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알 수도 없었던,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마음
TV를 보니 올해도 취직난 때문에 수많은 대학생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뉴스가 나온다. 나 또한 비슷한 경험을 해봤기에 남 일 같지 않다.
나도 수십 번의 탈락, 불합격 통지 메일을 받았고, 생각보다 오랜 기간을 취준생이란 애매한 신분으로 살아야 했다. 그 기간 동안 자꾸 떨어지니까 괴로웠고, 주위에서 크게 압박하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느끼는 조바심 때문에 버티기 힘들었다. 왠지 정신과 몸과 영혼이 따로 논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뒤늦게 더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에, 서류 심사에 통과한 회사의 한 지점에 면접 준비를 위해 조언을 얻고자 찾아간 적이 있었다. 사실 굳이 할 필요 없는 수고였지만 그만큼 간절했고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해야 불합격하더라도 후회는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주소를 확인하여 도착해 보니 한 빌딩의 2층부터 4층까지 내가 지원한 회사의 사무실이 있었다. 급한 마음에 당장 눈에 보이는 문을 열고 뛰어 들어갔는데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았다. 문을 착각해 지하 헬스장으로 가는 통로를 선택했던 것이었고, 발을 헛디뎠으며 긴 계단을 하염없이 구르게 되었다. 계단이 중간에 꺾이지도 않고 길게 이어지는 구조였기에 마지막 바닥에 부딪혔을 때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주변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깨어보니 온몸 곳곳에선 서서히 통증이 몰려왔고, 옷도 몇 군데 찢겨져 있었다. 주위에서 119에 전화해 준다는 것을 사양하고 제대로 서기도 어려워 계단을 기어서 밖으로 나왔다. 그러는 동안 왼쪽 손목이 뭔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병원을 간신히 찾아 부러진 팔에 깁스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더 이상 취업 준비를 할 수 없어서 꼭 필요한 물품만 챙겨 서울에서 시골집에 내려왔다. 마침 내려가 보니 아버지의 회갑 잔치를 앞두고 있었다. 친척들과 동네 어른들이 모인 작은 잔치에서 나는 한 손에 깁스를 한 채 백수 신분으로 초라하게 자리를 지켜야 했다. 나로서는 아버지 회갑 잔치에 용돈을 드릴 형편도 되지 않았고, 취업도 실패한 데다 팔까지 부러져서 참석했기에 무척 부끄러웠다. 역시나 아버지도 나를 한심한 듯 쳐다보았다.
그때의 고향 집은 왠지 남의 집 같았지만 딱히 다른 곳에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집에서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고, 답답하기만 해서 주로 주변 논과 밭에 나가 서성일 때가 많았다. 하루는 평소처럼 밖에 나가려 하는데 어머니가 보기 딱했는지 나를 불러세웠다. 밖에 나가서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사 먹으라고 말하며 내 손에 오천 원짜리 지폐를 쥐여주었다. 그 돈을 받고 들판을 걷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그땐 정말 나의 아픔만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얼마나 괴롭고 힘든지를 설명하라면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시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비참한 사람은 나인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되돌아보면, 그런 나를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은 더 아프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엄마의 자부심이었다. 가뜩이나 시골에서 서울로 대학 갔다고 기대가 컸고, 내 또래 친구들이 착착 좋은 회사에 취직했다는 소식이 들리며 비교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엄마는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을 참는 듯 했다.
당시 실패하고 방황하던 나의 모습은 어떻게 보였을까? 당시 루저의 엄마는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지금도 때로는 나에게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나지 못해서, 유학을 못 보내줘서, 물려줄 재산도 많지 않아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엄마이기에 그때 내가 엄마를 더 초라하게 만든 것은 아니었을지 걱정이 된다.
그때 내가 믿음직한 모습으로 엄마에게 확신과 희망을 주었다면 어땠을까? 아니 그보다 먼저 내가 취업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게 한없이 미안하다. 살아가면서 이렇게 엄마의 마음을,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일이 생각보다 많았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