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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작가 Oct 24. 2024

나아가라!

(Hontanas)온타나스 가는 길

2023년 10월 5일 타르다호스 알베르게 숙소 안

10인실 숙소에 모두 들어와 우리는 뒤늦게 들어온 독일인 순례자의 소개를 들으며 각자 침대에서 잠 잘 준비를 했다.


그녀는 20대 대학생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독일 집에서부터 걷기 시작한 이 친구는 이미 3,000km를 돌파해 하루에 50km를 걸어 나가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이야기를 듣던 순례자들: 그게 하루에 걸을 수 있는 가능한 거리였군요?

독일인 순례자: 저도 걷다 보니 탄력이 붙어서 가능해졌어요.

순례자들: 다리는 괜찮아요?

독일인 순례자: 멀쩡해요.


하루에 20km~30km를 걷는 게 평균적인 순례자의 거리라면 50km는 이틀을 하루로 압축해서 걷는 것이다.

각자의 거리가 다르지만 이 독일인 피지컬이 조금 남다르긴 했다. 일단 175의 큰 키에 큰 발을 가진 여성이다. 그리고 젊다.(키 크고 젊고 건강한 신체가 제일 부러운 부분)


30km 이상은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던 내 얕은 고정관념은 여기서 정신적 신체적으로 와르르 무너진다.

인간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순례자들: 선글라스 자국만 남은 것도 그 때문이었군요?

독일인 순례자: 저도 이 그을린 자국이 싫지만 어쩔 수 없어요.


그녀는 오랜 시간 얼굴에 안착된 선글라스 자국이 원래 피부색과 그을린 피부 차이가 엄청났다.

선글라스를 벗고 있어도 투명 선글라스를 쓴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수다를 떨다가 10시가 되는 시간 불을 끄고 바로 침대로 들어가 잠에 빠져 들었다.





10월 6일 새벽

눈 떠 있는 시간엔 줄 담배를 피워대는 스페인 아저씨 빼고는 이날 이 작은 방에서 잠을 잘 잔 순례자가 몇 명이나 될까?


밤새 울려 퍼진 코골이 소리는 안 그래도 근육통 때문에 예민해진 신경을 건드린다.

새벽 5시가 되자 독일인 순례자와 젊은 순례자들 삼총사가 일어나 걸을 준비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밤새 귀마개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한쪽 귀마개를 어딘가로 던져버렸던 것 같다.

새벽에 어둠 속에서 이불속을 팔로 휘졌다가, 찾을 길이 없어 오른쪽에 꽂혀 있던 귀마개를 반으로 찢어서 왼쪽 귓구멍에 꾸겨 넣고는 코 고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작은 마을에 멈추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

지도에서 멈추라고 하는 루트가 아니기 때문이다.

보통 지나치는 곳이라 여기는 이 작은 마을들이 오히려 더 자연스럽고 진짜 스페인의 시골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게다가 누구나 멈추는 곳에는 순례자들만 많고 아주 시끄럽다.



침대 위 풍경

알베르게 이층 침대에 싱글 사이즈인 벙커 침대는 대부분 난간이 없다.(있다면 꽤 친절한 시설임)

잠버릇이 심해서 이층에서 잠들었다가 일층으로 떨어지는 날엔 딱딱한 시멘트 바닥에 부딪혀 입원행이 불가피하다.


나는 침대 위에 다음날 입어야 하는 옷가지와 보조가방, 마사지 용품, 목욕파우치, 옷파우치를 늘어놓고는 침낭 안에 애벌레처럼 벽에 딱 붙어서 잠이 들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여유 있게 잘 수 있는 환경은 아니다.


그러니까 소음이나 사생활 보호 따위는 불가능한 환경이기 때문에 잠을 그리 깊게 자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순례자들은 왜 힘들고 열악한 알베르게에 머물러 공동생활을 하며 앞으로 나아가는가?

그것은 순례길을 걷고 있는 전통적인 순례자들의 전통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일상생활의 편안함과 안락함을 떠나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비우며 모두가 평등한 환경으로 함께 걸어 나간다.

현대에는 여유 있게 호텔예약을 한 후, 배낭을 매번 동키 서비스로 보내며 걷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 역시 20km 이상을 매일 걸어야 하는 것은 모두에게 동등하다.


내가 이렇게 글을 쓰면서 코 고는 순례자들에 대해 투덜거리면서도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순례자들 모두 그런 작은 불만의 씨앗조차 견뎌내고 이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모든 일에 이런 작은 잡음 하나 티클 하나 없을 수 없지 않은가?


 알베르게에서 코골이 순례자가 없는 방을 달라 기도하는 것은 어찌 보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함께 걷고 있는 그들의 걸음을 보며 존경하고 위안을 얻으며 나아간다.


아침 7시 숙소

부지런한 순례자들은 아침 해가 뜨기 전 모두 빠져나가고, 나와 프랑스 로브 순례자만 숙소방에 남았다.

나는 게으른 순례자로 어제 마드리드에서부터 새벽 5시에 시작한 하루가 피곤했었기 때문에 새벽 5시에 눈을 떴어도 7시가 넘어 하루를 시작했다.


이층침대에서 내려와 침대 안쪽 바닥에 떨어진 나의 왼쪽 귀마개를 찾았다.

밤에 던진 게 분명하다.

프랑스 로브 순례자 역시 바로 옆자리에서 자던 스페인 골초 순례자 덕분에 한숨도 못 잤다고 한다.

나는 그녀에게 겨우 귀마개를 찾았다고 말했더니 자신이 여분이 있다며 한 개를 건넨다.


따르다호스에 도착해 짐을 풀자마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마드리드 숙소에 나의 마사지볼을 두고 온걸 짐을 풀자마자 알 수 있었다. 나의 베개이자 마사지기구로 유용한 아이템을 두고 왔단 사실에 아쉬움이 가득하다. 뭐 그래도 짐 부피가 덕분에 줄은 건 나쁘지 않다.


순례길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는 작은 것 하나라도 나누며 순례자들 간의 생기는 자연스러운 우정은 평생을 함께하는 친구들보다도 끈끈하고 깊어진다.

전우애 같은 거랄까?


가장 힘든 시기 작은 것 하나 나누며 함께 걷는 행위는 순례자를 영혼의 동지로 이끈다.

배급받았던 부직포시트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0층 공용 거실로 가서 제공하는 아침식사를 먹었다.

기부제 숙소임에도 풍성한 아침상이 차려져 있었다.



숙소에서의 아침식사

응접실 소파에 앉아 카르멘은 뒤꿈치 물집에 대형 반창고를 새로 갈고 있었고, 우리는 각자 물집에 관련된 정보를 공유했다. 빵에 잼을 듬뿍 발라 커피와 넉넉하게 아침을 먹고 이제 출발이다.


나는 이곳에서 받은 작고 소중한 마음과 나눔을 보답하고 싶어졌다.

 혹시라도 이곳에 머물 한국인 순례자들을 위해 한국어 안내문과 알베르게에서 무료로 자원봉사를 하고 숙소관리를 하는 이들을 위해 적어도 10유로의 기부금을 내달라는 안내문을 함께 적었다.


초중반부로 들어선 순례길이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으나 순례자들 모두 익숙한 피로를 느끼면서 진한 커피를 들이켜고 아침 길을 나섰다.

오늘 25km에서 28km를 걷는 것이 나의 최대 목표이지만, 계획일 뿐이다. 내 발이 갈 수 있을 때까지 걸을 것이다.



출발 8시

매일 보는 일출이 매일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인생을 살며 이렇게 명확한 지표를 가지고 걸을 수 있는 지금이 나에겐 머리를 비우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지금이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 로브 순례자

따르다호스에서 함께 묶었던 프랑스 로브 순례자와 자주 마주쳤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왜 이 길을 걷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녀는 코로나 기간 동안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 이후 살 던 집도 정리하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서 산티아고를 부르고스부터 걷고 있다고 한다.


우연히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같은 주제의 이야기로 걷기 시작했다.

나 역시 앞으로 에 대한 답은 없지만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는 것은 서로 같았다.


순례길 초반 누군가에게 부모님 얘기를 꺼낼 때마다 울음을 터뜨렸었다. 오늘은 서로 같은 처지에 놓인 두 여자가 서로에 대한 이해 하고 동질감을 느끼며 말이 필요 없는 위로를 건넨다.


가족의 상실에 대한 고통을 메우고 자신으로 살아내는 것!


상실의 상처는 매워질까?

나는 아빠의 부고 이후, 시계 속 정교하게 돌아가고 있는 부품들 중 알 수 없는 작은 부품이 정처 없는 암흑 속으로 떨어져 나가는 느낌을 받았었다.


그렇게 가슴속 암흑으로 바뀌어 버린 공간을 어떻게 매울 수 있는 건가?

인셉션에 나오는 킥을 하는 토템 팽이 같이 나만 알고 있던 소품인데, 어딨는지 못 찾고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지 못하는 악몽 속에서 내가 아빠의 죽음으로 느꼈던 상실의 고통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녀는 고등학생 자녀를 친정에 맡기고 여행을 그냥 왔다고 했다. 훌쩍 산티아고를 떠나 걸을 수 있다니 참 부러운 환경이다.

우리는 한참을 두 아버지를 잃은 딸로서 이야기를  나누다 어느새 뜨거워진 아침 해와 함께 나는 좀 더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나 역시 아직 까지 내 미래를 어떻게 할지 앞이 깜깜했지만 지금은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나의 명상이자 목표였다.


나 자신이 뭔지 모를 두고 온 것을 찾아 잃어버린 길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잃어버린 그 자리에서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분명 예전과는 다르겠지만 그곳에서 나는 새로운 기회를 다시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점점 우리 둘은 걸음 간격이 벌어지자 각자 손을 흔들고 나는 앞길을 걸어 나갔다.



태양

한참을 마른 해바라기 평원을 걸으며 완만한 길을 걸어 나갔다.

저 멀리 마을까지 펼쳐진 대 평원의 풍경이 순례길을 검색할 때 꼭 한 번씩은 봤음직한 멋진 풍경이 나타났다.


그거 아는가?


가장 아름다운 풍경 안에 인간이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에 편의시설이 그늘 따위는 전혀 없다.

순례자들의 행렬에 발걸음으로 일어나는 모래바람만이 가장 큰 자극 중에 하나이다.


어제 걸으며 카르멘이 어제 했던 명언이 머릿속에 다시 떠올랐다.

프랑스 순례자의 슬픔과 상실 그리고 이 길을 걸어 나가는 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니 오직 현재만 존재한다.


뜨거운 태양열기와 갈증, 가방이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 물집이 생긴 발로 한발 한발 통증을 참아가며 걸어 나가는 것.


또다시 프랑스 로브 순례자를 만나게 되길 기대했으나, 아까 초반 길에서 손을 흔들고 헤어진 이후 길에서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


항상 모든 만남에는 아쉬움과 설렘이 순간순간 뒤섞여 있기 때문에 현재에 최선을 다하려 한다.

길은 완만한 경사로 작은 언덕들이 반복했다. 나는 어제 부르고스에서 돌아와 정신없이 타르다호스에 왔던지라 비로소 오늘 제대로 걷는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3일을 쉬었으니 그만큼 새로운 순례자들이 내 앞을 지나갔다.


트레킹용 유모차 자전거


어린이 순례자

길을 걷다 보면 종종 보이는 "어린이나 갓난아이" 순례자들이 보인다.

20km의 장시간을 그늘 하나 없는 길을 걷는 조건이 아이에게는 더 쉽지 않은 길이다.


이날 함께 걷던 6살 정도의 아들과 엄마는 유모차용 트레킹 자전거를 몰고 순례길을 걷고 있다.

미국, 캐나다, 아시아계 사람들은 저 광경을 보고 십분 놀라지 않을 수 없지만, 유럽인들에게는 일상이라는 듯 고개를 으쓱하는 모습이다. 이것이 트레킹천국의 일상인가?


엄마는 그늘막이 있는 트레킹 유모차를 끌고 산을 올랐다. 확실히 부르고스 전 후로 체감 적으로도 지형이 바뀌었단 느낌이 들었다. 부르고스 전에는 산을 타는 느낌이 들었지만 부르고스 이후에는 산을 넘는데도 그늘과 수풀이 그다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휴식처로 만들어 놓은 곳들이나 드문 드문 보이는 나무그늘에서 더위를 식혀야 했다.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Hornillos Del Camino) 9.4km

가는 길 내내 펼쳐진 평원에 10km 중간 정도 걸은 지금 이제야 마을이 나타났다.

그 말은 식수대를 찾아 물을 뜨거나 잠시 그늘에 들어가 더위를 식혀야 한다는 뜻이다.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점심을 먹기도 애매해서 마을을 지나쳐 가기로 결정했다.


산볼(San Bol) 14.9km

산볼 마을에 도착했을 때 더위를 피해 신발을 벗고 의자에 늘어져 쉬고 있는 네덜란드 순례자 아저씨와 마주쳤다. 따르다호스에서 함께 아침을 먹은 숙소메이트이다.


우리는 14.9km 지점에서 다시 마주했다.

길 중간중간 생뚱맞게 자라고 있는 나무들을 등지고 순례자들은 그 나무 그늘 아래 안아 휴식을 취한다.



휴식

한참을 걷는데 나무그늘 아래 앉아있는 조각상이 보였다. 나는 피레네에서 봤던 하얀 소처럼 조각상이라고 착각이 들 정도였다. 너무 신기하고 누가 저기 작품을 만들어 놓았을까 생각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조각상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순례자들이 입은 옷들이 하도 알록달록하니까 멀리서 보기에 그렇게 조각상으로 보였다.

프랑스 아저씨였는데 큰 빵에 하몽을 얹어서 빵을 먹고 있었다. 그 자리가 나무가 있는 위치라 앞에서는 그늘을 피해 앉아 휴식을 취하고, 나무 그늘 위에는 다들 화장실 볼일을 보는 뭐 그런 곳이었다.


빵 사이즈가 30cm 정도는 돼 보였다.

아저씨는 친구를 기다리는 중이라며 전화로 불어로 뭐라 뭐라 하더니 나에게 샌드위치가 너무 크다며 빵의 반을 건넸다.


빵 인심이 후한 유럽이다. 나는 출출한 터에 빼지 않고 넙죽 샌드위치를 받아 아저씨와 스몰톡을 했다.

무언가 주는 사람이라고 충고나 넋두리를 늘어놓지 않아 정신적 피로도가 없다.

빵을 순식간에 다 먹고 감사 인사를 전하고 다시 땡볕으로 걸어 나갔다.


정말 가끔가다 보면 생뚱맞은 곳에 숙소들이 있다. 마을과도 많이 떨어져 있고 멀리서 외관을 보니 수영장까지 딸려 있다.  나는 숙소 가는 길 입구 표지판을 보면서 저 숙소에 짐을 풀까 한참을 간판 앞에 서서 고민을 했다.


샌드위치 아저씨는 어느새 내 뒤를 뒤따라 걷기 시작했는데, 나를 보더니 저기 머물 거냐며 말을 건넨다.


나: 아저씨는 어디 머무세요?

아저씨: 글쎄, 조금만 더 가면 온타나스에요.

일단 더 걸어야지 않겠어요?


하지만 너무 뜨겁다.


잠시 주춤하며 멈추려 했는데 다시 네덜란드 아저씨가 나타났다.

네덜란드 순례자: 거의 다 왔어요! 조금만 더 가면 온타나스에요! 갑시다!

기합을 불어넣어 주신다.


뜨겁게 달궈진 땅에 열기가 빠져나가지 않는 뜨거운 트레킹화를 신고 걷는 것은 정말 고역이다.

거의 다 왔다는 말은 1시간에서 2시간은 더 가야 한다는 소리이다.


온타나스가 멀리서 보인다.

언덕아래 폭 파인 곳에 둘러싸인 마을이다.



파워 워킹으로 지나가는 유러피언들이 진짜 신기한 건 모자나 선글라스도 끼지 않고 스틱에 의지해 걷는다는 것이다. 한국사람들은 햇볕 피하려고 난리인데 붉게 그을린 구릿빛 피부를 축복으로 아니까.


드디어 온타나스 표지판과 내리막길이 나타났다.

숙소를 어디로 잡아야 할지 아직 정하지 못했지만 일단 공립 알베르게를 먼저 찾아보고 잠시 쉬면서 점심식사를 하고 여정을 결정해야 할 것 같다.



온타나스

온타나스에 도착하자 숙소들이 줄지어 보이기 시작했다. 마을 초입에 원래 묶고 싶었던 수영장이 딸린 숙소가 있었는데 전화를 해보니 이미 예약이 다 찼다고 한다. 마을의 중심부까지 더 내려갔다.


야외 파라솔과 레스토랑이 좁은 골목길 한 곳에 뭉쳐 있어서 네널란드 아저씨와 나는 일단 파라솔에 짐을 내려놓고 점심을 먹은 후 고민해 보기로 했다. 왜냐하면 온타나스에서 콘벤토 데 산 안톤(Convento de San Anťon)까지는 5km를 더 가야 하는 지라 일단 휴식이 절실하다.


Mesón Albergue El Puntido 14:49

숙소 보다 점심을 먹으려고 들어간 음식점에 들어가자 수잔과 아까 혼자서 씩씩하게 걷던 독일 젊은 여성 순례자가 테이블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수잔은 이곳에 체크인을 했다고 한다.


나는 수잔이 이곳에 머문다는 소식을 듣고, 다른 조건을 보지 않고 체크인을 해야겠다 마음을 먹었다.

사실 이곳에 어떤 사람들이 머무는지 차분히 먼저 알아보고 결정을 했어야 했는데, 그 부분이 사실 조금 아쉬운 결정이었다. 알고 보니 이곳이 한국인 단체 순례객 예약지라는 걸 알았다면 나는 이곳에 짐을 풀지 않았을 것이다.


엄마의 염주팔지

초반에 불길한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나는 2022년 엄마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나서부터 엄마의 기도가 들어간 염주를 항상 왼쪽 팔에 차고 다녔다. 마치 엄마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연결점처럼 엄마의 건강과 안녕을 빌기 위해 산티아고에도 가지고 갔다.


매번 무거운 가방을 짊어졌다가 내리기를 반복하며 나의 팔찌는 해질 때로 해진 상태였다. 아직 까지는 잘 버텨줬기 때문에 신경 쓰고 있지 않았는데, 갑자기 그 장소에 배낭을 내려놓으며 팔찌가 터져 버렸다.


알알이 터져 바닥에 염주알이 굴러다녔다.

수잔과 독일청년순례자는 굴러간 염주알을 함께 찾아 챙겨 주었는데, 정말 미안함과 고마움이 교차했다.


이곳은 내가 숙소를 정하는 기준에 부합하진 않았다. 하지만 우선 터진 염주알을 보조가방 주머니에 주워 담았다.


염주가 터지면서 더 걷고자 했던 의지도 조금은 꺾였던 것 같다. 그렇게 오늘 역시 예상을 벗어난 하루가 시작됐다.


점심

체크인을 마치고 1층에 올라가 짐을 풀고 수잔이 있는 밖으로 다시 나왔다. 마드리드 여행 등등 그간의 에피소드 썰을 풀며 우리는 긴 인사를 나눴다. 나는 금세 배가 고파져서 근처 레스토랑에 점심을 먹으로 들어갔다. 역시 지치고 기운이 빠지는 일에는 식후경 아닌가?

속상하지만 배를 채우면 기분도 나아질 것이다.



온타나스에는 레스토랑만 있고, 슈퍼마켓은 까스트로해릿까지 걸어가야 상황이다.

다 씻고 내려왔는데 6km를 더 가라고 하니 웃음이 나왔다.


나와 함께 걷던 네덜란드 아저씨는 내 숙소 바로 옆에 있는 공립 알베르게에 짐을 풀고 파라솔에 긴 다리를 의자에 올리고 앉아 있었다. 나는 코스요리로 먹기는 지겨워서 그냥 치킨세트와 틴토 데 베라노(술), 감자칩만 먹겠다고 얘기하고는 빈테이블에 앉아 메뉴를 기다렸다.


늘 스페인에서 식사를 하며 궁금했던 건데 후추는 테이블 비취가 되어 있지 않았다.

소금과 후추 그리고 식초를 달라고 요청해야 했다.

프랑스에서는 겪어보지 않은 음식문화여서 늘 손을 들어 주문을 했는데, 내가 이렇게 후추를 좋아했나 싶을 정로 늘 후추를 주문했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시간 한산한 레스토랑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면서 식사를 마쳤다.

후식으로 야무지게 아이스크림까지 시켜 먹고는 다시 뜨거운 밖으로 나왔다.


번외 이야기

나는 한국에서 꽤나 많은 잔병을 달고 다녔었다. 그런데 산티아고를 걷는 지금 각종 통증과 질병증상이 사라지고 완치가 된 느낌이 들었다. 우선 거의 쌀밥을 먹질 못하는 산티아고에서 나는 오히려 속이 편했던 것 같다.


그것은 나에게 평소에 먹던 식단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기회가 됐다. 그리고 짜다고 소문난 스페인 음식은 운동량이 많은 순례자에게는 탄단지에 딱 맞는 식단이 아니었나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식사를 마치고, 자연스럽게 수잔이 앉아 있는 야외테이블에 앉았다.

수잔의 옆테이블엔 아까 샌드위치를 나눠준 프랑스 아저씨가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시고 계셨다.

워낙 좁은 골목에 모두 파라솔 의자에 앉아 쉬고 있으니 누가 지나가고 들어오는 나가는지 다 알 수 있다.


한국인 단체 관광객들은 짐을 풀고 관광지를 순례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우리 옆 테이블의 프랑스 샌드위치 아저씨는 나를 보자 맥주를 사주셨다. 코가 빨갛게 될 때까지 드시는 듯했다.


혼자 걷는 순례자

산티아고에서 혼자 걷는 사람들의 특징은 무리에 속해 걷는 걸 좋아하지 않는 성향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신기하게도 그런 사람들만 뽑은 것도 아닌데 야외 테라스 자리를 둘러보고는 조용히 여기 앉아도 되는지 물어보고 함께 자리가 채워졌다.


완전 초입에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에서 같은 숙소를 썼던 캐나다 순례자가 혼자 30cm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 걸 봤다.


회색빛 머리카락과 희끗희끗한 수염, 붉게 익은 피부, 확실히 중반부 아저씨 얼굴도 제법 순례자 티가 얼굴에 드러나 있다. 키가 190이나 하는 거구였는데 맨날 알베르게 벙커침대에서 웅크려 자려고 하니 너무 힘들어서 오늘은 1인실을 예약했다며 들떠 있었다.

나는 여독이 풀리지 않았는지 점심 식사 후 피로가 빨리 몰려왔다.


몽지아가 하루 더 쉬었다 가라는 충고가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수잔과 앉아서 지나가는 순례자들의 국적 맞추기 놀이를 하며 시간을 때웠다.

수잔은 북유럽 사람들과 독일 사람을 구별할 수 있다고 했다. 나 역시 아시안 중 한중일은 대강 분간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죄다 한국인이어서 여기서 내 재능을 뽐낼 수가 없었다.


 숙소 근처 혼자 식사를 하시는 한국인 순례자가 보였는데, 단체객인지 혼자 오신 건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혼자 걷는 순례자들 대부분은 이쯤 되면 모든 물건이 낡기 시작했고, 어중간한 머리 길이와 수염상태, 살의 그을림 정도가 그분이 혼자 걷는 순례자가 확실히 말해준다.


일찍 도착한 만큼 올라가 나도 한숨 자야 할 것 같다.


Buen Cam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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