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rite ur mind Nov 25. 2021

'비자살적 자해' 라는 유행.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이 겪는 마음의 병에 관하여.

*

올해 초 상담실에서 만난 K는 중학교를 다니는 남학생이다. 친구들이 단체 채팅창에서 대화를 하다 몇차례, K만 남겨놓고 모두 나가서 새로운 단체 채팅방을 만들고 K를 비난하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고 한다. 당연히 학교 생활에서도 소외되었고 학교에 가는 것을 거부하다 방에서 나오질 않았다고 한다. K의 상태를 염려한 부모님의 의뢰로 K를 어렵게 만나게 되었다. 마스크를 쓰고 앞머리를 길게 늘어뜨려 얼굴과 표정이 잘 보이지 않는 K를 살펴보니 손목에 잔금이 간 붉은 흔적이 있었다. 날카로운 파일 끝으로 피를 낸 자국이라고 했다.  

   

“언제 이랬어...?”

“이틀 전에요.”

“전에도 이런 적 있어?”

“가끔요.”

“파일 말고 다른 도구를 사용한 적은 있니?”

“샤프 끝 같은거... 그런데 파일이 더 쉬워요.”

“죽음을 생각하니?”

“아니요. 전혀. 그냥 긋는건데? 답답할 때 피보면 후련해요.”      


*

고등학생인 S는 화장을 곱게 하는, 누가 봐도 너무 예쁜 여고생이다. 외모에 상당히 신경을 쓰는 S는 불면과 우울이 심각해서 나를 만나 상담을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배, 허벅지 안쪽 등을 가끔 칼로 긋는다고 한다. 완벽한 모범생으로, 우수한 성적을 놓지 못하는 S는 명문대를 가야 엄마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스트레스가 심한데, 엄마의 잔소리가 압박감으로 느껴지는 날이면 방에 들어가 엄마 몰래 자해를 해왔다고 이야기했다.     


***

청소년상담사로 아이들과 만난 지 십여년이 되었다. 최근 몇 년, 마음이 아파서 나를 찾아온 아이들 중 몸에 상처를 내고 흔적을 남기는, 자살 시도가 아닌 자해(비자살적 자해)에 중독된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음을 체험한다.     

'비자살적 자해'는 생명을 위협하지 않는, 단순히 현재의 감정에서 벗어나고 싶거나 감정을 발산하는 방법 중 하나로 시도하는 자해를 말한다. 스트레스 상황이나 불안, 우울의 감정으로 인해 생기는 마음의 압박을 적절히 해소하지 못할 때, 자신의 신체에 흔적을 남기고 피를 보며 마음을 달래고 긴장을 푸는 부정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자해는 음주나 쇼핑, 마약처럼 한번 시작하면 잘 멈추어지지 않는 '중독'의 양상을 띠고 있어서 갈수록 심해지거나 끊지 못하고 반복적으로 이루어진다.


'자해'는 SNS로 소통하고 생활을 공유하는 문화가 청소년의 삶에 깊이 확산이 되며 좀 더 표면화되고 과감해지는 양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실재로 인스타그램은 지난 2019년부터 자해와 관련된 이미지들을 삭제하고 자해 사진에 대한 검색과 해시태그를 모두 금지시켰다. 청소년들 사이에서 자해를 인증하고 과시하는 게시물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내가 만났던, 자해를 하는 친구들은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는 공통된 심리가 마음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에도 서투르고, 만약 표현한다고 하더라도 해결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무기력감에 잠겨 있는 아이들이었다. 자신이 변화시킬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아무것도 없다는 막막한 심정일 때, 유일하게 자신이 컨트롤할 수 있는 자신의 신체에 흔적을 남기고 괴롭히며 쾌감을 느끼는 일에 몰입하게 되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이러한 막막함을 느끼는 이유는 '이해받는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어리고 미숙하다는 이유로 감정이 무시되어왔거나, 아이가 가진 문제가 하찮게 취급되면 아이들은 건강한 정서조절 방법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없이 자라게 된다.

자신의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 수치심이 들거나 스스로가 싫어지는 순간 그 마음을 안전하게 털어놓고 이해받을 수 있는 대상이 없다면, 아이들은 입을 다물고 방에 들어가 혼자만의 세계에 갇히게 된다. 그 어둡고 외로운 세상에서 자신의 감정이 일시적으로라도 위로받는 경험을 자해를 통해 느끼게 되는 것이다.


자해는 심리적 위안을 주는 도구가 될 수도 있지만, 상황에 따라 아이들이 스스로를 체벌하는 행위일 수도 있고, 자신의 마음이 너무 힘들다는 것을 외부에 알리고 도움을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의 자해 문제를 알게 되었을 때, 무조건 야단을 쳐서도 안되고, 별일 아닌 일로 치부해서도 안된다. '자해 행동'을 문제삼기보다는 그 이면에 있는 아이의 마음이 무엇인지 살피고 이야기를 꺼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이들 스스로도 자해가 옳지 못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기 때문에 자해 자체를 함부로 나무라거나 막으려는 시도는 위험하다. 자해는 혼자만의 공간에서 비밀스럽게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자해 행동 자체만을 나무라거나 금지한다고 해서 멈출 수 있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해에 몰입할 수 밖에 없는 아이의 마음과 상황을 충분히 이해해주고, 자해 행동 이외에 자신의 감정을 해소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고 조금씩 실천해나가며 아이의 마음을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

예전의 청소년 문제는 조금 더 격렬하고 과격한 문제들이 많았다. 가출이나 폭력, 또는 자살시도나 ADHD 등... 그런데 최근 몇 년, 상담 현장에서 '비자살적 자해'의 경우나 방에서 나오지 않고 대화 단절, 등교 거부 등을 하는 무기력한 아이들의 사례를 많이 만난다. 예전에도 지금도 학업스트레스와 가정 문제, 교우 관계 등으로 인한 우울과 불안이 청소년 문제의 주요 이슈인 것은 변함이 없다. 그런데 표현 방식이 예전과 다르다. 수동적이고 내면으로 파고드는, 조용하고 음울하게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가 많아짐을 느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의 십대를 키우는 부모는 대부분 자녀교육에 관심이 많고 육아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를 살아온 세대이다. 그만큼 아이들은 학업적인 성취와 재능 발견을 중요시하는 부모의 관심과 지원을 충분히 받으며 부모가 생각하고 계획한 방향으로 키워진 경우가 많다. 그러느라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할 기회,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자유롭게 표출하는 방법을 자율적으로 배우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그런 아이들이 자라 문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감정을 외부로 표현하고 다루는 방법을 몰라 수동적이고 폐쇄적인 방식의 대응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지금, 우리는 2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는 코로나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sns와 메신저로만 소통하고 있는 아이들은 경험의 질이 낮아졌고, 감정과 정서를 공유하고 표현하는 방식이 폐쇄적으로 변할 수 밖에 없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그 속에서 마음이 다치고 아픈 아이들은 소통할 대상도 별로 없고, 이해받을 수 있는 기회 또한 한계가 있다. 아이들이 방에서 스스로를 괴롭히는 방식의 대응을 하는 것을 이해해줄 수 밖에 없는 시대인 것이다.


폭력이나 비행처럼 과격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무기력이나 비자살적 자해와 같은 수동적이고 조용한 마음의 병은 빨리 발견되기도 어렵고 위급한 문제로 취급되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겉으로 표출하지 않는 이러한 마음의 문제가 좀 더 깊고, 심각한 상황을 야기시킬 수 있다. 자해로 '나 마음이 너무 아파요.'라는 싸인을 보내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을 함께 찾아주는 시도를 해야 할 것이다.


***     

모범생이었던 어여쁜 S는 상담치료를 병행하며 병원에 가서 우울감을 조절하는 약물치료를 했다. S의 엄마는 부모 상담을 하며 아이의 성과에만 집중해온 양육방식을 많이 고치려 노력하셨고, 아이가 가진 장점을 적극적으로 칭찬하고 이해하려는 모습을 보이셨다. S는 고양이를 키우며 정서적 위안을 받았고, 스트레스가 많이 쌓이는 날이면 엄마와 함께 집앞을 산책하며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상담이 종결된 몇 달 뒤, S는 대학 합격 소식을 알려왔고 이제 자해는 더 이상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했다.


등교거부를 하며 팔에 붉은 색 흔적을 만들던 K는 아직 상담을 받고 있다. 눈도 통 마주치지 못하고 단답형의 대답만 하던 K는 얼마 전, 자해에 몰두하다 우울감이 바닥을 치는 날이면 죽음을 생각할 때도 있다는 이야기를 꺼내었다. K의 우울은 조금 더 깊어졌기에 너무 염려되고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그 이야기를 내게 꺼내어줄 만큼,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어주어 고맙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건넸다.


아침에 눈을 뜨면 침대에서 일어나고, 밥을 먹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일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일들이 납덩이처럼 무겁기만 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또는 자신의 몸에 흔적을 남기며 위안을 삼는 아이들의 삶이 도처에 있다. 비에 젖은 잎사귀같은 기분으로 학교와 학원에 가고, 시험을 치루고, 집에 들어오면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 방문을 걸어잠그고 유튜브와 틱톡 속의 영상에 위로받으며 혼자만의 세상으로 몰입하는 아이들. 우리는 그 아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먼저 말을 건네고 마음 속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 무겁고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는 십대는 어떤 어른이 될까. 생각이 많아지는 날들이다.     



※ 글에 나온 상담사례는 사실을 기반으로 하되, 내담자의 인적사항과 배경은 수정되었음을 밝힙니다.


이 글은 2021.11.25. 오마이뉴스에 실린 기사의 원문입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47/0002333882


작가의 이전글 나의 아기가 어느새 커서 멜로드라마를 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