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의서랍] 방학일지도 모릅니다

by 바스락

(이전글 ’또 하나의 가족‘에 이어)


청바지, 방학, 뛰는 것


이 세 가지는 우리 아빠에게 없는 것입니다. 제가 아빠를 기억하는 최초의 순간부터 지금까지 쭉이요. 아빠는 184cm로, 48년생 치고는 매우 큰 키입니다. 갸름한 달걀형 얼굴도 갖고 있습니다. 호리호리한 체형으로, 아빠가 유학시절 캘리포니아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참 잘생겼다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그 옛날 결혼 생각이 없던 스물아홉 살 엄마가 아빠의 사진을 보고 맞선을 결심한 것이 이해가 됩니다.


나는 아빠가 왜 청바지를 입지 않는지 늘 궁금했습니다. 옛날 사람이지만 청바지의 고장인 미국에서 유학도 했고, 무엇보다 청바지에 딱 맞는 체형을 갖고 있는데 말이죠. 아빠는 늘 양복 아니면 빳빳한 면바지만을 입었습니다. 각 잡힌 옷은 아빠의 곧은 자세와 군더더기 없는 말투와 어우러져 아빠를 대하는 사람도 절로 진중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다고 아빠가 차갑거나 권위주의자였던 것은 아닙니다. 아빠의 옷이나 자세, 사고와 말투는 모두 ‘가르치는 일’이라는 본연의 업무에 충실한 결과였거든요.


아빠는 교수였어요. 늘 8시에 출근하고 8시에 퇴근하셨습니다. 어릴적에는 대학교도 중고등학교처럼 시간표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침 1 교시에 맞춰 출근하고 마지막 수업시간에 맞춰 퇴근하는 줄 알았어요. 아, 그리고 대학교에는 방학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주말을 제외하고 일 년 내내 아빠는 출근했으니까요. 대학생이 되어서야 그게 아니란 걸 알았습니다. 교수를 아빠로 둔 친구들은 방학때 길게 가족 여행도 가고, 안식년에는 아빠의 연구를 따라 해외로 나가더군요. 단지 우리 아빠는 지도하는 학생들을 두고는 절대 안식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던 거죠.


좀처럼 루틴을 벗어나지 않은 아빠였기에 나는 아빠가 뛰는 모습을 기억할 수 없어요. 급하면 그냥 긴 다리로 좀 빨리 걸을 뿐이었죠. 새로운 취미로 러닝을 해보라고 하면 어떨까?라고 엄마에게 물었더니 엄마가 말했죠. “늬 아빠는 평생 뛴 적이 없다.”


15년 전쯤 아빠는 퇴직을 하셨습니다. 이후로 몇 개 있지도 않던 아빠 삶의 요소가 점점 사라지는 것이 보입니다. 퇴직 후 몇 년 유지했던 연구실도 닫고, 제자들이 모두 졸업했습니다. 한 개뿐인 부부동반 모임도 회원님들의 노령화로 인해 주말모임에서 연말모임으로 바뀌었고요. 시력도 청력도 해를 거듭할수록 닳고 있습니다. 오직 시간만이 그대로에요.


아빠는 유튜브로 그 시간을 채웁니다. 하루 종일 아빠 방에서는 유튜브 소리가 들려요. 언더스탠딩, 삼프로에서 시작해 전쟁, 무기 이야기가 주를 이룹니다. 왜 우리 아빠가 유튜브 중독자가 되었나 짜증나고 속상해서 몇 번 심각하게 줄이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심심해서, 할 게 없어서’ 본다는 대답에 아무 말 못하고 그냥 나왔습니다. 저만해도 같은 집에 살면서 아빠랑 길게 이야기를 나눈 것이 벌써 몇 달 전이거든요.


그러다 며칠전, 아빠 책상을 정리하다가 수식이 가득한 A4 용지를 발견했습니다. 솔직히 조금 반가웠어요. 무엇인지 물어보니 케플러의 법칙을 공부한 것이라 했습니다. 이야기가 트인 참에 요즘 관심사를 물어봤어요. 아빠는 인공지능의 트랜스포머 모델이 궁금하다고 하셨어요. 오랜만의 대화라 조금 더 이어가 볼까 싶어 구체적으로 어떤 점…까지만 말했는데, 아빠는 바로 버튼이 눌린 것처럼 컴퓨터 언어부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솔직히, 초등학교 3학년 때 일이 생각났어요. 시시한 질문을 던졌다가, 아빠가 원자와 분자부터 끄집어냈던 적이 있거든요. 초3에게 원자와 분자라니... 아빠에게 다시는 안 물어볼 거라고 씩씩거리며 끝났더랬죠.

그 때와 같은 상황이었지만 오랜만의 대화라 열심히 들었습니다. 그리고 물어봤어요. 트랜스포머 모델이나 인공지능에 대한 것은 (좋아하는) 유튜브를 찾아보면 컨텐츠가 많지 않냐고, 속으로는 유료 강의 컨텐츠를 결제해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요. 그랬더니 아빠는 토론을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일방적으로 보는 것 말고, 마치 옛날에 논문을 두고 제자들과 토론을 했던 것처럼요.


아. 그러니까 확실해졌습니다. 이건 내가 채워줄 수 없는 거였어요. 딸과의 대화나 산책, 다른 취미 개발보다 아빠에게 필요한 건 40년간 몸에 익힌 방식으로 새로운 것을 배우고 확장하는 것이었습니다. 토론은 안되더라도 새로운 지식을 무궁무진하게 퍼주는 유튜브가 아빠 입장으로서는 더 효자일 수 있는 것이고요.


대화를 마치고 다시 유튜브로 돌아가는 아빠를 보며, 문득 나의 방학이 생각났습니다. 하루 종일 만화책과 만화영화를 봤던, 무용했지만 또 유용했던 그 방학이요. 그래요. 어쩌면 지금, 아빠는 생애 처음으로 방학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디 이 방학 끝에는 아빠 인생의 새학기가 기다리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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