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언덕 Alto del Perdon
기억이란 것이 참 재미있다. 실제로 당시에는 참 좋았던 기억이 힘들었던 기억에 비해 저 밑에 묻혀 있어서 기억해 내려면 한참을 기억의 길을 헤매야 한다.
용서의 언덕을 오르던 이 길이 그랬다.
‘Donde se cruza el camino del viento con el de las estrellas
바람이 별들의 길을 가로지르다.’
9월 24일 출발 전 새벽 침대에서
밤새 축제는 끝이 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나는 귀마개를 꽂고 잠을 자려고 했지만, 숙소 내에 순례자들의 전 세계 코골이 오케스트라 서라운드에 내 귀 고막의 진동 소리까지 겹쳐져서 조화를 이루며 소음이 공명한다. 나는 겨우 12시가 넘어서 눈을 감고 잠을 청하기 위해 노력했다.
오롯이 하루종일 걷기만 하는 순례자에게 다음날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잘 자는 것이 가장 큰 준비 일 것이다.
다행인 건 내 몸은 이제 완치가 되었다는 것이다.
더 이상 배가 아프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여유로웠다.
항상 그렇지만 길을 걷는데 완벽한 상황이란 없다.
그저 우리는 여기서 걷는 것을 선택하고 걸을 뿐이었다.
바보같이 아픈데 왜 멈춰서 쉬지 않았냐 묻는 사람도 있다.
한 번의 포기가 인생의 한 페이지처럼 아직은 그런 때가 아니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 길에서 조차 “낙오자”로는 남고 싶지 않은 순례자들의 굳은 의지쯤으로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잠이 안 오니 별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나의 모든 생각의 끝이 미래나 과거가 아닌 산티아고 길 위에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나는 오늘은 처음으로 동키 서비스로 Puenta La Raina(푸엔테 라 레이나)에 짐을 부치고 가볍게 길을 걸을 생각이다.
짐이 있고 없고 가 얼마나 큰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지 모를 것이다.
동키서비스:(Delivery Service)
동키 서비스라는 명칭이 붙은 이유는 옛날 옛적에 순례자들은 당나귀에 짐을 실어 순례길을 떠났다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나는 실제로 처음에 동키서비스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택배 서비스를 당나귀를 이용해서 하는 건 줄 알고 있었으나, 현대에 들어서는 최대 구간 30km 내의 짐을 다음 구간의 알베르게에 보내주는 서비스로 발전했다고 한다.
작은 봉투에 단돈 6유로와 주소를 기입하고 배낭에 매달아 프런트에 두면 다음 도착 숙소에서 내 배낭을 만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긴 가뭄의 단비 같은 유혹인지 한국에서 프랑스 파리로 그리고 산티아고 프렌치 로드를 걷기 시작하면서 나 스스로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의 장막이 하나하나씩 벗겨 나가고 있었다.
처음에 딜리버리 서비스를 접했을 때는 나이 든 순례자들이나 이 서비스를 사용할 거라 장담했다.
그런데 물집도 근육통도 감기도 아니고 식중독이라는 시련을 마주치고는 내 생각이 얼마나 헛되고 부질없는 고집이었는지 깨닫게 된 것이다.
나는 “푸엔테 라 레이나”를 가는 길의 언덕 이야기를 듣고는 길을 걸으면서 처음으로 동키서비스를 사용해 봐야겠다 결심했다.
아주 가~끔이지만 주소를 잘못 적거나 배송 실수로 사라 지거나 다른 곳에 배송되는 경우도 있으니 꼭 도착할 숙소의 제대로 된 주소기입과 왓츠앱으로 사진을 보내 확인을 시키면 조금은 안심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순간 되면 이짐도 없어도 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삶이 심플해 진다.
7시가 되자 카운터에 불이 켜졌다.
6시부터 일어나 벌써 출발하는 부지런한 순례자들이 있어 우리는 일어나 짐을 싸기 시작했다.
배낭은 동키로 보낼 거니까 장바구니용 에코백에 물과 과일 그리고 고어텍스 재킷을 넣었다.
프런트에서는 7시 30분부터 동키짐 접수를 받을 거라고 했다.
프런트 앞에 비취 되어 있는 동키 봉투를 집어와 주소를 기재하고 6유로를 집어넣었다.
짐정리와 침낭을 돌돌 말아 배낭에 집어넣고는 마지막으로 부직포 시트를 벗겨서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페드로와 나는 동키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프런트로 다시 가서 안내를 받았다.
숙소 방향에 칸막이처럼 지키고 있는 커다란 캐비닛에 보증금 1유로를 넣고 짐을 넣어두라고 했다.
나는 힙색을 허리춤에 차고 에코백을 교차해서 등에 매고는 길을 떠날 준비를 했다.
배낭이 없으니 발걸음이 가벼워서 이 걸음으로 30km도 걸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7시 30분 페드로와 캐시와 알베르게 문을 넘었다.
아침시간 팜플로나에는 청소차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아직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술을 계속 마시고 있는 사람도 많이 보였다.
마치 토요일 홍대 새벽 4시 밤거리 같은 풍경이라고 하면 아마 풍경이 상상이 될 것이다.
깨진 유리잔과 술병들이 나동그라져 있고 취해서 길에서 자고 있거나, 지나가는 순례자들에게 괜스레 말을 걸며 왜 걷냐고 시비를 걸었다.
축제 다음날은 위험하니 혼자 걸어 다니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우리 셋은 겁먹은 양처럼 똘똘 뭉쳐서 걷기 시작했다.
캐시는 피레네를 넘은 후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고급 숙소와 택시를 이용하면서 돈을 다 써서 현금을 인출해야 한다고 했다. 팜플로나에서 어제는 정신없고 위험할 것 같아 인출을 못했다고 했다.
팜플로나의 둘러싸인 높은 성곽이 대형 미로 같아
정신없던 축제 분위기와 어우러져 나는 처음 입장했을 때도 “진격의 거인” 배경이 된 성벽이 떠올랐었는데, 캐나다 사람인 캐시는 오죽했을까 싶었다.
7시 48분 /조셉 아저씨
성곽을 빠져나와 중심가를 빠져나오니 다시 조용한 공원이 나타났다.
가는 길에 ATM을 발견했다.
누군가 다가와서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조셉 아저씨였다.
여기서부터 우리 네 명의 인연이 산티아고 끝을 지나 한국에 돌아와서 까지 이어지고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한 초반의 전개였다.
아저씨는 40리터짜리 오스프리 가방과
15킬로 그램 정도의 무게의 보기에도
무거운 가방을 메고 다니셨다.
무엇이 우리들을 여기로 이끌어서
산티아고를 함께 걷게 만든 걸까?
마치 짜인 각본처럼 맞아떨어지는
이야기 속에 큐사인에 동선에 맞춰
움직이는 새로운 등장인물처럼 자연스러운
이야기의 흐름이 신기할 따름이다.
나는 캐시가 인출하는 걸 보고 유럽에서 처음으로
현금을 인출해 보기로 결정하고 수수료 5유로에
총 70유로를 인출했다.
현금을 인출하고 나서부터 본격적으로 도심을 빠져나와 순례길을 걸었다.
우리 넷은 해가 뜨기 전 공복으로 일찍 출발했기 때문에 점점 해가 머리 위로 떠오르면서 볕이 뜨거워지고 점점 허기가 느껴졌다.
멀리서부터 우리는 자연스럽게 성당이 보이면 그곳으로 따라가기만 하면 카페가 열려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노란 카미노 화살표와 순례자들 그리고 성당만 보고도 길을 쉽을 찾을 수 있을 만큼 길이 익숙해져 갔다.
그리고 먹을 시간이 안됬어도 일단 카페가 나타나면 아침 겸 점심을 먹거나 휴식을 꼭 취하며 화장실도 이용을 한다.
우리는 상의한 것은 아니지만 커피냄새와 빵냄새에 이끌려 카페로 가는 중이었다.
멀리서 익숙한 얼굴이 팔을 벌리고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나의 첫 번째 카미노 친구 “ 실비”였다.
실비는 항상 지친 기색 없이 밝게 잘 걸었다.
나는 그때 물집이 처음 생겨 쩔뚝거리며 걷고 있었었다.
이 물집이 카미노에서는 큰 이슈가 아닐 만큼 익숙해서 나 역시 식중독보다는 견딜만한 기준이었기 때문에 큰일이 아니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페드로와 캐시와도 인사를 나누고 카페로 가서 식사를 할 건데 같이 가자고 권했다.
실비는 혼자 걷고 싶은 눈치였고 아침을 먹었다고 해서 우리는 또 보자 인사를 나눈 후 카페로 들어갔다.
https://maps.app.goo.gl/V9BgWwhvWv9H9Pyk7
카페 입구 맞은편 작은 창문으로 큰 개가 얼굴을 내밀고 보이는 순례자들에게 환영 인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가방을 벗어두고 카페로 들어갔다.
팜플로나에서 보이는 첫 마을에서 아침을 먹는 것이었기 때문에 든든하게 먹어야겠다 생각했다.
짐이 없던 페드로와 나와 달리 캐시는 무거운 이 리터짜리 물통까지 지고 가는 상황이고 가벼운 몸이 아니기 때문에 점점 걸음이 느려지는 게 느껴졌다.
일단 허기를 채우는 것이 먼저이다.
캐시는 걸음이 빨라지면 먼저 가라며 이야기를 나누며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보통 순례길에서 만나는 레스토랑이나 카페에서 배낭을 밖에 벗어놓은 것은 암묵적인 룰이었다.
우리는 바깥 카페테리아에 앉아 샌드위치와 핫초코를 마셨다. 지금 지나면 또 언제 카페나 음식점이 나올지 알 수 없다.
일단은 계속적으로 에너지를 공급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배가 고프건 말건 입에 꾸깃꾸깃 아직 잠이 안 깬 위장에 억지로 빵을 쑤셔 넣었다. 카페에는 보더콜리와 함께 걷는 순례자가 보였다.
특히나 이 보더콜리가 기억이 나는 이유는 길 초반 부르고스까지의 길중에 이 보더콜리 ‘쌈바’와 얼굴을 익히고 자주 만나서 반갑다고 배를 뒤집고 만져 달라며 짖어댔다.
프랑스 개라서 프랑스어로만 말해야 알아들었다.
개들도 자신들의 배변 봉투나 여행용 배낭을 매고는 순례길을 걷는다.
용서의 언덕까지는 오르락내리락 크고 작은 경사를 올라야 한다.
지대가 높은 곳이라 하늘 위 독수리들이 뱅글뱅글 돌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정오의 날씨 태양이 머리를 뜨겁게 익히고 있었다.
https://maps.app.goo.gl/jJiYxRxSoiCiJaAJ8
두 번째 휴식처
슈퍼마켓에서 나와 조셉아저씨 패드로는 함께 스탭이 거의 맞았지만, 캐시는 저 멀리서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우리는 슈퍼 맞은편 그늘에 줄지어 앉아 음료를 마시며 캐시를 기다렸다.
조셉님은 맥주를 한 캔 사서 점심부터 마시기 시작했다. 머리가 익을 것처럼 뜨거웠기 때문에 그럴 만도 했었다. 이렇게 걸어야 잘 걸을 수 있다면서 말이다.
나는 이온음료를 사서 마시고, 바나나로 열량을 보충했다.
하루종일 술을 입게 달고 사는 거니까 순례길이 아니라 무슨 술+례길이다. “Bar”를 찾아 떠나는 길 말이다.
나는 그때까진 그들과 발을 맞출 정도로 친한 사이가 아니었고, 발도 빠른 편은 아니니 천천히 가겠다고 했다.
하루 20km를 걷는데 무거운 짐을 메고 걷고 있으니 빠른 템포로 걷기는 더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느린 발걸음을 맞추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셉 아저씨는 조금씩 캐시와 템포를 맞춰 걷다가 나와 페드로가 있던 나무 그늘 아래서 다시 마주쳤다.
태풍을 뚫고 피레네 산맥을 함께 넘었으니 얼마나 서로에게 끈끈할까?
그늘 아래서 페드로와 조셉 아저씨와 캐시도 기다릴 겸 잠시 쉬는 시간을 가졌다.
그늘 아래 있으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어떤 분이 벤치에 앉아 풍경을 스케치하고 있었다.
이분은 호주에서 건축일을 한다고 했다.
그림 그리는 캐빈
나는 실력이 상당하신대 SNS에 올리면 어떨지 물어봤지만 이건 단지 취미라며 부끄러워하셨다.
캐빈의 차분하게 그려나간 연필선이 따뜻했다.
걸으며 그림을 그리기 쉽지 않은 일이지만 누군가는 해내고 있다.
그림을 즐기면서 신나게 그렸던 옛날 생각을 하면서 먼진 풍경을 눈과 사진으로 담았다.
캐빈의 누나 린과 함께 길을 걷고 있다고 했다.
중년의 오누이가 같이 여행을 다니는걸 여기선 종종 보면서 신기하다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남매는 거의 생존 신고 수준이던데?!!!
여기서 서로 알뜰살뜰 챙기는 모습이 보기 좋아 보였다.
마침내 “용서의 언덕”에 올랐다.
경찰관들이 위험 발생 시 꼭 연락하라고 안내 명함을 나눠 주고 있다.
용서의 언덕엔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었다.
유명 관광지인 만큼 관광버스를 타고 오거나 걸어오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언덕 위에 날고 있는 독수리들이 위에서 바라본 인간의 모습은 어떨까?
경찰 아저씨에게 명함을 건네받고 훤칠한 경찰관들의 미모에 나는 기념사진을 함께 찍자고 권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는지 다들 따라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용서의 언덕에서 가장 놀란 점은 70대 이상의 어르신들이 여기에 제일 많다는 것이 제일 놀랐다.
그리고 여전히 땀 흘리며 걷고 있는 모습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캐나다에서 오신 할머니였는데 손녀와 영상통화를 하며 기념사진을 보낼 거라고 했다.
나는 당신처럼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영상통화를 할 줄 알고 길을 걷는
멋진 순례자가 되겠다고 고백했다.
옆에 있던 조셉 아저씨는 그러려면 많은 걸
비워야 할 거에요라고 읊조렸다.
(이런 우연 어린 대사가 있나?)
비우기 위해 걸으러 온 사람에게
“많은 걸 비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의 고백에 감동을 하셨는지 할머니의 눈이 촉촉이 빛났다. 가끔 나도 내가 말하고는 누군가를 울린 적이
몇 번 있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이 순간의 감동을 담기 위해 사진을 찍었다.
다짐
호호 할머니가 돼서도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면서 건강하게 늙어서 길을 걷는 멋진 할머니가 되겠다는 다짐을 용서의 언덕의 당당한 순례자 동상들처럼 풍경과 함께 마음으로 되새겼다.
배낭을 보내고 지금처럼 가볍게 걷듯이 인생길의 덧없는 짐들을 하나씩 벗어내며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길을 처음 걸을 때만 해도 내 앞날이 막막하고 깜깜해서 하나도 보이지가 않는 암흙이었는데 인생 후반에 대한 꿈을 이야기 하다니!
당신처럼 늙고 싶다는 말이 내 가슴속에 새겨졌다.
늙고 나이 듦이 두렵고 무서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용서의 언덕에서 경관을 한참 보며 모두들 휴식을 취하고 있는 이 사람들 모두 무슨 생각에 잠겨 있을까?
나처럼 인생의 회한이 밀려왔던 것은 아닐까?
페드로가 캐시와 통화연결이 닿았다.
당연히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안부인사를 하며 어디쯤인지 물으니 후발주자들과 함께 걷고 있고 늦으면 택시를 탈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니 걱정 말고 길을 가라며 인사를 했다.
택시는 한 번에 다음구간을 가려면 장소 무관 60유로의 비용이 든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끝까지 대가를 치르고라도 가기 위해 노력한다.
모든 구간을 두 발로 걸으면 좋겠지만 각자 상황에 맞게 각자 자신의 까미노길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각자의 짐
조셉님의 짐은 정말 짐이 무거워 보였다.
그래서 늘 사진 찍을 때 인상을 푹 쓰고 계셨다.
15킬로그램이 넘는 배낭을 짊어지고 가톨릭 신자로서 고행의 길을 행군 중이라고 하셨다.
나:뭐가 그렇게 짐이 많죠?
조셉님: 안빤 빨래와 간식까지 여기 다있어요.
나: 빨래를 그때그때 안빠나요?
조셉님: 일주일치를 몰아서 세탁기에 돌려요.
어머나.... 세상에…(말을 못있겠다)
심지어 제주 올레길을 순례길 한 달 전 전지훈련으로 걷고 오셨다고 했다.
짐을 보내는 건 진정한 가톨릭 신자로서 본인은 용납이 안된다고 하셨다. (본인 피셜)
본인만의 십자가가 조셉님에게는 이 무거운 배낭이라 생각하신 듯 보였다.
조금은 진중하고 완고한 모습이 우리네 한국 아버지 모습으로 비쳐서 첫인상을 받아들이며 처음에는 함께 걸을 자신이 없었다.
영화 미나리에서 어떤 미국 아저씨가 매일 십자가를 예수님처럼 짊어지고 길을 걷는 분이 나온다.
나는 처음에 그 아저씨를 봤을 때 영화의 문맥상 왜 저 아저씨가 나올까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조셉님을 만나고 미나리의 십자가 아저씨가 왜 그렇게 십자가를 짊어지고 고생스럽게 걷고 있는지
조셉님의 이야기를 통해 이제야 영화의 내용이 마음으로 납득이 됐었다.
나는 용서의 언덕을 내려오며 푸엔테 라 레이나에 있는 Jakue Hostel에 전화를 걸어 숙소 예약을 구두로 마쳤다. 꼭 부킹닷컴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전화로도 예약이 가능하니 너무 예약 때문에 목맬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제부터 내리막 길이다.
나의 몸도 마음도 조금씩 자연과 더불어
정화되어 가고 있었다.
Buen Cami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