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책감의 쓸모
최근 ‘고래와 나’라는 다큐멘터리를 봤다.
화면 속에서 고래는 바다를 가르며 움직였다.
몇 톤이 넘는 거대한 몸집이 물살을 밀어내며 활주 하는 장면은 압도적이었다.
그 거대한 덩치와는 달리 고래는 온순하고 평화로운 존재처럼 보였다.
바다를 헤엄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묘한 평온함이 찾아왔다.
마치 강제로 명상에 잠기는 것처럼 마음이 가라앉았다.
직접 바다에 들어간 것도 아닌데
화면 속 바다만으로도 마음이 잔잔해졌다.
사람들이 최고의 휴양지로 꼽는 모리셔스라는 섬이 있다.
그곳에 가 보고 싶어졌다.
아름다운 해안과 자연을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 바다에서 살아가는 고래를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는 갈망이 생겼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는
아름다운 장면만 보여주지 않았다.
플라스틱을 삼켜 죽어가는 고래,
그물에 걸려 상처 입은 채 발견되는 고래들이 나왔다.
해양 생태계는 오염되고
버려진 쓰레기와 인간의 무자비한 활동 속에서
수많은 고래들이 죽어갔다.
지구 온난화로 북극의 얼음이 녹으면서
북극곰이 남쪽 바다까지 내려와
고래를 사냥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까지 이어졌다.
내가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그 아름다운 고래가
언젠가는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타까웠다.
그리고 이렇게 만든 사람들이
미워졌다.
그 안에는
나도 있었다.
나는 일회용품을 쓰고
비닐을 사용하고
택배 상자를 쌓아 두며 살아간다.
고기를 먹고, 생선을 먹고, 초밥을 먹는다.
나는 정말
그들의 아픔을 아파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마음이 불편해지는 장면을 잠깐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리고 있는 걸까.
그래도 나는
작은 실천을 하려고 한다.
텀블러를 사용하고
비닐봉지를 거부하고
가능하면 배달 대신 가서 먹고
분리수거를 성실히 한다.
이런 행동이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될까
회의가 들 때도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환경 보호 성명서에 서명하고
가끔 집회에 참여하는 정도다.
나 같은 소시민이 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가 전부일까.
그래도 나는
이 작은 실천과 죄책감이
의미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큰 변화는
거대한 영웅의 결단이 아니라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독재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시민들의 기억이
사람들을 거리로 나오게 했다.
이번 12월 3일 계엄 사태를 막아낸 것도 결국 시민들이었다.
그날 밤 국회 앞에 모여
군인들과 맞서 서 있었던 사람들,
그리고 그 이후에도
매일 광장으로 나와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 덕분이었다.
세상을 지키는 힘은
거창한 선언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잊지 않는 마음,
그리고 필요할 때
기꺼이 움직일 수 있는 마음.
하지만 나는 여전히
좋은 것만 보고 싶을 때가 많다.
아름다운 것,
평온한 것,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것들.
자살 유가족 자조 모임이 필요하다 생각하면서도
자주 참여하지 못한다.
타인의 아픔을 마주하는 일이
때로는 버겁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상실과
누군가의 억울한 죽음,
폭력과 잔인함을 듣고 있으면
마치 그 아픔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종종 피한다.
그 현실을 바라보기가
너무 힘들고 불편해서.
그럴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래도 되는 걸까.
행복하고 아름다운 것만 찾아다니며
정작 바라봐야 할 아픔 앞에서는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도 나는 인정한다.
나는 세상의 모든 아픔을
다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모든 고통을 공감할 수도 없고
모든 비극을 다 알아갈 수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가진 아픔에서 시작하는 일.
그래서 나는
자살 유가족을 위한 작은 걸음을 걷는다.
아주 작은 일일지라도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이 슬픈 세상을
조금이라도 덜 슬프게 만드는
하나의 방법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