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론 하겠습니다.

컴퓨터는 죄가 없다.

by 만년 팀장 장팀장

Y2K 때문에 컴퓨터가 마비 되어서 세상이 큰일 난다는 뉴스가 나오던 시절, 나는 질풍노도의 초딩이었다.

운이 좋게도, 우리 집에는 어릴 적 부터 컴퓨터가 있었는데 당시 최신 사양이었던 삼보 486DX 모델이 내 방에 있었다.


몇 년 뒤만 되어도 삼성 매직스테이션과 함께 스타크래프트 립버전이 유행을 했겠지만, 지금 이야기를 하는 시절은 1.44인치 플로피 디스크로 포켓몬스터를 복사해서 서로 나누어 주던 시절이다.


당시 우리집 컴퓨터에는 DOS 에서 win 명령어를 치면 실행되는 윈도우 3.1이 설치되어 있었고, 좀 잘 나가는 친구들 집에는(당시 엘리베이터가 있는 아파트에 사는 친구가 참 부러웠다) 윈도우 98이 설치된 팬티엄 컴퓨터가 있었다.


새로 피카츄 버전이 나왔다고 복사해서 받았는데, 디스크 넣고 A 드라이브를 열었는데 단축 아이콘만 보일 때의 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당시,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길었던 나는 트루칼라도 아니고 하이컬러에서 구동되는, 별거도 아닌 게임에 환장했다. 하교 하고 집 현관 문 앞 까지 뛰어와 문을 두드리고 즐거운 고요한 소리가 들리면,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 잡으며 보조키의 부드러운 열림과 함께 컴퓨터 전원 버튼으로 뛰어들어 갔다.


지금도 성한 구석은 별로 없지만, 어렸을 땐 알러지 때문에 비염을 달고 살았는데 더 어렸을 때도 기관지가 약해서 병원을 달고 살았다고 한다. 콧물을 훌쩍이고 일주일에 한 번은 이비인후과 가는 생활을 군대 가기 전 까지 했는데, 이상하게도 컴퓨터 앞에만 있으면 마치 만병 통치약 마냥 아픈데가 싹 사라지는게 아니지 않은가!


맛있는 식당에 가면 "음식의 효능" 이 붙어 있는 거 처럼, 내게는 "컴퓨터의 효능" 이 있었다.

물론, 마법같이 바깥에서 열쇠를 여는 소리가 들리고(나는 항상 보조키와 주키 모두를 걸어 잠궜다) 부리나케 컴퓨터 전원을 내리면 나는 다시 쇠약한 초딩으로 돌아간다.


이상하게 당시엔 컴퓨터 앞에만 있으면 컴퓨터는 곧 게임이라는 어른들의 눈초리가 있었고, 혼나고 나서 바람에 문 닫히면 괜히 찔리는 거 처럼, 컴퓨터를 켜기만 해도 못된 짓 하는 거 처럼 마음이 찔리고, 잘못 걸리면 혼나는 시기를 보냈기 때문에 몰컴 아닌 몰컴 뒤에 벼락 같은 빠른 몸짓으로 전원을 끄고 위인전기를 책상에 펼치는 행위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조건반사에 가까운 그것이었다.


"엄마 나 머리 아파"

"컴퓨터 하니까 그렇지"


판사님, 변론 하겠습니다.

사실 컴퓨터에는 효능이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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