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엄마”
큰 아이가 나를 부르며, 괜시리 옆구리로 파고든다. 아. 올 게 왔군. 아직 해가 뜨지도 않은 시간이다. 그러니 내 눈이 떠질 리 만무하다. 비자발적인 새벽 기상으로 시작되는 노예의 아침이 이와 같을까? 이런 하루의 시작은 9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큰 아이는 책을 좋아한다는 점이다. “잘 잤어? 불 켜고 보고싶은 책 보고 있어.” 라고 하면 말 붙이던 것을 멈추고 금새 책에 빠져든다. 비록 아이의 엉덩이가 내 옆구리를 파고들고, 방의 LED 불빛이 머리끝까지 뒤집어 쓴 이불을 뚫고 들어올지라도, 눈감고 누워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그렇게 자는 것도 안자는 것도 아닌 시간이 10분, 운 좋으면 20분 정도 아슬아슬하게 지속된다.
‘신이시여, 제발 이 행복이 조금만 더 지속되길’ - 간절한 마음으로 바스락거리는 이불 자락을 한번 더 끌어올린다. 그러나 신은 대답 대신에 쿵쾅 쿵쾅하는 발소리를 내게 보낸다. 빠르게 다가오는 둘째의 발소리가 방 문 앞에 이르러 멈추었고, 이에 문이 벌컥 열린다. 그곳에는 쩌렁쩌렁한 부르심이 있다.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아… 진짜 이제는 일어날 시간이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며, 사용하지 않는 시간은 영영 소멸되어 버린다.”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 말에 동조하면, 곧이어 소셜미디어와 베스트셀러, 명언들이 내 눈길이 닿는 곳곳에서 연달아 튀어나온다. “당신의 시간을 알차게 사용할 때, 당신의 미래가 달라집니다.’ 라는 말은 1년 전과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대로인 나에게 불편한 마음을 안겨준다. 불편하기만 하고, 변하지는 않는 나를 아는듯 “당신이 누구인지 내면을 들여다보고, 무엇을 추구하는지 깨닫고 더불어 산업 지형까지 읽으면 몇 년 후 성공할 것입니다.”라는 자극적인 메시지가 또 한번 날아온다.
이런 흐름에 자주 노출되다 보면 잠자는 시간 8시간과 회사 월급과 바꾸는 8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8시간 동안은 바쁘게 책도 읽고 동영상 강의도 보고 자격증도 하나쯤 따야 할 것 같다. 꼭 이렇게 숨 가쁘게 살아야만 하나? 싶어서 고개를 돌리면 친절하게도 좀 정적인 ‘명상’ 코스도 준비되어 있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만 해도 나 역시 시간을 부지런히 사용한 사람 중 하나였다. 세상이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내가 팔랑귀여서만은 아니었다. 친구들에게 농담 삼아 “자아 탐구 위원회가 있다면 나야말로는 그곳의 명예 회원”이라고 말할 정도로 나는 내가 궁금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진짜 나는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좋아하는 것을 알기 위해 클라이밍, 다이빙, 스윙 댄스, 캐리커처 그리기 등 생소한 것들을 하나씩 시도하며 내 삶에 더하거나 빼보았다. 궁금하다는 이유로 인연도 없는 대학교의 철학 대학원 수업을 청강했고 프랑스어 원본과 영어, 한국어 번역서를 대조해가면서 진지하게 자아에 대해 공부해 본 적도 있다. 세상은 이토록 흥미로운 것으로 넘쳐났고 나는 나에게 맞는 세상을 탐구하는데 온전히 나의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를 낳은 후, 나를 위한 시간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나를 위한 시간’ 이라니… 그것은 용을 쓰고 울기밖에 못하는 생명체 앞에서 애초에 발을 디딜 수 없는 사치였다. 하루의 대부분이 어이없을 정도로 아무 능력이 없는 생명체를 돌보는데 쓰여졌다. 몇 달에 걸쳐 겨우 손발을 의지대로 움직이고 고개를 제 힘으로 가눌 수 있게 되면 이제 좀 나아지나 싶다. 그러면 그럴 때면 번번히 새로운 미션이 주어졌다.‘빨대로 물을 마시는 법’, ‘변기에 앉는 법’ 또는 ’세수할 때는 눈을 감는 것’ 같은 당연한 것 모두가 실은 배움과 학습의 결과라는 사실에 경악하고 놀라워하며 몇 년을 흘려보냈다.
아이가 유치원 갈 나이가 되면 혼자 할 수 있는 것들이 생긴다. 엄마를 부르지 않고 옷을 꺼내 입고, 책을 더듬거리며 읽는 데시간을 보낸다. 반갑게도 가끔 엄마보다 친구가 우선일 때도 온다. 육체적 미션의 가짓수가 적어지는 이 때가 ‘나를 위해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시기이다. 나 그리고 나와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은 이 때 서로를 다독이며 매일 일기를 쓰고, 한 장이라도 책을 읽으려 애썼다. 그러나 우리는 순진하게도 육체적 미션이 적어지면 정신적 미션의 수가 증가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아이가 조용할 때 책을 좀 읽어보려면 여지없이 으앙- 하는 울음이 터져나온다. 울음의 원인은 다채롭고 단순하다. 유치원에서 나눠준 종이가 없어져서, 색종이를 접으려고 했는데 반듯한 세모로 접히지 않아서, 보리차가 뜨거워서, 강아지 인형을 찾을 수 없어서… 잦아들지 않는 울음은 도저히 어디에도 집중할 수 없게 만든다. 때문에 책을 덥고 우선 아이에게 마음을 가라 앉히는 법을 가르쳐준다. 하지만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결국 대부분은 “울면 형님이 될 수 없어.”’라는 협박 아닌 협박으로 마무리된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 정신이 피폐해지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그 시절 우리들의 의욕적인 노트는 모두 첫 몇 페이지만 채워진 채 끝이 났다. 책도 처음에는 이를 악물고 읽지만 점점 ‘이거 읽어 봤자 뭐하나’ 라는 생각에 다시 한 켠으로 치워진다.
이렇게 잊고 살던 차에 니체의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하루의 3분의 2를 자신을 위해 쓰지 못하는 자는 노예” 라는 말. 니체가 나를 본다면, 의지 박약의 노예 그 자체라며 비난하려나. 현대 사회가 그의 편인 것 같아 약간 움츠러들기도 하지만 왠지 화도 났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 그의 집 앞으로 달려가 문을 쾅쾅 두드리며 외쳤을 것이다. “너는 애를 키워본 적이 없잖아!”
이 항변에는 두 가지 마음이 있다. 하나는 내 사정도 모르면서 막말을 하는 니체에 대한 원망이다. 만일 그에게 이른 아침부터 침대로 파고드는 아이들이 있었다면 니힐리즘 같은 소리는 못했을 것이다. 수면부족이라면 모를까. 지구상에 이해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은 그의 전집도 분명 첫번째 책 몇 장만 쓰고 멈출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매 번 아이들에게 나눠주다 보면 과자 부스러기정도의 자기 시간만 쥐어지는 삶을 당신이 알긴 아나요.
또 하나는 ‘그래, 노예 맞다. 그런데 노예의 삶도 네 사색의 시간만큼 의미있거든?.’이라고 따지고 싶은 마음이다. 니체가 관심이나 가질 지 모르겠지만 내가 나눠주는 조각들을 야금 야금 먹은 아이들이 어느새 훌쩍 커진 걸 알았을 때의 놀라움을 당신이 아느냐고. 아침잠을 깨우며 아이들이 양 옆으로 파고들 때마다 피곤함을 넘어 생기는 묘한 행복감을 느껴본 적이 있냐고 상상속의 나는 문을 두드리며 묻는다. 물론 니체는 냉소적으로 되물을 수 있다. 그 마음이 주인님의 마루바닥을 열심히 닦고 흡족해하는 노예의 마음과 무엇이 다르냐고. 딱히 멋진 반박을 찾지 못해 우물거리며 물러설지라도, 나는 안다. 나의 시간을 먹고 자라는 아이들이 니체의 전집에 비해 가치가 없지는 않다는 사실을.
종종 내가 사회가 부여한 부모로서의 역할에 너무 매몰된 것이 아닌가, 뼛속까지 노예 근성에 물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긴 한다. 하지만 아이는 내 시간을 먹고 자라는 존재라는 걸 지난 몇 년간 또렷하게 봐왔다. 때문에 나의 노예화는 앞으로도 몇 년 간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왕 노예로 사는 동안엔 성실하고 행복한 노예가 되기로 한다. 다만 기상시간이 조금씩 늦춰지길 바라는, 그런 불온한 마음만은 포기하지 못한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