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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 ur mind Aug 07. 2019

엄마의 빠른 손.

어릴적 엄마가 콩나물다듬기를 시키면 그게 그렇게나 좀이 쑤시고 귀찮았다. 양푼에 한가득 담겨있는 콩나물의 수는 끝도 없이 왜그렇게 많은지. 산더미처럼 쌓인 이 콩나물을 하나하나 꺼내다보면 언젠가 끝이 나기는 하는건지.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 머리를 파묻고 콩나물을 만지는 작업은 길고 지루했다. 그렇게 절반정도를 하고 나면 답답해진 엄마가 "이그, 언제 다할래!"라며 양푼을 뺏어가시면 그제서야 단순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 신나는 마음이 되어 벌떡 일어나곤 했다. 그 뒤의 나머지 콩나물은 엄마가 다듬어주셨겠지. 엄마가 자주 하는 말, "내가 앓느니 죽지.."라는 말을 중얼거리시면서.


내가 좋아하는 고구마줄거리무침을 해주시는 날에도, 산처럼 쌓인 고구마줄기의 껍질을 벗기는 작업만큼은 너무나 귀찮은 일이었다. 멸치볶음을 하시는 날은 멸치머리를 하나하나 떼고 내장을 떼어내는 작업이 필수. 김장은 또 어떤가. 산처럼 쌓인 무를 채썰고, 산처럼 쌓인 배추를 절이고, 그 산같은 배추 안에 산같이 쌓인 배추속을 하나하나 채워넣는 일이라니.


그래서 '요리잘하는 엄마'의 딸임에도 불구하고 어른이 되어서도 요리가 재미있다든지, 잘하지 못한다. 간단하게 해먹을 수 있는 음식을 좋아하고, 해외에 나가 살면서 그 '간단히 해먹기'와 '적당주의'는 조금 더 심해졌다. 사실 요즘은 편리한 세상이긴 하다. '씻어나온 콩나물'도 팔고, 껍질이 모두 다 제거된 메추리알도 판매한다. 생선도 손질이 깔끔하게 다 되어 냉동포장이 되어 나오고, 냄비에 부어 끓이기만 하면 푸짐한 한상이 차려지는 시대이기도 하다. 그렇다보니 내가 싫어하는 요리의 기초 단계, 단순작업을 하지 않고도 어찌어찌 밥을 해먹고 살 수 있는 시대를 살게 되었다.


1년만에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에 갔다. 손녀가 좋아하는 오징어볶음을 해주신다고 손질해두신 재료를 보니 오징어에 칼집을 총총내어놓으셨다. 저렇게 칼집을 내어야 양념이 사이사이 들어가서 더 맛이있다는 것은 알지만, 가늘게 한줄 한줄 칼집을 내는 과정이 쉬운게 아닌데. 엄마는 또 뚝딱 해놓으셨다. 그것도 매운것과 안매운 것 두 가지 버젼으로 볶아 차려내신다.


김치 냉장고에 김치가 그득한데도 손주가 할머니의 겉절이를 먹고싶다고 하니 반나절만에 배추를 절여 겉절이를 담그시고, 봄에 캔 쑥으로 만든 쑥떡을 들기름에 구워서 함께 내어놓으셨다. 돈까스는 냉동실에 잠자고 있는 식빵을 갈아 진짜 빵가루로 돈까스를 튀겨내어 아이들에게 주셨다. 아이들은 태어나서 먹어본 돈까스 중에서 최고로 맛이있었다고 엄지를 치켜들었다.


엄마가 담근 오이소박이에, 깻잎나물과 호박나물을 반찬으로 밥을 한그릇 가득 먹고나니 졸음이 슬슬 온다. 내가 살고 있는 호치민에도 호박도 있고 오이도 있는데 씹힐 때의 질감도, 입 안에서 먹고 난 뒤의 포만감도 아주 미묘하게 다르다. 그곳 기후에 길들여진 농작물 탓인지, 엄마의 손맛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짜지도 싱겁지도 않은 엄마의 반찬은 밥을 다 먹고나서도 한도끝도없이 젓가락이 간다.


엄마는 지난 가을, 파킨슨병 진단을 받으셨다.


평생 손 끝이 야무지고 재빠른 분이었다. 귀찮은 일이라고는 하나 없고 어떤 일이든 앞장서서 적극적으로 해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엄마가 자신의 병을 받아들이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다. 의사 앞에서 자꾸만 "오진인거죠? 저 아니죠?"라고 물으셨다. 그 때 마침 한국에 나가있던 나는 엄마의 검사와 결과를 듣는 과정을 곁에서 함께했다. 다행히 초기에 발견되어서 진행을 늦출 수 있다는 이야기, 혈압이나 당뇨처럽 평생 관리만 잘하면 된다는 이야기들을 들으시면서도 엄마는 자신이 그런 이름의 병에 걸린 것을 믿고싶어하지 않으셨다. 그렇지만 사실 정작 옆에 있던 내가, 엄마의 병명이 마음아프고 혼란스러웠다. 몇년 사이에 순식간에 찾아온 엄마의 변화는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살짝 느려진 엄마의 걸음걸이를 뒤에서 보며 혼자 몰래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했다. 엄마의 나이듦에 대해서만은, 내가 해줄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병원을 정기적으로 가고, 약을 드시고 있는 엄마는 천천히 자신의 병을 받아들이고 계신다. 예전보다 조금 더 등이 굽고 한쪽 팔다리가 자꾸 저린다고 하시는 엄마는 여전히 새벽 세시 반에 일어나 걸어서 새벽예배를 가시고, 밭일도 하시고 오카리나 연주를 연습하고 공연도 하신다. 부엌에 서서 하루 세끼도 뚝딱뚝딱 차려내신다. 밖에 나가서 사먹자고 잡아끌어도, "이게 뭐가 힘들고 귀찮다고 그래. 이정도도 안하고 어떻게 사니?"라고 하시며 우리가 가있는 동안 맛있는 거, 좋아하는 것들을 잔뜩 차려주셨다.


내가 자라는 동안 손이 빠르고 요리를 잘하는 엄마는 먹고싶은건 말만하면 뚝딱 차려내주셨다. 비오는 날엔 부침개, 공부하다 배가고프면 떡볶이가 한상, 탕수육이나 카스테라도 사먹는 것보다 엄마가 해주는 것으로 더 많이 먹었다. 그 사이의 수많은 공이 들어가는 작업의 과정을 나는 잘 인식하지 못했다. 엄마가 내어주는 맛있는 음식을 잘 먹어주는 철딱서니 없는 딸로만 자랐다. 그러면서도 엄마는 딸이 요리를 배우거나 집안일을 잘해야한다고 가르치지 않있다. 그보다는 사회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사람이 되라고 나를 키우셨다.


내가 콩나물을 다듬다 느릿느릿하게 굴면 양푼을 뺏어가던 엄마는, 이런거는 내가 할테니 너는 좀 더 다른분야에서 빛나는 사람이 되라는 마음이셨던 것 같다. 그렇게 엄마는 혼자 부엌에서 콩나물을 다듬고, 멸치를 손질하고, 메추리알의 껍질을 하나하나 까서 불 앞에서 데치고, 볶고, 졸이면서 우리들을 매일 먹이며 나이를 드셨다. 내가 그렇게나 귀찮아하고 하찮아하던, 지루하고 단순한 작업을 하며 요리를 하면서도 귀찮아하지 않으시고 잘 먹는 모습만 흐뭇하게 바라보셨다. 그런 엄마밥 먹고 조금 더 멋진 사람으로 어른이 되었으면 참 좋았을텐데. 나는 여전히 엄마에게는 철없는 막내딸이고, 가끔은 엄마를 아프게 하는 덜 자란 아이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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