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에 아기와 단둘이 남겨졌다, 아직 학기 중인데.
남편도 휴가를 내고 와서 친정엄마를 모시고 함께 귀국했다. 서운해하지 않고 쿨하게 보내드리리라 다짐했다. 출산도 내 선택이었고, 유학도 내 선택이었으니, 육아 도움을 더 받을 수 없는 환경이 아쉽긴 해도 내가 헤쳐나가야 할 문제니까. 공항에서 배웅하고 돌아서는데 단단히 붙잡았던 마음의 끈이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타향살이하는데 심리적으로 엄마를 많이 의지하고 있었구나. 이제 정말 아기와 둘이 남았다.
그러나 아기는 허전함에 젖어있을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상황 파악 못한 꾸러기의 잠투정이 시작되었고, 그 말은 곧, 유모차에 앉아있길 거부하며 장소에 상관없이 울어재낀다는 뜻이었다. 난 아직 집에 도착 못했는데, 어떻게든 달래야 했다. 아, 근데 얘를 뭘로 달래야 울음을 그치던가? 눈앞이 하얘지며 하염없이 유모차 밀고 제자리를 맴돌기만 하는 나는 영락없는 초보 엄마였다.
남편과 엄마가 한꺼번에 가버리면 허전할 거라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빈자리가 훨씬 컸다. 다 같이 지낼 땐 좁게 느껴지던 집이 왜 이렇게 큰지, 아기는 왜 이렇게 작고 내가 해줘야 할 일들은 어쩜 이리 많은지.
아기는 할머니가 생각날 때마다 말도 못 하고 얼굴을 찡그리며 울었다. 할머니가 어디에 있는지 두리번거리며 찾았다. 그런 아기를 끌어안고 나도 같이 울었다.
"엄마도 할머니랑 아빠가 보고 싶어, 이제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엉엉)"
엄마가 더 크게 우는 모습이 이상했는지 아기는 울음을 그치고 묘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그래도 한번 터진 내 울음은 그칠줄 몰랐다.
낮잠을 자고 일어난 아기는 침실까지 기어가 침대를 붙잡고 일어서서 할머니가 있는지 확인했다. 침대 위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아차리자 매트리스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백일 이후로 한 번도 할머니랑 떨어져 본 적 없는 이 작은 아기가 갑작스러운 변화를 알아차리고 인생 최대의 상실감을 겪어내고 있는 모습이 너무 안쓰럽고 미안해서, 나도 마음이 허전하고 막막해서, 상황을 이지경까지 만든 내가 너무 한심하고 미워서 목놓아 울었다.
할머니와 떨어진 지 이틀째 되던 날, 아기는 열이 올랐다. 그런데 나는 그게 열인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이상하네, 왜 이렇게 얼굴이 뜨끈하지." 하며 아기의 이마와 볼을 내 손으로 식히고 밤새 팔다리를 주물러 줄 뿐이었다.
정규 수업시간 외에도 튜토리얼과 프로젝트 미팅 등이 잡혀 있었지만 내가 꼭 필요하지 않은 자리는 포기했다. 출석체크가 없는 수업이 하나 있어 결석했다. 같은 기숙사에 거주하는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학기말이라 바쁘다는 걸 알기에 부탁하기 미안했지만 그만큼 절박했다. 두 시간씩 쪼개 여러 명에게 부탁하고 남는 시간대는 베이비시터를 소개받아 일정을 짰다. 그러나 아기가 어떻게 적응을 해줄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주 양육자였던 할머니와 이별하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기에게 매일 베이비시터가 바뀌는 (심지어 오전/오후 시터가 다르고, 못 알아듣는 말을 하는 외국인도 있는) 상황은 더욱 패닉을 일으킬 뿐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던 나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다.
수업 시작 15분 전, 친구가 집에 도착했다. 낯선 이를 보자 아기는 내게 더 매달렸다. 장난감에 한 눈 파는 사이에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육아책에는 아기에게 충분히 설명해 주고 바이바이 인사하고 나오라고 했지만 아기 얼굴을 보면 눈물이 쏟아져서 인사도 할 수 없는 게 현실이었다. 자지러지게 우는 아기를 베이비시터에게 떠맡기고 학교에 가는 심정이 착잡했다. 이렇게까지 공부해야 하는 걸까. 아기가 너무 걱정돼서 수업에 집중할 수도 없었다. 수업이 끝나기 10분 전에 빠져나와 집에 달려갔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있던 아기는 나를 보더니 또 울었다. 울음소리에 '엄마, 날 두고 어디 가요, 가지 마요.' 하는 말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아기에게 없던 행동이 생겼다. 초인종 소리만 들려도, 누군가 문을 똑똑 두드려도, 낯선 이가 집에 들어와도 울면서 내게 매달렸다. 할머니와 있을 때는 집에 찾아온 누구와도 금방 친해지고 웃고 인사하는 아이였는데... 아기는 벌써 알아차렸다. 낯선 이가 오면 엄마가 자길 두고 떠난다는 걸. 심지어 내가 서 있는 것조차 싫어했다. 주방에서 일하고 있으면 다리에 매달려서 칭얼거리다 결국 울음을 터트리곤 했다. 잘 놀고 있다가도 문소리만 들리면 화들짝 놀라며 엄마를 찾았다. 알아듣는지 모르겠지만 계속 이야기해 주는 수밖에 없었다. 아가야, 엄마는 학교 갔다 올거야. 널 떠나는 게 아니야. 엄마는 다시 돌아와서 네 옆에 있을거야. 불안해 하지마. 엄마도 너무 걱정하지 않을게. 우리 둘이 잘 지낼 수 있을거야.
스위스에 아기와 단 둘이 남아서 공부하겠다는 무지하고도 용감했던 선택지는 고려하지 않았을 거다. 아기에게도 내게도 너무 힘든 시간이었다. 친정엄마, 남편과 헤어진 아쉬움과 허전함은 일주일이 되자 흐릿해졌다 (아기는 나보다 적응이 빨랐는데, 사흘 만에 웃음을 되찾았다). 그러나 새벽 6시에 일어나는 아기와 세끼 밥(그것도 내 밥과 이유식 따로)을 해 먹고, 중간에 베이비시터에게 아기를 맡기고 수업 다녀오고, 유모차 끌고 나가 장보고, 세탁실 가서 빨래하고, 집 정리하고, 쓰레기 버리고, 아기를 목욕시켜 밤 9시에 재우고 새벽 1시까지 공부해도 할 일을 못 끝내고 무거운 마음으로 잠자리에 드는 일과가 평범한 일상이 되기까지는 시간과 의지, 체력이 아주 많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그 시간은 내게 꼭 필요한 과정이었던 것 같다-라고 합리화를 해본다. 백일 아기와 3개월간 헤어진 후 아기에게 사라진 엄마의 존재감을 회복하고 내 아기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었고, 그동안 뒤처져있던 엄마 레벨을 업그레이드하고, 애 키우며 공부하는 현실이 이렇게 혹독한데 그래도 너 공부할래?라고 나 자신에게 되묻고 내 공부의 목적에 대해 생각해 보는, 행복한 엄마로 성장하기 위해 겪어야만 했던 성장통이 되어준 시간이었다,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