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도 못하고, 할 말은 해야겠어서
회사에서 SI를 하기로 한 이상 기술직인 나는 외부 '고객'과 직접 대면해야 하는 일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생기곤 한다. 1차, 2차까지 고객응대를 위한 CS가 준비되어 있다고 해도 고객이 큰돈을 가져다주면 가져다줄수록 최종 마지노선을 쉽게 내주기 마련이다.
일단 '고객'이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그들은 항상 갑이다. 언어라는 도구를 사용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논의를 주고받는 사람도 존재하지만 의외로 사람들은 냉정하다. 그리고 그 냉정이 힘든 이유는 무지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이성적이고 논리적이어야만... 이해가 되어야만 무언가를 기꺼이 할 수 있는 나라는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고문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무리 일하기 좋은 환경 아래에서 남들보다 편하게 일하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내가 회사생활을 오래 하지 못하겠다고 느낀다.
이번에도 어김없는 결과로 이어졌다. 사실 회사 내부적인 화상회의인 줄 알았지만 영업 쪽에서 고객을 대동한 채로 회의를 진행했고, 고객은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고 있었다. 당연히 우리는 해줘도 안되고 일반적으로는 해주면 안 되는 요구였다. 그들이 해달라는 확실한 보장은 사실 우리가 판매하는 제품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것의 동작을 보장해준다는 것은 당연히 해줘야 할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요청에 의해서 논의를 통한 뒤에 결정해야 할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할 말을 하고 있었다. 내 입장에서 해야 할 말을 하고 있었고 고객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아무도 그 사이에 끼어들어 대답하지 못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고객의 요구가 항상 터무니없고 고압적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감당하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사실 결정적인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과 싸워서 쟁취할 수 있는 자유가 없었기 때문에 목전까지 튀어나온 말들을 목 구녕에 구겨 넣듯 억지로 밀어 넣었다. 결국 내 말 한마디가 불러일으킬 파장은 나 혼자 감수해도 되는 것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참고 또 참아야만 했다. 어쨌든 애매하게 상황은 마무리되었다.(이런 상황을 겪어보면 영업에서 일하는 방식은 항상 마음에 들지 않지만 고객의 뒤틀린 감정을 1차로 받는 존재라고 생각해보니 참 존경스럽다.)
중요한 건 이후의 감정 처리였다. 그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견디는 것도 힘들었지만 주변의 상황들 때문에 하고자 했던 말을 하지 못했다는 게 더 화가 나고 열이 받았다. 한 시간 내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당장 찾아가서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의 감정이 되자 그 감정은 다양한 곳으로 발산한다. 영업에 대한 원망, 그냥 단순히 나에게 오는 문의나 남들의 실수가 증오스러워진다. 결국 당일에 휴가를 썼다. 일을 더 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일을 하면서 느끼는 것지만 모든 직장에서의 일은 내가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기술로 돈을 벌어먹는 게 아니다. 결국은 상대방이 토해내는 감정의 토악질을 내가 얼마나 감당할 수 있느냐의 싸움이다. 그래서 같이 일하는 사람이 얼마나 젠틀한지에 따라 내 회사생활의 존폐 여부가 결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반대로 남 생각 안 하며 철판 깔고 남의 감정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이 남들에게 쉽게 상처를 주며 쉽게 일을 한다. 결국 나는 전자의 사람이었고, 이런 감정노동이 발생할 때마다 너무 힘든데,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 이 그지 같은 성격 때문에 그 감정노동을 더 피하지 못하는 상황이 내 직장생활을 위협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런 고민을 지인들에게 털어놓으면 그런 말을 해주곤 한다. "너도 그러면 갑회사로 가서 갑질 해 갑질 당하는 게 그렇게 힘들면 그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타당한 이유가 아니면 그런 '나 편하자고 남 불편하게 하는 요구'를 하지 못한다. 또한 '내가 책임지지 않으려고 남에게 뒤집어씌우기'도 못한다. 이건 나도 우리를 고객으로 장비를 파는 벤더사와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이다. 그러니까 난 직장인 부류에서는 어느 쪽에도 속하기 힘든 타입인 것이다.
정말 당장이라도 사직서를 내고 싶은 마음이 샘솟는다. 40살에 은퇴하자고 마음먹었는데 이게 당장 내년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 돈 가지고 은퇴할 수 있겠냐 이 말이다. 과연 40까지 버티는 게 먼저일까 스트레스로 병이 생기는 게 먼저일까? 아니면 큰 맘먹고 더 빠른 은퇴를 할 수 있을까? 결국 난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