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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작가 Nov 07. 2024

순례자의 휴일

이테로 데 라 베가(Itero de la Vega)


마드리드가 문화 충전과 정신적 휴식이었다면, 이번 이테로 데 라 베가에서의 휴식은 온전히 걸음을 멈추고 순례자로서의 배낭을 내려놓고 쉬는 순례자의 휴가였다.


하루 더 쉬는 것이 뒤처지는 것 같지만 결국 더 앞으로 나아갈 힘을 줄 것이다.

누가 시켜서 이 길을 걷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해나가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챙기지 않는다. 내 몸의 통증은 나를 멈추라고 말하고 있었다.




10월 8일 새벽 6시

해가 뜨기 전 라 무칠라에서 제공하는 아침을 먹기 위해 숙소에 머무는 순례자들과 다른 알베르게에서 머무르던 순례자들까지 라 무칠라가 아침을 깨우는 소리로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오늘 길을 걷지 않는다는 것 만으로 이렇게 마음이 여유로워질 수 있다니 세상 마음먹기에 따라 세상을 달리 볼 수 있다는 말이 마음에 와닿았다.


로빈과 강아지


순례자의 휴일

며칠 만에 개운하게 잠을 잤다.

침대에 머리가 닿자마자 잠이 들어서 해가 뜨자마자 자연스럽게 눈이 떠졌다.


햇볕이 창가로 들어오기 시작하는 아침 7시 모두들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선 듯 라 무칠라도 한순간에 적막한 공기가 맴돌았다.


영국할머니 로빈은 공유공간에 앉아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아침을 즐기고 계셨다.

라무칠라 강아지도 반갑게 꼬리를 흔든다.


로빈도 나도 오늘은 “휴일”이다.


아나가 침대 커튼을 걷고 피곤한 눈을 비비며 나왔다.

아침인사를 건네자 어제 한숨도 못 잤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나: 어젯밤에 브라질에 있는 친구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겨서 그 얘길 나누느라 한숨도 못 잤어!

나: 왜 못 잤는데?

아나: 친구가 데이트 폭력을 당했는데, 지금 당장 도울 수가 없어 너무 화가 나고 슬퍼.

아나는 피가 끓는 듯 보였다.


나는 남일을 위해 이렇게 앞장서 발 벗고 도와주는 사람을 오래간만에 봐서인지, 아니면 사람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내가 주변에 일어나는 일에 대한 관심을 끄고 살아서인지 슬프지만 한발 물러서게 만들 정도로 아나의 분노가 낯설게 느껴졌다.


나: 니 건강을 먼저 챙겨야 하지 않을까?

아나: 누군가는 도와야 하고 모두가 알아야 하는 일이야.


누군가가 아닌 누군가


하갈언니에게 아나는 나와 이테로 데 라 베가에서 만나 함께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간 아나와 소식을 주고받은 듯 보였다.

아나에게 들은 언니의 소식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아나: 이스라엘 전쟁이 시작됐어(하갈언니는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리고 언니 발목부상이 더 심해졌나 봐.  현재 부르고스에 머물고 있대.


언니는 더 걷기를 원하지만 걷던 도중 전쟁 소식과 부상, 체력 방전까지 공황 증상이 찾아와 걷기를 멈춘 상태라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나라도 타지에 나와 있는데 나라에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면 앞으로 한 발 떼기가 쉽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늘 월드뉴스에서 지나치듯 나오는 전쟁 이야기가 내 친구의 이야기가 되는 순간, 이스라엘은 나의 이웃이 되고 하갈 언니의 안위를 걱정하게 되었다. 브라질에서 데이트폭력을 당한 아나의 친구도 더 이상 뉴스 한 꼭지에 실리는 누군가가 누군가가 아닌 것이다.


세상이 이렇게 아픔과 슬픔의 고통을 가진 사람이 많은데 걷는 게 무슨 소용이냐는 아나의 질문에 나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아나에게 내가 왜 걷는지 굳이 설명하지는 않았었다. 그랬기 때문에 내가 움츠려 드는 행동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지금 당장 나의 슬픔을 비워내기도 버거운 상태였으니까. 단지 각자 느끼는 깊이는 다르지만, 그 슬픔을 이해할 수는 있다. 그래서 매번 들리는 마을마다 이날 이후 더 열심히 매일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겠다 마음먹었다.


순례의 목적처럼 치유와 평화 인류의 안녕을 위해 말이다.


하갈언니는 소식을 반가워하며 우리와 이테로 데 라 베가의 연합을 권유했었으나, 답이 오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몸 상태가 좋지 못했던 것 같다.


부러진 선글라스


라 무칠라에도 새로운 하루가 밝았다.

아침 샤워를 하고 침대를 정리하면서 선글라스를 침대 위에 올려놨었는데, 나도 모르게 그만 침대에 털썩 앉자 먼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확인해 보니 10년간 쓴 선글라스 다리가 부러져 있었다.

순례길에서 선글라스가 없으면 안 되니 의료용 테이프로 부러진 다리를 칭칭 감아서 연장해 놓았다.


비우기라는 것이 아프고, 슬픈 일만 비워야 진정한 비우기가 아니다.

긍정적이고, 행복했던 것 들도 함께 비워내야 새로움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10년 된 선글라스 하나도 보내기가 힘든 사람이다. 그런데 미운 정 고운 정 다들은 아빠와의 추억과 갑자기 어른이 되어버린 내 마음을 어루만지기 위해서는 비우기가 필수인 것에 이렇게 아무것도 못 보내고 이러고 있는 게 내 현실이었다.


아나는 숙소에 누군가 버리고 간 무거운 패션 선글라스를 쓰라며 나에게 건넨다. 나는 짐이 늘어남에도 정이 든 옛날 선글라스를 바로 버리지 못하고 한동안 선글라스 두 개를 가지고 다녔다.


여전히 오늘도 뜨거운 태양이 뜨자마자 햇살이 타들어가듯 뜨거웠다.


오전 청소

체크인 전에 할 일이 많았다.

우선 우리는 순례자들이 빠져나간 자리 침대보를 벗기고, 쓰레기통을 비우고 빨래통으로 세탁물을 옮겨 담았다.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시키는 걸 돕는 일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라쿠엘(매니저) 방식이 있기 때문에 라꾸엘과 아나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길을 떠나지 않고 현지인처럼 머물며 청소를 하는 체험을 내가 또 언제 할 수 있을까? 제주 지인의 에어 비엔비 깍두기 스탭을 하며 배운 관리 일들이 여기서 이렇게 써먹게 될 줄이야.


영국 할머니 로빈

로빈은 부르고스부터 걷기 시작해서, 걸을 수 있을 만큼 조금씩 걷고, 버스로 점프를 하면서 여기까지 오셨다고 했다.

연세가 많으신데 걷기 위해 산티아고에 오셨다는 것 만으로 존경심이 우러나왔다.

내가 할머니가 되고도 이렇게 순례길을 걸을 수 있을까?


청소를 마치고 아나는 성당예배를 다녀오겠다고 했다.

나는 따라가 볼까 하다가 혼자 고요하게 있고 싶어서 숙소에 남기로 했다.


10년 된 낡고 오래된 나의 선글라스처럼 나의 오래된 가치관과 생각들도 해지고 부러져서 이곳 산티아고를 걸으며 떨어져 나가길 바랐다. 늘 순례자라는 대우를 받으며 챙김만 받던 입장이었다가, 누군가를 챙기기 위해 청소를 하고 다시 맞이할 순례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보니 마드리드를 다녀왔던 일들 따르다호스 그리고 온타나스를 걸으며 겪은 고생이 청소 물에 씻겨 나가듯 피로가 풀린 것 같이 느껴졌다.


수지침 발에 놓기

수지침

평상시 걷지 않아도 순례자의 발은 이미 많이 걸어서 부어 있고 화끈 거린다.


나는 침대에 앉아 통증이 있던 발목 부위에 수지침을 꽂고 말목과 종아리, 통증부위를 마사지하면서 침대에서 뒹굴 거리며 오전 시간을 보냈다.


데이트폭력 미투


오늘 저녁도 라꾸엘에게 기부금을 건내고 식사를 예약했다.  아나는 생각보다 금방 성당에서 돌아와서는 낮잠을 자야 할 것 같다고 한다. 아나가 인스타그램에 올린 데이트폭력 미투 스토리를 내 스토리에 다시 올렸다. 지금 내가 도울 수 있는 방식은 슬픔보다는 현실적인 연대일 것이라 믿는다.


오후 2시

점심시간이 지나자 새로운 순례자들이 속속 체크인을 하고 채워지기 시작했다.

미국인커플 1+1, 미국 대학생 2명, 영국 할머니 로빈 1, 프랑스 여자 1+남자 2 총 8명

오늘 온 순례자들은 어제와 정말 다른 분위기의 숙소 분위기를 만들었다.

어제와 다르게 다들 조용조용한 성격이었고, 저녁식사 시간에도 다들 조용히 앉아 밥을 먹었다.


강아지의 동네 친구들

숙소는 항상 문이 열려 있었기 때문에 가끔가다 동네에 사는 다른 강아지나 고양이가 드나들었다.

강아지의 밥을 훔쳐먹던 한쪽귀가 접혀 있는 왕 귀여운 큰 쉐퍼드와 뒤마당에서 호시탐탐 순례자들이 떨어뜨린 음식과 강아지사료를 훔쳐먹는 도둑고양이였다.


라 무칠라 강아지는 노견이라 할머니처럼 쉐퍼드가 들어오면 꼬리를 흔들며 덩치 큰 셰퍼드를 반겨준다. 마치 동네 사람들이 공동육아를 하고 있는 것처럼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라꾸엘 입장에서 매번 와서 저렇게 밥을 먹고 가니 셰퍼드를 보면 박수를 치며 내쫓았다.


쉐퍼드는 한두 번 밥을 먹는 게 아닌 듯 아주 자연스럽게 밥을 먹고는 빠르게 숙소를 빠져나간다.

나는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시트콤 같아서 웃음만 나왔다. 왜냐하면 점심식사시간 때도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먹고 갔고 저녁에도 또 왔기 때문이다.


아나와 나


딜리버리 서비스

아나와 나는 내일 걸을 숙소까지 배낭을 붙이기로 했다. 한 번도 짐을 부쳐 본 적이 없는 아나는 배낭 분실사고가 생길까 봐 조금 불안해했다.


이테로 데라 베가에서의 마지막 밤이었기 때문에 평상시 근처 본인의 집으로 퇴군을 하던 라꾸엘과 강아지도 스탭방에서 같이 자기로 했다.

아나도 그렇지만 내 발 상태가 어떨지 모르겠어서 일단 짐을 부치기로 결정한 것이다.


내일은 이테로 데라 베가( Itero de la Vega)에서 빌라카자르 데 시르가(Villacázar de Sirga)까지 27km를 걸을 예정이다.



짐 정리

내일 붙일 큰 배낭을 빼두고 작은 에코백에 발목을 강하게 잡아주는 보호대를 넣어 두었다.


저녁식사

그러고 보니 저녁 식사자리에 로빈과 아나는 식사를 함께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속이 안 좋으시다며 그냥 방에서 쉬셨다고 했다. 재미있었던 풍경은 저녁 식사 때 유독 미국 청년 2명에게만 파리가 몰렸다. 갓 대학을 졸업하고 유럽 배낭여행으로 순례여정을 포함시켜 걷고 있는 중이라고 소개를 했다.


자신들이 뉴욕에서 대학을 나오고 미국인이라는 것에 엄청난 자부심이 있는 듯 보였다. 심지어 거만하기까지 느껴졌으니까. 그들은 내가 질문을 해도 답변을 대꾸하지 않았다.


파리가 왜 그들에게만 꼬이는지 이유를 모르는 듯했다. 제대로 씻지 않았거나 옷이 제대로 마르지 않아 그들에게선 쉰내가 났다. 속마음이 올라왔다.(씻어라! 제발!)


해 질 녘 노을


저녁노을

식사를 마치고 나는 어제 갔었던 마을 끝 노을 뷰 맛집으로 향했다.

어제도 아름다웠지만 오늘 노을도 역시나 아름다운 이테로 데라 베가의 일몰을 보며 다시 걸을 마음을 다잡는다.


내일은 아나와 함께 길을 떠난다.

우리는 이틀을 함께 지내고 다음도시로 가는 여정을 함께 하기로 하면서 안정감이 느껴졌다.


라 무칠라에서의 마지막 밤

라꾸엘과 그녀의 강아지 그리고 아나와 나는 넷이 한방에서 잠을 잤다.




10월 9일 새벽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 라꾸엘은 가장 먼저 일어나 순례자들의 아침을 준비했다. 커피와 빵, 잼이 준비되어 있었고, 아침 6시부 터부터 개방된 숙소에는 기부제 아침을 먹으로 들어온 외부인 순례자들과 라무칠라에 묵은 순례자들이 섞여 함께 아침을 먹었다.

라꾸엘과 아나는 며칠을 함께 지내며 정이 많이 든 것 같아 보였다.



출발


10월 9일 7시 55분

라꾸엘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드디어 이테로 데라 베가에서의 잊을 수 없는 휴가가 끝이 났다.

이테로 데라 베가에 도착해 우연히 아나를 다시 만났고, 편하게 엄마품처럼 나에게 위로와 휴식을 안겨 주었다.


드디어 새로운 순례길 여정이 시작이다.


Buen Cam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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