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테로 데 라 베가 가는 길(Itero de la Vega)
내가 묵었던 숙소 중에 한국인이 가장 많았던 숙소였다. 단체 순례자들은 산후안에서도 그랬었지만 동시에 여러 사람이 같은 행동을 하며 엄청난 소음을 발생한다. 그래서 국적을 불구하고 단체 관광객이 머무는 곳은 피하고자 했는데 이번에도 같은 숙소까지 자리를 잡게 되다니 심히 밤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밤이 되었음에도 이들은 잘 생각을 안 했다.
보통 9시가 되면 불을 끄고 아침 일찍 일어나기 위해 잠에 들 준비를 하지만 이 한국인 관광 순례자들은 초 저녁부터 바깥의 테이블에 앉아 한국 포차에서처럼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차라리 외국어라 못 알아들으면 귀를 닫으면 되는데, 다 알아들으니 자꾸만 귀는 바깥쪽으로 향했다.
휴… 제발!!!
숙소메이트
문 앞 침대 일층에는 수잔과 이층 브라질사람 루치아노, 가운데 침대 일층에는 이탈리안과 이층에는 단체관광객 가이드아저씨, 그리고 마지막 창문 바로 앞 일층에는 노랑머리 한국인(이탈리안과 국제커플) 그리고 나는 이층침대에 있었다.
맞은편 왼쪽 자리에 있는 침대 일층에는 따르다호스에서도 함께 묶었던 스웨덴 순례자와 이층에는 한국인 젊은 청년 나 홀로 순례자였다. 이 방안에 있는 사람 중 수잔과 국제 커플과는 바깥 테이블에 앉아 인사를 나눴었다.
잠시 동안 이었지만 한국말을 하며 이 국제 커플이 꽤 재밌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커플이란 것을 알게 됐었다.
K-코골이
그들은 밤늦게까지 술판을 벌이고 10시가 넘어서야 숙소로 요란스러운 소음을 내며 숙소로 돌아왔다.
적나라하게 얘기하자면, 화장실에서 이를 닦으며 가래를 뱉고, 여럿이 모여있을 때 하는 행동들 중에 고성으로 나누는 대화들이 한국에서도 꼴 보기 싫은 한국인 관광객들의 행태였다. 혼자 있을때 한국인들과 여럿이 모여 있을때 모습이 너무 달라지는 한국인들이다. 오랜만에 인상이 찌푸려지면서 잠은 다 잤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음이 전———-혀 안 되는 유럽 건물과 공간들은 그 소음을 확장된 울림통처럼 울림이 더 커진다.
밤새 우리 방 모두를 잠 못 들게 했던 요주의 인물은 한국인 가이드였다.
밤늦게 방에 들어와서 침대 눕자마자 우렁차게 코를 골기 시작했다.코로 고함을 지르는 줄 알았다.
가이드 일로 그 일이 얼마나 고단할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하필 내 옆자리에 가이드님이 자리를 잡고 누웠다.
나는 길을 걸으며 불면증에 잠을 설쳤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늘 쓰러져 잠을 자곤 했었는데, 이번 코골이는 정말 남달랐다. 통나무집은 커다란 울림통처럼 한국인 가이드의 코 고는 소리를 더 크게 들리게 했다. 나는 귀마개를 꽂았음에도 베이스 소리처럼 내 귀에 갖다 대고 소리를 치는 것 같이 느껴졌다.
나는 진짜로 참다 참다 자다가 아저씨를 흔들어 깨웠으나 일어날 기미도 보이질 았았다.
저러다 질식사로 죽는게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정말 몽지아 말대로 발로 걷어 찼어야 했나 싶게 말이다.
같은 라인 침대 이층을 쓰는 루치아노 역시 계속 밤새 방을 들락날락 거리며 잠을 못 잤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따르다호스에서 코 골며 자던 스페인 아저씨의 코골이 소리가 자장가로 느껴질 정도로 그립기까지 했다.
내가 들었던 코골이 중 월드 오브 베스트 였다.
10월 7일 새벽 5시
나는 순례길 여정 중 처음으로 날밤을 새웠다.
부지런한 한국인 단체 관광객들은 새벽부터 부지런하게 출발 준비를 하면서 전체 숙소 안 사람들은 6시쯤 강제기상을 하게 만들었다.
빨리 걸어서 이 단체 관광객과 역이지 않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정말 아쉬운 게 무엇이냐면 산속에 폭 쌓인 아름다운 도시 “온타나스”의 아침을 온전히 즐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아름다움 곳이라도 누구와 어떤 사람들이 어우러져 있었으냐에 따라 그곳을 다르게 기억에 남게 된다.
출발 전
아침서부터 나는 멍하게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구분이 안 가게 불빛에 의지해 앞길을 걸으며 스텝을 밟았다.
그러고 보니 방안에 있던 수잔과 루치아노 그리고 스웨덴 순례자는 내가 나가려고 하기 전에 이미 방을 빠져나간 듯 보였다.
이 또한 순례의 여정의 일부이리라.
다음 숙소에서는 필히 잠을 자고 싶다.
제발!
출발 6:48
아침 단체 관광객의 주문을 받느라 웨이터는 카페에서 신경이 곤두세우며 주문을 받고 있었다.
정신없는 카페 내부에서 빠져나와 테라스에서 아침 커피와 크루아상을 먹었다.
함께 바깥 테이블에서 아침을 먹은 영국인 순례자는 공립 알베르게는 의외로 아주 사람이 적어서 조용하고 좋았다고 한다. 나는 그 얘기를 듣자 코골이 스페인 아저씨를 피하려다 더 큰 똥을 밟은 격이 돼버렸다는 생각을 했다. 한숨도 못 잔 내 몸상태가 얼마나 버텨줄지가 관건인데, 얼마나 걸을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찬 공기와 하늘에 별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불평을 늘어 놓기에 이 길은 너무 아름답다.
온타나스를 빠져나가기 전 수돗가에서 물을 받아 길을 갈 채비를 마쳤다.
온타나스 마을 구경을 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쉬운 마음이 일어났다.
나는 조용히 길을 가고 싶었기 때문에 새벽 기운을 받아 걸음 속도를 올렸다.
새벽길을 가다 보면 뒤에서 랜턴도 없이 발걸음 소리만 들릴 때가 있다.
간혹 들짐승이나 갑자기 사람이 튀어나올까 갑자기 길이 무서워질 때가 있다.
잠이 덜 깨서일까?
어깨를 짓누르던 배낭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고 가볍게 느껴진다.
밤길이라 순례길을 이탈하는 건 아닌지 구글맵과 멀리서 보이는 전등 빛 화살표 표식을 찾아 앞으로 앞으로 길을 걸어 나아갔다. 드디어 등 뒤로 동이 트면서 뒤따라오는 행렬이 보이기 시작했다.
새로 교체한 인솔(깔창)
나는 오늘 "로그로뇨"에서 새로 샀던 시다스 젤리 인솔로 신발 깔창을 교체해 보았다.
젤 인솔로 갈아 끼우고 왼발과 오른발의 걷기 차이가 느껴졌는데 왼발은 피로를 덜 느낀 반면 약하고 더 작은 오른발과 발목은 앞쪽 정강이에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더 압박이 강력한 발목 보호대로 교체 후 걷기를 시작했다.
길을 걷는 내내 신발을 벗었다 풀었다를 반복했다. 걸을 당시에는 인솔이 문제라는 생각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 걸을수록 오른 발목 앞쪽 정강이 통증은 심해지기 시작했다.
멈췄다 섰다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한국인 단체 관광객들과 스페인 단체 관광객들까지 뒤섞여 함께 걷게 됬다. 싫다고 말했더니 자석처럼 나에게 달라붙은 것인가? 허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전구간을 항상 같이 걸었던 것은 아니지만, 단체객들이 많았던 구간들을 생각해 보면 순례길에서 성지로 중요한 구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적지가 있었다던가 뭐 그런? 아마도 그 지역이 성인이나 성당에 큰 의미가 있으리라 짐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안전하고 평탄한 지역이었다는 것이다.
불편함, 익숙하지 않음, 새로운 시선
통증을 느끼다 보니 삶 속에서 느껴지는 불편함이나 단점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나뿐만 아니라 산티아고를 걷는 몇몇 순례자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산티아고 순례길의 상업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특히 프랑스길에서 명상적, 종교적 영적 깨닫음을 얻기 위해 길을 걷는 사람들이 이 길을 걸으며 실망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하갈 언니 역시 조용히 명상적 고요한 순례길을 걷길 원했었다. 하지만 순례길은 그러기엔 이제는 너무 유명해진 커다란 관광명소이다.
명상적 길을 가기 위해서는 시골숲이나 강으로 바다로 더 깊은 자연으로 들어가야 하는 수밖에 없다. 대신에 알베르게 라던가 우연성으로 마주하게 되는 순례자들과의 만남은 못할 테지만 말이다.
줄줄이 뒤따라오는 행렬을 보고 있으면, 한국에서 가을이나 봄에 지리산으로 단풍관광을 온 관광객 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산티아고가 너무 개발되는것과 그렇다고 너무 낙후돼서 정부 지원이 끊기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내 바람이지만 지금 이대로면 좋을 것 같다.
오른쪽 다리를 절뚝이며 산 니콜라스 수도원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이곳은 최초의 알베르게의 모습이 그대로 복원되어 있는 곳이자 심지어 지금도 숙박객을 받고 있었다.
내 캐나다순례자 친구 캐시는 이곳에서 하룻밤을 머무는 경험에 대해 얘기했었는데, 어떤 곳들보다 특별한 밤을 보냈다고 얘기해 줬었다.
바로 옆캠핑장에서 텐트를 치고 숙박을 하는 순례자들도 보였다.
자원봉사자들은 아침 커피를 제공하고 기부금을 받았다.
나는 몇 푼 되지 않는 돈이었지만 1유로를 기부했다.
이곳을 자신의 시간을 들여 지키고 있는 이들에게 작은 도움이 전해지길 바랐다.
온타나스에서 잃어났던 분노와 짜증 그리고 피로를 이곳에서 고해 성사 하고 싶었다. 그리고 오늘 지금의 걸음에 축복이 깃들기를 기도했다.
통증
나는 수비리 가는 길처럼 몸 상태가 좋지 못했던 것 같다.
그때도 생각해보면 전날 긴장으로 잠을 설쳤었다.
가다 멈추다를 반복하다 보니 지나가던 순례자들이 한 번씩 내 상태를 살폈다.
해가 정중앙에 뜨고 정강이 앞근육은 더 아파오기 시작했다. 나는 이번에 마을이 나오면 무조건 그곳에서 짐을 풀어야겠다 마음을 먹었다.
마드리드에서 휴가를 마치고 따르다 호스부터 다시 시작된 여정에 나는 계속해서 강행군을 하고 있었더니 몸이 더 이상 못 버티겠다고 신호를 보낸 것이다. 역시 쉼표를 붙일 시기를 잘 볼 줄 아는 타이밍도 참 중요하다.
쉼표를 찍고 마침표로 새로운 여정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한데, 나는 다시 걸을 생각에 마음이 조급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렇게 불평불만과 날 선 이틀을 보내게 된 것같았다.
이곳에서 다 털어내고 비워내고 싶다고 했으면서 나는 다시 예전 습관대로 가시 돋친 예민함을 꺼내놨던 것이다.
발목수술
30살이 되던 해 나는 운동을 하다 오른쪽 발목 인대가 끊어져서 수술을 했었다.
그때도 생각해 보면 나 자신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무식하게 몸으로 스트레스를 풀었던 것 같다.
내 마음을 어루만지고 이해하는 방법을 몰라 몸으로 몰아붙여 운동을 해댔다. 매일 줄넘기를 하던 추운 어느 날 갑자기 발목 통증이 계속 지속되었다. 몸의 변화만큼이나 마음까지도 나를 잘 모를 때 일어날 수 있는 실수였다. 그러고 나는 인대 접합 수술과 한 달의 기브스 그리고 이 개월의 재활치료로 삼 개월이라는 기간을 보내야 했다.
깁스를 풀고 재활운동을 하면서 운동선수들이 재활을 통해 복귀전을 치렀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나란 사람은 직접 경험해 보지 않으면 믿질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길을 걷고 있는 지금도 그때 그 발목의 기억이 길을 멈추고 제발 쉬라고 부여잡고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Itero de ra Vega
그렇게 걷고 걸어 20km 지점 ‘이터로 데 라 베가’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뭐 특별할 것도 없는 스페인의 작은 마을이 이렇게 나에게 특별한 추억으로 남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단지 지친 다리를 멈춰서 마을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보였던 첫 번째 숙소 “La Mochila (라 무칠라)” 가 나타났다.
나는 마을을 한 바퀴 돌아 슈퍼마켓을 찾아다녔다.
사실 마음은 이곳에서 쉴 계획이 전혀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일단 점심이나 먹고 지나칠 계획이었으나 내 발목 상태는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
'이테로 데 라 베가'에는 한 개의 음식점과 4개 정도의 알베르게 그리고 교회가 있던 걸로 기억이 난다.
라 무칠라는 기부제 알베르게이다. 점심을 먹고 기운이 돌아오면 다음 도시까지 걸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왜 그런 생각을 했냐 하면 길이 완만한 지형이기 때문에 보통 30km의 진도를 나가는 구간이다.
La Mochila 체크인
라 무칠라 숙소 앞 대기하는 벤치에는 영국 할머니와 온타나스에서 함께 묵었던 스웨덴 순례자가 체크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길은 어렵지 않았으나 그간의 피로 누적과 더위까지 먹고 있었으니 다들 많이 지친 상태로 보였다.
숙소 앞에는 1시 전에는 문을 두드리지 말고 기다리라는 안내문이 쓰여있다. 굳게 닫힌 문 앞에서 기다리는 동안 청소기 소리가 들려왔다.
1시가 되었을까?
문이 열리고 밝게 웃으며 예상밖의 내가 아는 얼굴이 체크인을 기다리던 순례자들을 맞이했다.
“라 무칠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나: 아니 네가 왜 여기 있어?
‘아나’였다.
아나는 초반 길 ‘로스 아르고스’에서 수잔과 안면을 텄었고, 친해진 것은 ’나바레떼‘에서 하갈언니와 추석 보름달을 감상하며 친해졌었는데 이곳에서 호스트로 우리를 맞이하고 있으니 어리둥절했다.
아나: 발이 아파서 며칠 머물면서 자원봉사자로 일하고 있어! 너 여기 머물려고?
나: 방이 있을까? 예약을 한건 아니거든.
아나: 라꾸엘(라 무칠라 매니저)에게 얘기해 볼게!
나: 나 발 생태가 안 좋아서 일인실에서 쉬었으면 좋겠어.
갑자기 반가운 조우에 기운이 솟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이 마을에서 재밌는 추억이 쌓일 것 같은 그런 느낌 말이다. 어른들만 가득한 순례길에 동갑내기 친구를 만나긴 쉬운 일이 아니다.
아나는 브라질 사람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남미 특유의 유쾌함과 감수성이 풍부함을 가지고 있다.
라 무칠라 문이 열리고 삼바 리듬의 노랫소리가 환호해 주는 느낌이 들었다.
‘아나‘에게선 항상 그 노래 노리가 들린다.
아나는 체크인 통역을 도와주고, 나를 매니저에게 소개해주며 스탭방에 머물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게 가능했던 것은 아나가 자원봉사로 이 숙소에 머물고 있었고, 조용한 숙소를 원하던 나에게 스탭방에서 거의 혼자 지내던 아나 방에는 남은 침대가 있었다.
어쩌다 갑자기 자원봉사
어쩌다 보니 아나와 함께 ‘라 무칠라’ 한국어, 영어 통역 자원봉사자가 됬다.
돈을 안 낸 것은 아니지만 0층 스탭방에 아나와 나 그리고 라꾸엘만 머물고 있기 때문에 특혜였다.
어디에서 이런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을까?
공립 알베르게 자원봉사를 하기 위해서는 자원봉사자들이 되기 위한 교육을 수료해야 한다.
여기는 사립 기부 알베르게 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숙소에는 아주 귀여운 마스코트 강아지가 있다.
아직 결정한 것은 아니지만 발 생태를 보고 하루 더 쉬어 가야 할지 모르겠다.
짐을 풀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곳이 마음에 든다.
온타나스와 따르다호스에서 쌓인 피로가 이곳에서 내려갈 것 같다.
한국어 안내문
라꾸엘(매니저)은 스페인 사람으로 불어와 스페인어가 가능하나 영어는 어려워했다. 그래서 아나는 이곳에서 영어와 브라질, 포르투칼어 통역 그리고 세탁물 정리 봉사를 했다. 이곳에 유일하게 부족한 것이라면 순례자 참가자 순위 5위인 한국사람들을 위한 한국어 안내문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따르다호스‘에서 해준 한국어 안내문처럼 ‘라 무칠라’에 있던 영어안내문을 참고로 한국어 안내문을 작성했다. 나름 특혜에 대한 보답이라고 해야 하나?
아나처럼 메인 스탭은 아니지만 제주도에 지인이 운영하는 에어비앤비 생각이 났다. 그곳의 디자인 작업을 돕곤 했었다. 나름 깍두기 스태프로 능력이 도움이 됐으리라 본다.
오늘의 점심
숙소를 뺑 둘러 걸어 나가면 공립 알베르게가 있는 곳에 이 동네 유일한 슈퍼마켓이 나타난다.
일단 0층 방 침대에 짐을 풀고 샤워를 하고는 인스턴트 파스타를 사 왔다.
슈퍼에는 잠시 이곳에서 점심을 먹고 다음 도시인 “프로미스타”로 이동을 준비 중인 순례자들이 모여 있었다.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시골에서는 배가 고파도 아무 때나 슈퍼 문이 열려 있는 게 아닌지라 미리 장을 봐놓았다.
뜨겁게 내리쪼이는 태양볕이 모두를 "달리의 시계"처럼 늘어지게 만들었다.
두 번째 점심
라꾸엘과 아나가 체크인을 마칠 즈음 다시 점심을 차려주었다.
파스타를 먹었는데 또 밥을 보자 이게 또 들어가 진다. 공짜 밥 먹었으니 일해야지!
라꾸엘과 아나는 며칠 전 아나의 생일 파티 겸 도시에 가서 밤새 클럽에서 놀고 와서 너무 피곤하다고 했다.
역시 차가 있으니 그게 가능하구나?
순례길 중간에 마드리드 여행을 생각한 나 나, 길 중간에 생일 파티로 클럽에 가는 거나 와~ 신박한대?
둘은 잠을 못 자서 괭장히 피곤한 상태가 느껴졌다.
그전날 가이드 아저씨 코 고는 소리에 잠을 설친 나까지 세 여자가 눈이 퀭한 상태로 오후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라꾸엘과 아나와 점심 식사를 마치고 진짜 방에 들어와 침대에 앉았다.
지금 발 상태면 내일도 쉬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트래킹화에서 오른쪽만 시다스 젤리 인솔을 빼고, 원래 신던 기능성 깔창으로 오른쪽만 갈아 끼웠다.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왔는데 방 창문 틈으로 햇볕에 만들어진 그림자가 아름답게 드리워졌다.
BAR Tachu
'이테로 데 라 베가'에 유일하게 있는 음식점에 온타나스에서 함께 방을 묶었던 이탈리아+한국인 커플을 다시 만나게 됐다. 우리는 이곳에 와서야 제대로 인사를 나눌수 있었다. 우연히 이 마을을 지나다 발목 통증으로 숙소에 짐을 풀었단 이야기로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산티아고 로맨스
이 커플은 재미있는 사연이 있을 것 같단 이야기를 온타나스편에서 했었는데, 알고 보니 이들은 산티아고를 3번째 걷고 있었다. 첫 번째는 따로 각자 걸었고, 두 번째는 커플이 되어 함께 걸었다. 그리고 이번 세 번째는 부부가 되어 마을마다 쉬어가며 천천히 걸으며 숙소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꽤 로맨틱하게 들리지 않는가?
정말 희박하지만 "산티아고 로맨스" 는 정말 존재하긴 한다. 이 커플은 영어로 소통하고 있었고, 우리가 한국어로 빠르게 말을 풀어나가자 이탈리아 남편은 한참을 멀뚱 거리며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해했다. 한국인 관광객들 얘기를 하며 우리끼리 키득거렸기 때문이다.
세 번째 산티아고는 어떤 느낌일까? 나는 이제야 겨우 길에 적응을 해나가고 있었는데 이들의 표정에는 그냥 그것 조차 즐기라며 말하는 듯 여유로워 보였다.
천천히 걷기
길을 천천히 즐겨야 하는 이유는 이런 우연한 발걸음에서 오는 인연 때문이다.
와닿는 발길마다 뜻깊은 인연이 발에 감긴다.
내가 '이테로 데 라 베가'에서 길을 멈추지 않았다면, 아나를 만나 라 무칠라에서 이틀이나 머물며 자원봉사를 하게 됐을 거라고는 분명 온타나스에서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그리고 산티아고가 맺어준 커플을 만나 로맨스가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들을 수 있었을까?
따르다호스 가는 길에 마주친 카르멘이 던진 명언처럼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한 것"이다.
내가 마을을 구경하며 바깥을 돌아다니는 동안 라꾸엘과 아나는 뒷마당에서 빨래를 널고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녁이 되었을 때 체크인을 마감하고 숙소가 가득 찾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저녁 만찬
숙소에서 준비하는 저녁 만찬 메뉴는 라꾸엘이 준비하는 ‘스페인 전통 가정식’이다.
순례객으로 가득 찬 알베르게에는 유독 프랑스 순례자들이 많았다. 온타나스에서 만났던 샌드위치 아저씨 무리들까지 숙소는 프랑스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리고 유일하게 마지막에 체크인을 두드렸던 수잔의 한국인 지인 'KIM아저씨'까지 포함 아시아인은 나와 킴 아저씨 이렇게 딱 두 명이었다.
내 옆에 앉은 영국인 할머니 로빈, 영국에 사는 방글라데시 사람 등등 길게 뻗은 탁자에 모두 앉아 햇살을 받으며 프랑스 사람들은 이미 모두 아는 노래인듯 다 같이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잠깐 길을 벗어난 청결에 대한 이야기이긴 한데 이 구간부터 정말 파리가 많았다. 계속 음식에 영역을 침범하지 못하게 손을 휘저어야 했다.)
아나까지 테이블에 참석해서 우리는 축배를 들고 저녁을 함께 했다. 연한 레드와인이 무제한으로 나왔기 때문에 우리는 밤이 어두워져 디저트가 나올 때까지 계속 잔을 부딪히며 오늘 하루의 여독을 풀었다.
유럽 문화에서 잔을 부딪히며 눈을 바라보는 것이 매너이다. 그래서 나는 그날 함께 저녁 만찬자리를 함께한 한 사람 한 사람을 눈으로 담으며 모두의 안부를 물을 수 있었던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정리
식사를 모두 마치고 아나와 라꾸엘과 식기류 옮기는 것을 도왔다. 내일 걷지 않고 여기 머물러 쉴 생각을 하니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평소보다 많이 마신 와인을 깰 겸 해 질 녘 마을 끝자락까지 나가 잠시 거닐었다.
해가 지는 풍경을 보고 있으니 약간 오른 취기까지 나는 나도 모르게 이런 얘길 했다.
이 맛에 순례길 걷지 않겠어?
어제까지만 해도 지쳐 있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나는 휴식이 필요했던 거다.
마을 끝까지 걸어, 공원 벤치에 앉아 캐나다에 사는 친구와 한참을 전화 통화를 했다.
이테로 데 라 베가의 밤
저녁이 되어도 술집에 불은 꽤 늦게까지 꺼지지 않았다.
슈퍼에서 사 온 술을 뒷마당에서 마시는 순례자도 있고, 각자 스페인의 긴 밤을 여유롭게 보내고 있다.
내일 떠날 사람들처럼 보이지 않게 이 풍경이 이질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킴 아저씨 역시 이곳에서 다시 만나 “라 무칠라”에 머물게 된 것이었기 때문에 의도치 않게 킴 아저씨와도 안면을 트게 되었다.
라꾸엘과 주방에서 저녁 식기 정리를 돕고 나서 아나와 방에 들어왔다.
아나도 내일까지 이곳에서 쉴 계획이라고 한다.
지친 발이 걷지 않고 있는데도 발이 뜨겁다.
보타겔크림을 다리에 발라 마사지를 하고 잠을 자야겠다.
오늘은 꿀잠 잘 수 있기를!
Buen Cami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