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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졔이 Aug 17. 2023

돌아서 간다

2020년 6월의 글

어떤 길에 관해 얘기하고 싶다. 


요즘 천안에서 출발해 집으로 오는 길에 자꾸만 에버랜드를 간다. 내비가 멀쩡히 길을 안내해주는데도 몇 번이고 같은 짓거리를 반복하고 있다. 


먼저 경부고속도로를 탄다. 한참 올라오다가, 신갈인터체인지에서 인천 방향 영동선으로 갈아타야 한다. 거기서부터 집까지는 10분 안팎인데 자꾸 인천이 아니라 원주 방향을 택하는 거다. 


처음에는 지시선 색깔 때문이었다. 인천 방향은 칙칙한 옥상도료색이다. 원주 방향은 밝은 분홍색이고. 무심결에 분홍색이 더 예쁘니까 맞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합리적인 판단은 아니었다. 


내비게이션 화면이 고장 난 것처럼 팽글팽글 돌았다. 길안내를 다시 시작하겠다고 했다. 톨게이트를 빠져나올 때 휘황찬란한 파스텔 톤의 에버랜드 간판을 봤다. 와아, 에버랜드다, 하면서 마냥 웃었다. 이런 일이 다 있네, 좋아하는 색깔 때문에 길을 잃다니.


두 번째엔 음, 우리 집은 인천이 아니고 수원이니까 원주 방향이 맞겠지, 라고 생각했다. 그게 왜 그렇게 된 건지는 나도 모른다. 인천이 아니니까 원주였고 에버랜드 간판을 만났다. 조금 비참했다. 


다음엔 실수에서 교훈을 찾으려고 하다가 망했다. 인천 방향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원주 방향을 택했다는 것까지는 기억해냈는데, 그게 옳았던 것 같다고 추측하는 바람에 세 번째로 에버랜드 간판을 봤다. 갓길에 차를 댔다. 핸들을 붙잡고 대체 뭐가 문제인가 한참 고민했다. 내비의 지시를 따랐으면 됐을 일 아닌가. 이렇게까지… 멍청할 일인가.


네 번째에는 인천 방향이야! 인천 방향이 맞아! 인천으로 가야된다! 라고 외치면서 실제로는 원주 방향으로 갔고 휴대전화에 삼재를 검색했다. 




한국에서 모든 용기와 기력과 가산을 탕진하고, 호주로 도망쳤을 때의 일이다. 한인 여행사에서 발권 업무를 맡아볼 즈음이었거나 일급을 받으며 페인트칠을 하러다닐 무렵이었는데, 만일 농장을 간다면 딸기냐 주키니냐를 고민하던 것만 기억에 선명하다.


시발. 그때 주키니를 골랐어야 했는데.


아무튼 그날은 별다른 이유도 없이, 하루 종일 속이 답답하고 심장 부근이 묵직했다. 사람이 없는 곳에 가서 고함을 지르고 싶었다. 한적한 곳이 나올 때까지 무작정 걸었다. 걷고 또 걸어도 사람이 없는 곳이 없었다. 아직도 서양 나라에 여행을 가면 도대체 이해를 할 수가 없는 게, 거기 사람들은 왜 그렇게 야외를 좋아하나. 왜 멀쩡한 의자를 두고 잔디밭에 너부러지는 쪽을 택하나. 그거 아세요, 땅바닥에는 쥐가 알을 낳는다구요.


분이 풀릴 때까지 실컷 걸었다. 걷는 사이에 해가 졌고 어느덧 길을 잃었다. 집까지 돌아가기 위해선 구글맵이 필요했다. 그제야 프리페이드 유심칩의 데이터 사용량을 전부 소진한 걸 알았다. 유심을 사려면 울워스에 가야하는데 나는 숙소에서 출발해서 울워스에 가는 길만 알고 다른 곳에서부터 울워스까지 가는 길은 모르고 애초에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내가 할 수 있는 영어라고는 may I?(손짓)뿐이었다. 아니 물론, can I?(손짓)이랑 땡큐, 쏘리 정도는 용기를 내면 할 수가 있겠지만.


어쨌든 길에서 밤을 새울 수는 없으니까 기억에 의존해서 왔던 길을 되짚었다. 심즈4에 나오는 것 같은, 주택이 다닥다닥한 대로변을 거슬러 갔다. 이쪽이냐 저쪽이냐 헷갈리는 순간엔 무조건 강한 확신이 드는 길의 반대편을 택했다. 왜냐하면 나는 길을 찾는 데 정말 심각할 정도로 소질이 없으니까. 저기다 싶으면 무조건 아닐 거니까.


이건 자신과의 싸움이다. 이런 식으로 길을 찾아야만 할 때는 불안하고 싸워서 이기는 게 중요하다. 마음이 진심으로 저기라고, 저기로 가야지 나의 그리운 숙소가 나온다! 이렇게 외치기 때문이다. 그걸 배반하는 결정을 내리는 건 정말이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예외는 없다. 무조건 반대편을 골라야 한다.


길을 가다가 말고 몇 번씩 멈춰서 담배를 피우고 그중에 또 몇 번은 엄마가 보고 싶어서 조금 울기도 했는데… 어찌되었건 이 방법이 먹혔다. 무사히 도착해서 울워스에도 다녀왔다. 계산대에서 유심칩을 결제할 때는 스스로가 너무나 자랑스럽고 뿌듯한 나머지 해버나이스데이!라고 외쳤고 계산원은, 한국인이었는데, 땡큐?라고 답했다. 


사람은 의아한 얼굴로도 웃을 수가 있다.




그날 이후 길을 잘 찾는 사람을 만나면 꼭 노하우를 물었다. 십중팔구는 울워스에서 만난 계산원 같은 표정을 짓는다. 원래 천재는 자기가 뭘 하는지 모르고 그냥 하니까. 이들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서 있는 자리를 중심으로 대강의 지도가 그려진다는 거다. 여기에 뭐가 있고 저기에 뭐가 있으니까 이리로 가면 뭐가 나온다고. 나는 그걸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다. 어째서 머릿속에 지도를 넣고 다니는 거야?


그런 이유로 나는 아직 길을 잃는다. 여전히 에버랜드에 간다. 사람이 뭘 어떻게 해보려고 해도 안 되는 부분이라는 게 있는 거니까. 다행히 한국말은 곧잘 하는 편이다. 여기서는 데이터 사용량을 초과했다는 쪼잔한 이유로 휴대전화가 먹통이 될 일도 없고. 


그러니까… 어차피 삼재고 나발이고 인생이 항상 이런 식이다. 주키니를 갔어야 하는데 딸기로 간 것처럼. 여기냐 저기냐가 고민될 때 아무래도 아닌 것 같은 길을 택해야 집이 나왔던 것처럼. 그때마다 불안을 잠재워야 했던 것처럼. 분홍색이 좋은데 옥상도료색을 골라야 하는 것처럼. 맨날 그런 식.


분홍색 길은 기어이 천안에서 집에 가는 정식 루트가 됐다. 내비가 혼란스러워하든지 말든지 나는 좋아하는 색깔을 따라서 가고 에버랜드 간판을 본다. 어차피 길이 들어버려서 무슨 수를 써도 관성을 이길 수가 없고, 모든 것은 자연스럽다. 


이제 나는 에버랜드 간판에서부터 집까지 가는 길을 안다. 그 길을 아예 외워버렸다는 걸 깨달았을 때 아주 참담했고, 조금 통쾌했다. 크게 웃었다. 꼭 누구를 속여서 원하는 무엇을 얻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도 집에 잘 왔으니까 됐어, 라고 말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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