 우주선에 몸을 실어 목숨을 걸고 우주로 날아오르는 장면이다.


정말 말도 안 되게 불가능한 작전을 펼치며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전 세계가 고군분투를 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돕는다는 문구가 떠올랐다.”


그리고 우주로 날려 보내는 우주선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우주선 내외부의 모든 장비를 다 덜어내는 장면에서 나 역시 산티아고를 준비하며 수없이 준비하고 시물레이션 했던 모습들이 영화와 교차하며 보였다.


얼마나 많은 짐을 싸고 풀고 버리고 줄이며 그 시간들이 얼마나 생존을 위한 선택과 집중의 시간이었는지

십분 이해 할수 있었다.


화성이건 목성이건 나는 한국의 중력도 벗어나기 힘든데, 우주여행이라니 돌아와서 우주인들이 어떤 마인드로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지 여행자의 마인드로 진심 궁금증이 올라왔다.


유럽 여행 간다고 했지만, 산티아고를 걷는다는 얘기는 ‘볼드모트’라는 단어처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유럽에 있는 지인조차도 부정적으로 이야기할 만큼 도전적인 이 길을 나는 조용히 다녀올 심산이었다.




남산 도서관 전시를 구경 갔다. 2022년 NFT 미디어아트 전시를 함께 하며 알게 된 작가님은 본업인 방송 작가로 경력이 많으신 분이라 질문만 하면 답이 나오는 chat GPT처럼 경험담이 술술 나오시는 분이었다.


미디어 전시는 요새 가장 핫한 NFT 미디어 작가 “다다즈” 작가님의 전시 중이었다.


서울 사람이지만 남산 도서관 자체가 생소했기 때문에 나는 등산 가는 심정으로 남산도서관으로 향했다.

100주년 기념으로 산속에 절처럼 폭 쌓여 있는 도서관은 내부 공사를 마치고 고즈넉하고 멋진 남산의 경관을 품고 있었다.


남산도서관 경관


도착하자마자 나는 남산 경관에 감탄을 뿜어 댔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여행자로서 실감도 안 나고 여행 가는 게 별 건가 조금은 그런 마음으로 하루하루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떠날 길이 특별할 거란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오랜 기간 쌓인 불운과 슬픔
그리고 허무로 인해 시니컬하게 반응하는 게 익숙해져 있던 그런 상태였다.


 

나의 마음은 세상과 등을 돌리고

장시간 굳게 닫혀 있었다.


누구 보다 나 자신에 대한 용서와 위로가 절실했지만 그 방법을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 한던 나 스스로에게 선택한 극단적인 방법이 산티아고로 도망치는 것이었다.


작가님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유럽살이 3개월을 어떻게 보낼지 궁금해하셨다. 나는 프랑스 파리 지인 집에 좀 있다 한 달 이상 스페인에 머물 예정이라고만 말했다.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때가 아니었다.


내가 해놓은 거라곤 비행기표와 파리에서

생장역으로 내려갈 거라는 것 밖에는 없는 게 내 계획이라고 말을 하진 못했다.


심지어 떠나기 전까지 중고로 구매한 배낭도 맘에 안 들어서 계속 바꿀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가지고 있던 루틴을 벗어나는 것이 더 두려운 포인트였다.


나는 떠나서도 여행 기록을 남기고자 내 직업적 특성을 살려 이번 유럽 여행기를 인스타툰으로 연재를 계획했다.


뭐 떠나기 전 계획이야 수십 번 없었다 뒤집었다 할 수 있는 거니까 여러 안을 시물레이션을 돌려 보았다.


마션에 나오는 수학자들처럼 수학적 수치를 맞춰 탈출을 해야 했다면 나는 진작에 화성에서 죽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일단 나는 그렇게 계획적인 사람은 아니다.


작가님과의 수다는 오래간만에 억눌려 있던 나의 여행 코드에 긴장이 풀리게 도와주었다.

전시를 다녀온 이후부터 정말 이제 여행을 떠날 거라는 걸 몸소 깨닫게 됐다.


산티아고를 걸을 거라는 고해성사를 하고 나자 봇 물 터지듯 이야기가 터져 나왔다.

산티아고에 꼭 아이패드를 가져가서 현지의 생생한 경험담을 인스타툰으로 담겠다 호언장담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준비를 다 못할 것 같던 순례길과 유럽살이 준비가 어찌어찌 다 끝났고, 출국날이 다가왔다.


집 근처 버스 정류소에서는 마을버스가 첫 차 준비를 하고 있었다.


9월 5일 9시 40분 비행기를 타기 위해 3시간 전에는 공항에 도착해 수속을 마쳐야 했다.


20대 중반 나는 중국 연수 당시 정시에 도착해서 짐수속을 밟지 못해 비행기를 놓쳤던 경험이 있다.


남들은 상상이라고 할만한 경험을 나는 늘 현실로 경험했던 편이었다.

다행히 중국 국적기에 비행기 짐 수속이 불가했던 거라 비행기 출발 시간 티켓을 변경해 주면서 해프닝으로 끝이 났다.


미라클 모닝으로 새벽에 기상은 어렵지 않았다.

알람이 새벽 4시 첫 알람이 울리자마자 바로 잠에서 깨어났다.


새벽에 택시가 안 잡힐까 걱정했지만 버튼 한 번에 새벽임에도 카카오 택시가 오분만에 예약이 잡혔다.

나와 이모는 짐을 낑낑 짊어지고 4층에서 1층까지 20킬로가 넘는 캐리어와 15킬로짜리 등산가방을 들고 낑낑대며 내려가야 했다.


이런 거 때문에 다들 엘리베이터 있는 집을 선호하는 것 아닐까?  


잠도 덜 깬 상태에서 짐 들고 내려가려니 죽을 맛이었다.


엄마가 승용차로 공항버스역까지 데려다주면 좋겠지만 엄마는 교통사고로 허리 시술 이후 무거운 짐을 들거나 무리를 하면 안 되었다.


그리고 애초에 나의 선택으로 가족들이 피해 보는 일은 없어야 하는 게 내 원칙이기도 했었어서,  맘 편하게 택시를 불렀다.



새벽 배웅을 나와준 이모와 엄마 택시 대기중


코로나 이후 국경이 열리면서 이용 증가로 마침 공항버스로 30분마다 한대씩 스케쥴이 있었고, 놓칠까 걱정할 것 없이 이모와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1층까지 내려오면서 이모 없었음 어떻게 내려놨을까 한숨이 나왔다.


이 노인네들 나 없이 어떻게 지낼지 걱정이 나를 당기고 있는 익숙한 루틴의 중력처럼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래도 하나보단 둘이 낮지?”


새삼 이모의 존재에 감사했다.


공항에서 잿던 짐 무게


트렁크 싣기 전


버스 안에서 본 정류장 풍경


공항버스가 정차하는 역에 택시가 도착함과 동시에 마침 공항버스가 도착했다.

캐리어와 등산배낭을 트렁크에 넣고는 함께 타고 왔던 택시에 이모를 집으로 보냈다.


 새벽이지만 첫차를 타려는 직장인들이 꽤나 버스 정거장에 줄을 서 있었다.


서른 중반 이후가 되면 당연히 내 집이 있고, 내 가정 있고, 안정적인 직장이 있을 줄 알았던 정석적인 미래에 나는 어디 하나 맞춰진 구색이 없는 사람이었다.


꿈하나 바라보고 달려온 청춘에 내 장점이라면 어디든 떠날 수 있는 가벼운 몸뚱이 하나뿐이었다.


그림을 업으로 선택할 때 생각했던 원하던 걸 위해 포기한 여러 가지가 파노라마처럼 흘러 지나갔다. 버스 트렁크에 짐을 겨우 넣고는 괜히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이 짐이 다인가?”


공항버스에는 새벽 첫차인데도 사람들이 자리를 다 매웠다.


코로나 락다운이 끝나고 국경이 풀리면서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나가는 듯했다.

이런 장기 여행을 지금 타이밍에 떠난 결정을 한 나에게 참 어안이 벙벙했다.


(그래도 복 받은 인생이지…)


나는 아빠 사진이 붙은 손바닥 만한 노트를 꺼내 젊은 날의 아빠와 꼬꼬마 내 모습을 보면서 혼자 회상에 잠겼다.


20살 첫 유럽여행 때 여행 중 아빠와 통화로 나중에 유럽여행을 함께 가자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 이후 시간이 한참 흘러 아빠가 암 선고를 받던 2019년 함께 갔던 정선 가족 여행이 마지막이 되었다.


오늘 떠나는 유럽이 아빠와 함께 떠나는 여행이라 생각하며 사진을 보조 가방에 소중히 다시 넣었다.

힘든 일이건 기쁜 일이건 언제나 아빠가 나를 지켜주고 있다 생각하며 기도를 했다.


“무사히 여행 다녀오겠습니다.

아빠 저를 지켜 주세요! “

(두 손 모아)


초등학교 때 아빠하고 서울서부터 부산을 돌아 전국 여행을 갔었던 적이 있었는데 어린 나이에 쉬운 여행은 아니었다.


여행의 출발길, 공항버스 안에서 아빠의 장례식날 원주행 아침 기차를 타고 장례식장으로 내려가던 가차밖 창문에 비친 풍경이 떠올라 갑자기 눈물이 났다.


(3개월 후에 돌아올 건데

뭐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멜랑꼴리 해져 버렸다.)


눈을 뜨고 있으면 자꾸만 눈물이 나서 그냥 눈을 감고 노래를 들으며 잠을 청하려 노력했다.


인천공항 제1공항 터미널 아시아나 첫 수속 시간은 새벽 6시, 새벽차를 타고 왔더니 공항에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인천공항 제1터미널 수속 받으러 가는길



오래간만에 왔지만 참 크고 깔끔한 한국 공항은 늘 볼 때마다 감탄이 나온다.

산티아고를 떠나려 하니 산티아고 단체 관광 명찰을 매고 다니는 관광객무리가 유독 내 눈에 띄었다.


수속을 마치고 남은 시간에 의자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유명한 사람이 왔는지 대포 수동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팬클럽 분위기를 내는 사람들과 운동선수 같은 사람들이 지나갔다.


알고 봤더니 일본에 경기를 하러 가는 한국 농구팀이었다. 농구 선수 허훈이 수속을 받으러 온 듯했다.  사람들이 라이브방송을 켜고 사진을 찍고 팬들이 소릴 지르며 고요했던 공항의 아침이 잠깐 소란스러웠다.



나는 일등으로 짐은 붙였지만 들어가서 기다리기엔 너무 긴 시간이라 공항의자에 누워 한참을 아침잠을 채웠다.


겨우 정말 비행기 수속 시간 5분 전에 핸드폰 요금제도 최저 요금제로 변경하고, 출국 준비를 마쳤다.

아시아나에서 승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친구와 운 좋게

연락이 닿았다.


친구는 9월 6일 스케줄이 프랑크푸르트 비행이라고 했다. 내가 타는 비행기에 친한 후배가 오늘 비행 스케줄이니까, 미리 말해 놓을 테니 필요한 거 있으면 얘기하라며 출국 직전 갑자기 진도를 우당탕 빼면서

난리 부르스를 춘 듯하다.


 갑자기 연락했는데 친절하게 도움을 준 친구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이 흘러나왔다.

 출국 전 서부터 운이 트이려나?


비행기 게이트를 따라 통로로 들어가는데

그제야 진짜 떠난다는게 실감이 나서

심장이 쿵쾅쿵쾅 나대기 시작했다.


내가 좋은 일로 이렇게 심장이 나댄 적이 없었다.

 설렘과 두려움이 뒤섞여 걸음을 비행기 기내로 자리를 옮겼다.


비행기 이륙 직전 지정 자리에 들어가 앉아서 까지 승무원 친구와 전화 통화를 했다.

꼭 승무원 아무개를 찾아서 도움을 받으라는 당부를 받고 비행기 모드로 핸드폰을 돌렸다.


비행기 대기선 기다리며


통로로 이동중


출국 전 풍경



비행중




내가 장기 비행은 너무 오래간만에 타봐서 17시간을 너무 쉽게 봤던 것 같다.

차라리 환승이 긴 게 낮지 직항으로 프랑크푸르트까지 가서 3시간 대기 후 에어 프랑스를 타고 샤를 드골에 가야 하니까. 쉼 없는 일정이었다.


창가 안족을 예약했다고 좋아했는데 웬걸~


한국발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는 한국 손님들로 만석이라 빈자석에 누울 행운의 공간조차 없었다.

게다가 내 옆에 앉은 남자 대학생 같이 보이는 사람과 직장인 남자는 14시간 내내 화장실 갈 생각도 별로 안 하는 듯했다.


기내


나는 오래 한 자세로 앉아 있다 보니 왼쪽 무릎이 저리기 시작했다.

휴족 시간과 클락스 마사지기는 배낭 짐 저 안쪽에 처박아 놔서 이렇게 종아리 근육이 저릴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화장실을 4번 정도 갔었는데 다 내가 두 장정을 내쫓고 나는 왔다 갔다 근육을 풀어 줘야 했기 때문에 비행기 내부를 빙빙 돌며 걸어 다녔다.


그러다 승무원한테 가서 친구 지인 후배님을 불러달라 요청하고는 후배님이 준 에스프레소 커피와 땅콩 아몬드 과자를 한 아름 받아 지루함을 달랬다.


이코노미 클래스는 드립으로 내린 커피만 제공이 돼서 샷을 내린 커피가 귀하다.


도착 직전에 나는 옆에 있는 대학생 청년이 유심 칩을 갈아 끼우는 걸 보고는 나도 따라 한국 유심침을 세컨드폰으로 옮겨 끼우고는 유럽 유심칩을 끼우고 핸드폰을 다시 비행기 모드를 풀었다.


폰을 껐다 켜자 알 수 없는 스페인어 문자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프랑크 푸르트 공항에서 수속을 마치고 비행 타기

전에 언니에게 문자를 보내 알려야 했다.


점심



저녁



간식



두 번의 식사와 간식 그리고 영화 드라마를 보고,

기내를 걸으며 몸을 풀었다.

자다 깨다 밥 먹다를 반복하다가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을 했다.


환승 수속을 받으며 기내에 실었던 아이패드와 책가방을 등산 배낭에 쑤셔 넣었더니 가방은 자크가 터질 듯 부풀어 있었다.


대기줄에 함께 서있던 희잡을 쓴 동남아 여성분이 가방 자크가 열린다면서 나에게 알려주었다.

오래된 가방 자크에 매달려 있는 플라스틱끈이 오래된 거라 힘을 못 버티고 삮아 버린 것 같았다.


나는 민망해하며 책가방을 꺼내 앞쪽으로 다시 고쳐 맸다. 그래도 공항 내부에서 허둥지둥하는 나를 공항 천사들이 안전하게 지켜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마음을 쓸어내렸다.


프랑크푸르트 도착


프랑크 푸르트 공항 수속 대기줄 촬영샷



한국 사람들이었으면 분명 ”정신줄 챙겨~“라고 말하며 핀잔을 주고는 빠르게 이동했을 것이다.

나는 한국인들 템포에서는 늘 느린 사람이었어서 빠르게 움직이려다 보니 늘 흘리고 실수하는 경우가 많았었다.


그래서 나를 빠르게 몰아치게 만든다던가 긴장하게 만들면 트라우마가 발동해 나도 모르게 실수를 더 많이 하는 일들이 잦았었다.

그런 실수가 별거 아니라는 듯 따뜻하게 감싸주는 세계인들의 마인드가 나는 더 안정감을 주는 듯했다.


환승 수속을 마치고 나는 당연히 자연스럽게 짐 찾는 사람들을 따라갔다. 그때 직원들에게 물어봤어야 했는데 항상 문제는 물어보지 않아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환승도 해본 사람이 하는 거라고 나는 환승을 할 때 수속받은 짐을 찾아서 가야 하는 줄 알고 짐 찾는 곳에서 한참을 짐을 기다렸다. 하지만 내 짐은 당연히 나오지 않았다.


아시아나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 짐이 다 나왔는데, 유난히 튀는 내 형광 보라색 케리어가 안 보이는데 적잖이 당황했다.


직원들을 호출해 짐이 안 나왔다고 요청을 하니, 분실물 센터와 비행기표를 확인해서 독일 항공사 직원들이 서두는 법이 없이 차분하고 친절하게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공항 직원은 나에게 에어 프랑스 환승이면 짐을 찾을 필요가 없다고 얘길 해주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뻘짓 하고 있었나 깨닫게 되었다.


환승 이동중


짐 찾는 곳


프랑크 푸르트 전광판


공항내부


에아프랑스 라운지 체크인 지하1층




알고 보니 환승을 하면 짐을 찾는 게 아니라 수속받는 에어프랑스에 가서 티켓을 발부받아야 했었다.


아시아나에서 했던 안내를 티켓이 아니라 짐을 받아야 한다고 잘못  알아 들었던 것 같다.ㅠㅜ

나는 짐을 찾는 곳에서 한참을 내 짐을 기다리며 여행 시작도 전에 영화 카모메 식당에서 나오는 여자 주인공처럼 짐을 분실하고 여기서 프랑크 푸르트에서

여행이 끝나는 건가?

생각하며 머리가 아찔해졌다.


다행히도 환승 수속은 짐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말을 듣고는 환승 시간을 여유롭게 즐길 시간도 없이 뛰고 뛰어 광활한 프랑크 푸르트 공항을 뛰어다니며  마지막으로 에어 프랑스 수속을 밟고 공항 트램을 타고 수속 대기를 위해 이동을 해야 했다.


에어 프랑스 직원은 내가 너무 안 와서 방송을 하려고 했었다고 말하면서 농담 섞인 말투로 나를 진정시켰다. 드넓은 프랑크푸르트 공항을 뛰어다니다 보니 여간 헝클어진 머리와 땀에 절어 내 상태가 말이 아니었나 보다.


사람들을 따라갔으면, 어려운 루트가 아니었다. 게다가 독일 공항처럼 잘 정비되어 있는 곳도 없을 것이다.

환승 수속 하는 방법 하나 안 알아보고 간 내 잘못이었다.


멘탈이 나가기 일보 직전까지 가서 공항 경비 안내원에게 횡설수설하는 내 모습에 아저씨는 천천히 해도 늦지 않는 다며 긴장을 풀라고 했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공항 트램을 타고 이동해서 에어 프랑스 비행기 대기실로 이동했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을 좀 커피도 마시고 하며 즐겼으면 좋았을 텐데 뛰어다닌 기억밖에 없어 아쉽다.


대기실 이동 전까지 독일어와 독일 모델들의 광고물에는 멋진 독일 모델들의 광고물이 시선을 멈추게 했다.

그나마 긴장이 풀리니 이런 게 보였다.


독일인들은 워낙 키도 크고 피지컬이 좋아서 공항버스에 함께 탄 독일 공항 경찰과 출장차 비행기를 타는 독일인들의 모습은 슈트발까지 더불어 모델도 아닌데 “멋짐”이 뿜어져 나왔다.


공항 내 흡연실


공항 내 독일 버스


짐 검사



바로 옆나라인데도 프랑스와 독일 분위기가 참 달랐다.

프랑스 파리행 비행기라서 프랑스 사람들이 꽤 많이 몰려 있다 보니, 불어로 떠드는 목소리가 나에겐 자장가처럼 느껴졌다. 아무 말도 못 알아듣는 불어가 긴장을 풀리게 해 줬다고 하는 게 더 맞는 것 같다.


조용조용 나긋나긋한 악센트의 수다를 떨고 느슨한 자세로 앉아 있는 프랑스 인들이 나의 긴장을 풀어지게 했다. 그 방에 동양인은 극히 드물었다.

다섯 명 정도가 동양인 이었었나?


심지어 타 유색인도 보기 어려웠던 것 같다.

한국인은 내 추측이 맞다면 나 포함 2명이었다.

내가 한국인이라고 알았던 이유는 등산복 차림에 아마도 산티아고를 가는 듯한 풀착장 복장과 화장 생김새 때문이었다.


중국인이 유럽을 오는 경우는 옷이 거의 새 거고 정말 옷을 잘 입는다.(거의 부자)

일본인은 간혹 있는데 한국에 없는 색감을 많이 입는다. 그리고 얼굴에 생각지 못할 곳에 꼭 점이 있다.

그리고 치열이 좋지 않고, 안짱다리로 걷는다.


중국인과 한국인은 최근엔 분간이 점점 어려워지긴 하지만 일단 목소리 톤이 중국 사람들이 워낙 높기 때문에 알 수 있다. 그리고 웬만하면 중국분들은 혼자 안 다닌다.


내가 12일에 정해진대로 산티아고를 간다면 저분을 만날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에어 프랑스 대기실


에어 프랑스 비행기로 싣고 가는 버스와 프랑스 인들


프랑크 푸르트 18:30에서 파리 샤를드골 공항 도착은 20:00 이니까 1시간 30분  남짓밖에 걸리지 않기 때문에 언니에게 이제 에어 프랑스 비행기를 탄다고 문자를 보냈다.


언니는 형부가 마침 출장을 마치고 오는 날이라 공항에 픽업을 갈 거라고 문자가 왔다.

원래 언니가 지하철 타고 픽업을 온다고 했었는데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나는 독일 공항에서 한바탕 진을 빼서인지 공항버스에서 넋을 놓고 있다가 작은 국적기를 타고 비행기 기내로 들어섰다.


에어 프랑스 환승중


비행기 내부


드디어 착석


간식


해지는 프랑크푸르트

나는 급하게 후다닥 티켓을 확인하고 앉았다.

알고 보니 자리를 잘못 잡고 앉아 있었다.


내 자리가 다른 좌석이란 걸 알게 되고는 빠르게 자릴 옮겼는데, 핸드폰이 보이지 않았다.


헐…

제발~

정신 차리자!!!!


아까 잘못 앉았던 자리로 돌아가 핸드폰을 찾는 시늉을 했더니, 옆자리였던 프랑스 아저씨가 이거 니 거냐며 핸드폰을 찾아주었다. 나는 다시 한번 아저씨에게 감사함을 전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갑자기 독일어에 불어까지 생소한 언어가 나를 더 정신없게 했다. 게다가 비행기에 탄 중국인 여자분이 있었는데 뭐가 문제인지 비행기를 잘못 탄 듯했다.


파리행은 맞는데 공항이 달랐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비행기 이륙 시간이 조금씩 늦춰졌다.


“에어! 프랑스” 의 서비스가 좋지 않은 건 미국항공기 다음으로 유명해서 각오는 하고 있었는데,

영어로 대답할 때와 불어로 응답할 때 리엑션이 미세하게 다르긴 했지만 나는 크게 서비스를 몸으로 체험할 만큼의 서비스를 못 받아서 인지 그저 무사히 파리로 도착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예상 도착 시간은 8시 지만 좀 더 걸릴 수도 있는 거니까.


새벽 4시부터 시작한 하루와 시차까지 하루를 길게 붙어서 이틀이 되어 있는 느낌이 들었다.

왜 이렇게 피곤하고 힘든 건지 시작부터 만만치가 않다.




프랑스 파리 도착!!


짐 찾는 중


짐 도착


짐 싣고 이제 집으로 출발
지도에 나온 경로


우여곡절 끝에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해 짐 수속을 마치고 바로 게이트로 나가니 형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나는 형부에게 집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거의 7년 만에 본 형부는 어느새 세월의 흔적이 보였다. 첫째 조카가 5살 때 한국에서 만났었으니까 시간이 참 빠르게 느껴졌다.


세 아이의 아빠에게 느껴지는 삶의 무게 랄까?


형부는 출장을 갖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라

공항에 들러 픽업을 한 거라고 했다.

언니네 집에 대한 정보는 잘 아는 바가 없었다.


일단 말로 설명을 해줘도, 거리감이 없으니 이해가 가질 않았는데, 고속도로를 타고 파리 시내를 관통해 에펠타워, 파리 생제르망 스타디움을 지나 파리 외곽으로 달려 나갔다.

본의 아니게 파리의 야경은 다 구경한 듯했다.


교통체증으로 정차해 있는데 버스에서 어떤 흑인들이 타면서부터 주먹다짐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형부는 손가락질로 버스를 가리키며 “이게 진짜 파리야~ ” 라며 웃어 댔다.


“Welcome to Paris”


버스에서 싸우는 파리 풍경


키득 거리며 당황스러운 상황을 보며 같이 웃어 댔다.


형부는 나에게 아버지 부고 소식을 들었다며 위로의 말을 전했다. 그리고 산티아고를 갈 거라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나는 비우고 정리하고 오고 싶다고 말했다.


언니네 집이 이렇게 먼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파리 시내를 가로 질로 파리를 빠져나와 한 시간이 넘게 운전을 해서 집에 도착을 하니

밤 10시가 거의 다되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이렇게 멀어서 시내에 어떻게 다니지 라는 생각이 스쳤지만, 너무 피곤하고 긴 하루였기 때문에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언니와 세명의 어린 조카들과 인사를 나누고 방으로 들어갔다.



하~

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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