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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작가 Mar 29. 2018

약속없이 찾아온 손님,
넌 누구니?

10개월 아기 엄마의 스위스 유학기 01


이게 아니었다. 

내가 상상한 유학생활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텀블러에 커피 한잔 내려 도서관에 가서 하루 일정을 정리하고, 시간이 되면 수업에 들어가 친구들과 신나게 토론한다. 궁금한 점은 교수님이나 조교에게 따로 질문을 하고, 수업이 끝난 후 카페테리아에 삼삼오오 모여 점심식사를 하고, 도서관에서 조모임이나 에세이 과제를 준비하며 시간을 보낸다. 해가 지면 근처 마트에서 간단히 장을 봐 집에 와서 저녁을 해 먹고, 어두운 방 안 스탠드 켜진 책상 앞에 앉아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다음 날 있을 수업을 준비한다. 배우자가 있다면, 이러한 일상에 각자가 맡은 가사일과 상대를 위해 기꺼이 내어주는 시간 정도나 필요할 거라 생각했다. 

몇 년 전이었다면 가능했을 수도 있을 이야기다. 





밤에 뒤척이고 이불을 걷어차는 아기를 토닥이느라 지난밤 적어도 두어 번은 깼다. 어김없이 아기는 오전 6시 반이 되면 눈을 비비고 우유를 찾는다. 졸린 눈을 간신히 뜨고 분유를 타와 아기 입에 물리는 찰나, 이 아이는 이미 반짝 눈을 떴다.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배부르게 먹여 다시 재우는 걸 포기하고 EBS 홈페이지에 들어가 딩동댕 유치원을 틀어준다. 오전 시간은 왜 이렇게 금방 흘러가는지. 논문 한 페이지도 못 읽고 아이 밥 챙기고, 내 밥 챙겨 먹고, 실컷 놀다가 다시 졸려하는 아기를 재우고, 학교 갈 준비를 하느라 시간을 보냈다. 


수업 시작 시간에 간신히 맞춰 들어가 수업이 끝나면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온다. 하루 종일 집안에 있어 답답해하는 아기를 옷 입히고 간식 챙겨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마트나 공원 한 바퀴 돌고 들어오면 또 식사 준비할 시간. 저녁 먹이고 나도 먹고 치우고 책상 앞에 앉았지만 아이가 가만히 내버려 두질 않는다. 걷지도 못하는 녀석이 의자 다리를 붙잡고 아슬아슬하게 일어선다. 알아서 혼자 놀거라 기대한 내가 어리석었지. (아이의 에너지를 소진시켜 빨리 재우기 위해) 욕조에 물을 받아 물놀이를 시키고, 피곤한데도 기를 쓰고 깨어 놀고 싶어 하는 아기를 겨우 달래 재운다. 그러고 나면 오후 9시 반, 나만의 시간이다. 노트북을 켜고 이것저것 확인하다 보면 나도 졸음이 쏟아진다. 

대체 공부는 언제 한단 말인가. 읽어야 할 리딩과 과제가 쌓이는 만큼 마음도 무거워진다. 




2년 전 가을, 국내 석사과정 마지막 학기, 졸업 논문을 쓰며 유학을 준비하던 중 약속도 없이 손님이 찾아왔다. 산부인과에서 임신 테스트기에 두 줄이 뜬 걸 확인하고 신랑에게 얘기하니, 수화기 너머로 "하-" 하는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결혼 전부터 신랑과 유학을 꿈꿨는데, 새로운 레이스의 출발선이 손만 뻗으면 닿을듯한데, 아기라니 이게 당최 무슨!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스쳤다. 결혼 3년 차, 말씀은 안 하셨지만 은근히 손주를 위해 기도하고 계셨던 시부모님, 사돈댁 뵙기 부끄럽다며 당장 피임을 그만두라는 엄마. 피임을 멈춘다고 바로 아기 생기는 게 아니라고? 생물학을 전공했다는 사람이 과학적 근거도 없는 그 소릴 믿었다니! 이렇게 금방 아기가 들어설 줄 알았다면 더 있다 가질걸.. 나의 커리어와 공부는 이제 끝이야... 애 키우다 경력 단절되고 나중에는 일하고 싶어도 비정규 파트타임 말고는 나를 써준다는 회사가 없을 거야... 


나보다 멘탈이 강한 신랑은 머리카락 끝까지 비관적으로 변한 나를 애써 다독였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래도 한번 해보는 데까진 해보자. 아기가 생겼다고 준비하던 걸 모두 포기할 수는 없잖아. 임신해도 논문 쓰고 대학원 지원하는 건 할 수 있어. 나중에 아기한테 '너 때문에 엄마는 꿈을 포기했어.'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니. 그리고 어드미션 결과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거고..."


하지만 그땐 그도 몰랐을 거다. 

내가 유학하겠다고 진짜 떠날 줄은.





공부하고 애 보느라 바빠도 꼭 매주 한 편씩 올리려고 해요.
#유학 #육아 #해외생활에 관심 있는 분들은 댓글로, 구독으로 응원해주세요. ^^
현실은 떡진 머리에 목 늘어난 티셔츠여도, 꿈꾸는 엄마는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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