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의 한창 더운 여름날.
제임스 터렐 전시를 관람했다.
거의 10년 전, 뮤지엄 산에서 본 상설 전시가 기억에 적당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강하게라고 쓸 정도로 기억력이 좋지는 않다) 그곳의 전시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그 전시를 보고 뭔가 말하고 싶던 표정이었던 친구가 기억이 났다. 그래서 친구에게 연락해 좀처럼 내지 않는 평일 반차를 내고, 우리 둘은 이태원으로 향했다.
결과적으로 전시는 기대만큼 멋진 경험을 주진 못했다. 작품의 문제는 아니고 공간의 한계였다고 생각한다. 굳이 미학과 교재에 나오는 단어를 골라 말해보자면, ‘숭고함’을 느끼기엔 갤러리가 너무 비좁았다.
아름답게 장식된 파이프가 위로 쭉 뻗어있는 고풍스러운 파이프오르간. 거기서 흘러나오는 연주가 듣는이의 심금을 울리면서 신을 찾게 만들려면, 어울리는 곳은 노트르담 같은 대성당이어야 할 것이다. 오르간 하나 품는걸로 꽉 차는 소박한 성당에 앉아 연주를 듣는다면? 소리가 공간 대신 그의 귀를 직접 때리겠지. 신은껴들 틈이 없을 것이다. 전시를 열어준 갤러리에게는 너무 고맙다. 그냥, 전시가 나에게는 이와 비슷한 느낌이었단 말이다.
입장할 때 직원은 친절하게 안내해줬다. 정각, 30분에만 입장 가능한 3층의 작품을 먼저 보는게 좋겠다고. 3층 상영실은 입구 동선을 ‘ㄹ’자 형태로 꺾어 철저하게 빛이 따라 들어오지 못하게 되어있었다. 조용한 암흑 공간에서, 일렬로 앉은 열명 정도의 관람객을 바짝 앞두고 커다란 작품이 어둠속에서 홀로 빛을 내고 있었다. 은근히 변하는 빛과 공간의 착시가 암흑과 대비되어 … 눈이 아팠다.
옆자리에 앉은 혼자 오신 어르신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간혹가다 부채를 펄럭이는 여성분은 지금 1층의 시원한 카페가 더 생각날 것 같은데? 나는 예술을 감상할 그릇이 안되는 것 같아-이런 잡생각만 하고 있으니, 그런데 내 친구는 지금 눈을 감고 있네?
온갖 생각이 한 바탕 지나갔다. 그 사이 내 앞의 작품은 묵묵히 작동중이었다. 어쩔 수 없이 더 앉아있자니, 무념무상의 상태로 조금씩 빠져들 것 같았다. 그게 작가의 의도였는지도 모르겠다.
바로 그 때였다.
사각사각, 사각, 사각사각.
입구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아까 우리를 어둠 속에서 자리로 안내해주었던 직원이 곧 관람객의 퇴장을 준비하는 듯했다. 인위적으로 철저히 준비한 어둠이 무색하게도 사각사각. 걸을때마다 바지의 안쪽 면이 서로 부딪히며 나는 소리, 사각사각. 가볍기보다는 약간 묵직한 사각사각. 나는 명상 대신, 여름에 입을 법한 시원한 소재가 섞인 그러나 두께는 있는 그의 바지를 남은 시간 내내 상상할 수 밖에 없었다.
어느덧 상영은 끝났고 사각 바지의 주인은 나를 극장 밖으로 인도해주었다. 시계를 보니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15분 밖에 지나지 않았다.
2층으로 내려가 전시를 이어 보았다. 훨씬 작은 규모의 작품이 있었다. 아까처럼 마주앉아도 대하기가 한결 수월했다. 작품이 몇 점 없어서 아쉬운 마음에, 좁은 전시장을 몇번이고 서성였다. 그리고는 전시된 도록을 보았다.
도록에는 세계 곳곳에 설치된 터렐의 작품 사진이 있었다. 미술관에도 있었지만 사막같은, 암석같은 대지에 툭 놓인 작품들도 있었다. 좀 알 것 같았다. 뮤지엄 산에서의 경험이 왜 좋았는지를.
산의 전시에는 작품과 나 사이의 (그 정도면 충분한) 공간이 있다. 그곳에서 작품은 하늘처럼 떠 있었고, 강렬한 태양빛처럼, 부드러운 노을처럼, 새벽녘의 일렁이는 물빛처럼 존재했다. 가만히 거리를 두고 응시하다보면 커다란 자연을 마주한 것 같은 경이로움이 차올랐다. 그래서 그곳에서 오랜 시간, 잡념이 끼어들지 않은채로 작품과 조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필요한 것은 알맞은 거리였다. 좁은 거실에서 80인치 텔레비전 바로 앞에 쪼그리고 앉은것처럼 작품을 보면 터렐이 전하려는 이야기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적당히 한 발 물러서서 보아야, 배우의 모공에
낀 파운데이션때문에 연속극의 흐름을 놓치는 것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회사 일도 같다. 주어진 문제만 해결하려는 사람보다는 한 발 떨어져 맥락부터 집어내는 사람이 더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잘 볼 요량으로 인생의 문제를 핀셋으로 꼬집어 들어다보지만, 그 문제의 안 봐도 되는 면까지 보는 것 외에 별다른 소득은 없다. 바퀴벌레를 집어올려 다리에 난 미세한 털까지 들여다본다고 바퀴벌레가 박멸되는 건 아니니까.
전시를 보고 나오니 말도 못하게 더웠다. 117년만의 폭염이라고 했다. 다음 전시를 위해 줄 서있는 사람들이 넓직넓직하게 떨어져 있었다. 결국 모든 것에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