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돌아와 격은 일상 간극
산티아고 블루(Santiago Blue)란?
산티아고 순례길(Camino de Santiago)을 완주한 순례자들이 일상으로 복귀한 후 느끼는
우울감, 공허함, 상실감, 무기력증과 같은 복합적인 감정을 일컫는 말이다.
일종의 '순례길 후유증' 또는 '여행 후 우울증(Post-travel depression)'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감정은 순례길에서의 경험이 매우 강렬하고 의미 있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오늘은 내가 산티아고 프랑스 길에 올랐던 지 꼭 2년 하고 6일이 되는 날이다.
그때 팜플로나에 도착했었고, 그날 처음 만났던 캐나다 순례자 캐티에게서 오늘 연락이 왔다.
이렇게 시간이 흘렀다니, 새삼 놀랍다.
모두가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 새로운 길을 걷고 있는 지금, 나는 작년 3월부터 매주 순례길 이야기를 써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이 된 것이다.
인생이라는 길에서, 카미노에서 만난 순례자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두려움 없이 새로운 길을 한 발씩 내딛고 있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갈리시아 지방의 산에도 눈이 내렸다지.
악천후 속에서도 누군가는 여전히 길을 걷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
저녁 비행기를 타고 집에 들어오며 ‘이제 일상의 틈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새벽 4시, 5시가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이유도 모른 채 기침을 멈추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새웠는데,
사람들은 그걸 시차 적응을 못해서 그렇다고 했다.
잠들지 못한 밤 내내, 나는 카미노 길을 함께 걸었던 순례자 친구들과 왓츠앱으로 채팅을 나눴다.
감기 때문에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 채 한 달을 보내는 동안,
나는 유럽도 한국도 아닌, 마치 우주 환승 정거장에서 정처 없이 떠도는 사람 같았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대기하는 기분이었다.
침대에 누운 채 카미노에서 가져온 나무 지팡이를 만지작거렸다.
모두가 완주를 마치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 일상을 살아가는 듯 보였다.
나만 빼고...
내 정신은 아직 카미노에 머물러 있고, 몸은 그 정신을 따라오지 못한 듯했다.
길 위에서도 그랬다.
도시로 돌아온 지금도, 내 몸은 늘 정신보다 한 박자 느리게 받아들이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것도 아주 보수적이고 조심스럽게.
순례길을 걸으며 ‘앞으로는 무엇이든 대담하게 하겠다’고 다짐했지만,
현실에서 부딪힌 건 감기였다.
그 난관은 나를 억지로라도 눕히고, 쉬게 만들려는 듯했다.
감기가 심하게 걸렸던 탓에 병원에서 독감과 코로나 검사를 받았다.
코감기가 심해져 결국 축농증으로 번졌고, 늘 그렇듯 기침이 심해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유럽에서 걸려온 감기라 그런지 약도 잘 듣지 않는 듯했다.
몇몇 병원을 옮겨 다니며 처방전을 받았는데,
한 의사는 내 증상을 듣자 지나치게 강한 항생제와 감기약을 내줬다.
그 덕에 없던 배탈까지 얻게 되었다.
꼼짝없이 방에 틀어박혀 잠만 자는 게 답이었다.
유난히 2023년 12월은 춥고 눈이 많이 내렸다.
창가에 앉아 바라본 눈 풍경은, 카미노 갈리시아 지방에 내렸다는 눈 소식과 겹쳐 보였다.
과거에 무슨 일을 겪고, 어떤 일을 당해 트라우마를 극복했든,
내가 깨달은 것은 바로
**“지금의 나”**였다.
나는 얼마나 나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며 집중해 주었을까?
카미노에서 나는 어쩌면 살면서 처음으로 나 자신에게 오롯이 집중하며 걸었던 시간이었다.
한국에 돌아오면 직업의 귀천을 따지지 않고, 다양한 시도와 도전을 해보겠다고 다짐했다.
우리는 원하는 조건의 이상이 보이고 그것을 못할 것 같을 때
다음 생에서는 꼭 그것을 하겠다는 말을 내뱉곤 한다.
나는 한국에 돌아와 내 인생이 한 권의 책이라면
집필하지 않은 하얗게 빈페이지로 느껴졌다.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비우고 한국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것을 내가 원했으니까.
수련을 하는 사람들이 산에 들어가는 이유를 아는가?
마음을 비우고 나 자신을 명확하게 바라보며 깨닫기 위해서였다.
나는 내 안의 괴로움과 슬픔을 비워내기 위해 했던 행동이
산에 들어가 수련을 했다고 말하는 게 맞는 행위를 하고 돌아온 것이 된 것이었다.
나는 살면서 그렇게 내 내면이 깨끗하고 맑았던 적이 없다고 느낄 정도니까 말이다.
기계로 치면 바로 백업돼서 아무것도 세팅되지 않은 상태였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해나가는가는 나의 의지에 달렸다.
오랜만에 타는 지하철에 앉아 있으니, 늘 보아오던 일상 풍경이 색다르게 느껴졌다.
겨울이라 사람들은 대부분 검은색 옷을 입고, 지하철은 인파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나는 지하철 매너에서도 각 나라의 차이를 떠올렸다.
프랑스 사람들의 “빠동(Pardon)”, 스페인 사람들의 “빼르도나”, 미국 사람들의 “Excuse me”,
일본 사람들의 “쓰미마센” —
모두 자신만의 방식으로 개인의 자리를 존중하고 배려를 표현하는 말이었다.
예전에는 “죄송합니다. 갈게요.”라는 말을 듣곤 했는데,
요즘은 핸드폰에 집중한 채 앞을 보지 못하는 시민이 나와 부딪혀도,
미안하다는 말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 문화가 그렇게 소통의 부재가 느껴지게 변화돼 있었던 걸
나는 해외살이 3개월을 마치고
큰 간극으로 느끼게 되었다.
꿈속, 어딘지 모를 유럽의 거리였다.
그 길 위에 짐을 짊어진 채 헤매는 한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가 나인지, 아니면 나 아닌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처음 보는 그 길을 다시 걸어야 한다고 중얼거렸다.
마치 남자들이 매번 군대로 돌아가는 꿈을 꾸는 것처럼.
하지만 그 길은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곳이 아니었다.
그리움이 나를 매일 그곳으로 데리고 가는 듯했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 나는 문득 한국의 성당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한국의 가톨릭을 전파한 김대건 신부님에 대한 이야기나
이시돌 목장에 있는 제주 올레길의 순례길을 알게 되면서,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머나먼 땅을 걸어온 나는 나의 터전에 와서야 비로소
내가 살던 땅의 역사에 하나씩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밟으며 다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 그리고 극심한 불안에 사로잡혀 있을 때 나를 붙잡아준 것은 묵주 팔찌였다.
아무 종교가 없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의 안정을 주는 그런 물건이 있지 않은가?
나에게는 그것이 묵주 팔찌였다.
순례길에서 샀던 묵주 팔찌의 매듭이 느슨하게 풀리는 것을 느끼고,
명동성당에 가서 새 팔찌를 사다가 순례자 펜던트를 달았다.
그 팔찌를 끼고 있으면 왠지 모를 안정감이 들어,
나만의 드림캐처처럼 늘 착용하고 다녔다.
한국에 돌아와서 가장 하고 싶었던 것 중 하나가 내 방 정리였다.
방도 작은데 물건들로 가득 차서 생각만 해도 지치는 상태, 말 그대로 포화 상태였다.
걷는 내내 내 방을 상상하며 무엇을 버릴지 생각했다.
생각 속에서도 내 방이 꽉 차 있는 물건들이 나를 누르는 듯했다.
산티아고 출발 전 준비만큼이나 돌아와서 내 방 정리는 가장 큰 다짐 중 하나였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급하게 샀었던 콜롬비아 등산화가 당근으로 팔렸다.
탄력을 받아 하나씩 신지 않고 쓰지 않으면서 아까워서 방치해 둔 채 방에 있거나
신발장에 있던 물건들을 팔거나 바로 퇴출시켰다.
순례길 내내 나와 함께 걸었던 보라색 호카 신발이 떠올랐다.
아무리 비싼 신발도 아깝고 귀해서 오래 두고 싶어도, 떠날 때가 되면 보내주어야 한다.
기력이 점점 돌아오고 내가 해야 할 일 목록에 휴대폰 도난 보험 청구가 있었다.
나는 마이뱅크 여행자 단기 보험을 신청해서 다녀왔는데,
저렴한 보험을 들었던 게 후회가 되었다.
하지만 그거라도 들어서 일부라도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게 어디인가?
프랑스 경찰서에서 받은 조서 파일과 유럽에서 로밍폰을 사용하지 않고 유럽 유심을 사용한 자초지종을 보험사 안내원에게 설명했더니, 그런 특이사항을 비고 신청란에 적어주면 된다고 "친절히" 안내해 준다.
이런 전산 처리는 우리나라가 진짜 단연 최고인 것 같다.
나는 경찰서에서 받은 서류들과 보험 청구 서류를 보내자마자
바로 핸드폰 보상금이 통장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며 감탄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사함이 올라왔다.
산전수전을 다 겪다 보니 이제 이런 서류 제출은 일도 아니게 되어버렸다.
당근으로 예전 도난당했던 폰도 중고로 샀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감기가 걸렸던 기간 동안 누워서 매일 어떤 매물이 올라오는지 지켜보며 때를 기다렸다.
한국에서의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며 새로운 핸드폰도 맞아들였다.
매일 매물을 보다 보니 글 쓴 사람들의 성향이 보였다.
꼼꼼한 사람의 상세한 설명이나 급하게 처분하려는 사람의 간략한 글 등이 눈에 들어왔다.
적당한 가격의 매물이 올라오길 기다리다가, 직접 물건을 확인하고 거래를 마쳤다.
돌아와서 한국과 순례길이 위치한 물리적 거리만큼
내 정신과 영혼의 연결점을 잃는 것을 막는 구실은 글이었다.
몸이 점점 회복해 갈 때쯤 나는 일기장을 폈다.
하루하루 내가 느낀 감정들과 순례길을 걷기를 준비하면서
출발해서 완주하기까지의 이야기들을, 구글지도에 체크해 둔 기록과
인스타 스토리 보관함에 있던 자료들을 뒤지며 기억을 더듬으며 글로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아빠가 돌아가시고 장례식을 치르던 날 그런 얘길 했었다.
"어디에도 뿌리내리고 싶지 않다."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의 반영이었을 것이다.
순례길을 걷고 내가 깨달은 바는 이것이었다.
어느 나라이건, 어떤 누군가를 만나건 그 뿌리는 내 마음에 내려야 한다는 것을.
한국에 돌아와 감기를 앓고, 그동안 못했던 정리를 하면서
일상으로 하나둘씩 돌아가며 나도 간극을 줄이며 한국에 착륙해가고 있었다.
컨디션 난조와 스케줄이 맞지 않아 제주도 한라산행을 2023년에 하지 못했지만,
몸 컨디션이 돌아오면 2024년을 시작하며 한라산을 오를 계획이다.
인생이라는 카미노에서 어떤 일을 겪게 될지 알 수 없지만,
한 발씩 내디디며 일상을 살아가보려고 한다.
여전히 순례길의 추억과 마음을 열고 받아주던 순례자들이 그립지만,
내 삶을 살아가다가 꼭 두 번째, 세 번째 순례길을 걸을 것이다.
Buen Cami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