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rite ur mind Jun 24. 2020

나를 치유하는 새벽 산책.

<걷다>

한동안 수면문제로 꽤 오래 고생을 했다. ’잘 자고 싶다, 깨지 않고 푹 깊이, 죽은 듯이 자고 싶다...‘라는 것이 소망이었던 시간들이 있었다. 

    

자려고 누워있는데 잠이 들지 않는 불면이 있고, 잠이 드는 건 어렵지 않은데 중간에 깨어 다시 못 자는 불면증 환자가 있다. 나는 후자에 속한다. 두 시나 세 시쯤 깨어 이런저런 생각들이 솟아나기 시작하면, 그날밤은 거의 다 잔 것이나 마찬가지. 자려는 노력 자체를 포기하고 일어나 책을 읽기도 하고 글을 써보기도 했지만, 두어시간 자고 일어난 상태의 불면증 환자의 집중력이란 그리 훌륭하지 못하여 ’잠이 안오면 그 대신 그 시간에 무언가를 이루겠어!‘라는 야망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새벽에 깨면 대체적으로 무기력하게 누워 잠이 들기를 기다리며 눈을 감은채로 시간이 흘러가기를 기다리거나, 자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멍하니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정도의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보면 그 시간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자려고 애를 쓰다보면 대부분 마음이 가라앉고 우울해진다. 불면증 환자의 머릿속을 헤집고 돌아다니는 생각들이란, 즐겁고 유쾌한 상상보다는 그 반대의 경우가 많으니까. 그렇게 심연깊이 가라앉는 몸과 마음이 되어 보내는 시간이 하루 이틀 쌓여만 갔다.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밤을 지새우다 네다섯시쯤 깜박 잠이 다시 들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은 날은 결국 동이 트는 걸 보고, 아침을 맞곤 했다.


그렇게 새벽내내 뒤척이다 결국 다시 잠들지 못한 날이 하루하루 쌓여가던 어느 날, 스스로를 ’불면증 환자‘라고 인정하던 그 날들 중 어느 날... 커튼사이로 붉은빛이 들어오는 것을 멍하니 보다 일어났다. 문득 호치민의 새벽 거리가 궁금했다. 누워있기를 단념하고, 양말과 운동화를 신고, 아무 모자나 눌러쓰고 밖으로 나갔다. 

    

여름나라에서 유일하게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시간이었다.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조금 습한 기운이 공기 중에 가득함을 온몸으로 느끼며 아파트 단지 밖을 나섰다. 나무와 풀이 많고 근처로 강이 흐르기에 호치민의 아침은 유난히 더 풀향기 가득한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새벽부터 깨어 거의 한숨도 자지 못한 상태로 느끼는 아침공기는 더 민감하고 날카롭게 내 감각들을 자극했다. 새소리, 바람냄새, 하늘에 번지는 빛깔... 모두가 다 강하게 와닿았다.   

 

하늘이 점점 더 밝아지고 해가 솟아오르는 아침 시간에 걷다보니, 지난밤 나를 잠못들게 했던 깜깜한 밤의 생각들은 구름걷히듯 아득하게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생각한다고 달라지지 않는 문제들로 잠못자고, 고민해봐야 무슨 소용인걸까. 그저 한발 한발 내딛을 때마다 발밑에서 나는 소리가 경쾌하고,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이 너무 아름다워 감탄하게 되는, 이런 마음으로 세상을 살면 될 것 같은데... 인생, 뭐 별거 있겠어. 하는 마음이 되었다.     

그렇게 나의 아침 산책이 시작되었다. 다섯시는 너무 이른 시간이어서 거리가 어둡고, 여섯시는 조금 늦어져버려 솟아오른 햇빛을 피하기가 어렵다. 다섯시 십오분쯤 일어나 옷을 입고 준비하고, 다섯시 이십분 쯤 아파트 밖을 나서면 내가 생각하는 딱 적당한 시간이다. 야간순찰을 돌던 경비아저씨들이 교대하는 시간이고 거리에는 청소하시는 분들이 벌써 나와 지난 하루의 흔적을 치우고 있다. 강변을 따라 뛰는 러너들도 간간히 보이고, 거리는 조용하면서도 아침이 깨어나는 활기가 있다.

      

잎의 무늬가 예쁜 길가의 나무, 아침 산책을 나가는 강아지, 누군가의 집앞에 소담스럽게 피어있는 이국적인 꽃... 아침에 걸을 때면 그런 장면들을 사진으로 남겼다. 누군가에게는 저게 뭐 별거라고. 할 수 있는 장면들이지만 그날 그 아침, 단 한순간만 느낄 수 있는 ’새벽감성‘이 있다. 걷다보면 그 순간을 기억해놓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다.     


걷다보면 그렇게 많은 생각이 솟아나는 건 아니었다. 그저 걸으며 느껴지는 바람이 좋았고, 초록이 많은 이곳의 풍경이 좋았다. 그런데 그 속에서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나 얼굴들이 있었다. 어제 읽었던 책 속의 한 줄일때도 있었고, 어제 친구와 나눈 한마디의 말일 때도 있었다. 그게 뜬금없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그리운 어떤 순간이나 보고싶은 사람들... 걷다가 문득 궁금해지곤 했다. 진짜 마음 깊은 곳의 그리움은 그 시간에 그렇게 떠오르곤 했다.     


삼사십분 정도의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아직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아침, 샤워를 하고 하루를 준비했다. 잠을 못자서 오늘 하루는 또 어떻게 버티지... 생각하면서도, 지난밤 불면증환자의 캄캄하기만 했던 시간이 아침산책과 함께 스르르 녹아내렸음을 깨닫곤 했다. 사람들 속에 있다보면 기운을 얻기보다는 에너지소모가 많은 성향을 가진 나는, 새로 시작되는 하루를 살아내기 위해서는 골똘히 혼자 생각하고, 입을 다물고 세상을 가만히 응시하는 그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 같다.     


시간이 흘러 최근 내 불면은 많이 사라졌다. 거의 매일밤 잠을 이루지 못했던 날들에 비하면, 요즘은 중간에 깨지 않고 꽤 긴 시간 잠을 자는 편이다. 하지만 가끔 동트는 새벽을 기다리던 깜깜한 밤 속의 나를 생각한다. 삶이 어둡고 암담해서 잠못들었던 게 아니라, 그 아침, 나 자신에게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던, 나무와 풀과 강물과 하늘과 바람과 나만 있는 그 시간을 온전히 느꼈던 그 시간이 주는 충만함을 기다리느라 잠을 자지 않고 아침이 오기를 기다렸던 건 아니었을까.      


살아가면서 누구나 자신을 위로하는 방법을 몇 가지 알아야 한다. 그것이 누군가와의 만남이거나, 여행이거나, 음악일 수도 있다. 그리고 하나 더 있다면 나에게는 ’걷기‘이다. 내 불면의 시간들도 결국, 이곳의 새벽을 느끼는 아침 산책으로 치유되었다.     

작가의 이전글 人香萬里(인향만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