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앞을 지나는 열차, 거기에 슬램덩크라는 스토리까지
가마쿠라를 내 첫번째 도쿄여행 일정에 포함한 이유는 단순했다.
사실, 가마쿠라를 방문하는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슬램덩크의 그 장면을 보러 가고 싶다
슬램덩크 애니메이션 오프닝에 등장하는 이 장소가 바로 가마쿠라다. 물론 나는 슬램덩크 애니메이션은 1편도 본 적 없이 오로지 만화책으로만 본 사람이지만 저 장면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강하게 남아있다. 수많은 슬램덩크 덕후들 사이에서 난 그저 그런 팬에 불과한 수준이겠지만, 그래도 저 장면은 보러 가고 싶었다. 슬램덩크에서 가마쿠라가 끈덕지게 나오는 배경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꽤 멋지지 않은가. 바다와 그 앞을 지나는 노면전차라니. 일주일이나 도쿄에 있는다면 하루 정도는 꼭 시간을 들여 가보고 싶었다.
가마쿠라에 가는 건 여러 방법이 있는데, 본인의 숙소 위치와 선호하는 방식, 가격대 등을 고려해서 고를 수 있다. 내가 고른 건 가장 대중적인(?) 방법이라고 생각되는 신주쿠 출발 오다큐선을 타는 일이었다. 애초에 이곳에 가기 위해 여행 중간에 숙소를 신주쿠 쪽으로 바꾸기도 했으니까. 신주쿠역에서 우선 가마쿠라-에노시마 프리패스를 샀고, 그러면 중간 기점이 되는 후지사와 역에서 에노덴(가마쿠라 지역을 다니는 노면전차)도 1일동안 마음껏 이용할 수 있다. 신주쿠에서 후지사와까지는 1시간 정도 걸린다.
가마쿠라 여행을 이야기할때, 우리가 떠오르는 지역의 8할은 '가마쿠라고교앞역'(가마쿠라고쿄마에)을 의미한다. 하지만 도시의 개념에서 '가마쿠라'라고 하면 에노덴을 타고 훨씬 더 들어가야 하는데, 거기엔 가마쿠라 불상을 비롯해 시장을 구경할 수 있다. 가마쿠라 막부가 있었던 곳인 만큼 역사 유적도 많다. 물론 나는 그곳에 가진 않았다. 어쩌다 보니 이미 오후에 가마쿠라-에노시마 지역에 도착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가 보고 싶은 건 바다와 전차였으니까. 아래는 내가 좋아하는 여행 유튜버 '트립콤파니'가 정리한 지도. 이걸 보면 조금 더 이해가 쉽다.
https://www.youtube.com/watch?v=e501NWIw3PQ
즉 위 지도대로 후지사와 역에 온다면, 이곳에서 에노덴을 타고 가마쿠라-에노시마 지역을 돌아다니게 되고 대부분은 '가마쿠라고쿄마에' 역에 내린다. 다만 나는 한 정거장 더 가서 시치리가하마 역에 내렸다. 그쪽이 해변가 구경하기 더 좋기도 하고, 사람이 적기 때문이었다. 가마쿠라 지역은 관광객이 정말 많고(특히 다른 곳 대비해서 중국인 관광객의 숫자가 높은 만큼 사람 자체가 많다), 가마쿠라고교앞역에서 제대로 된 사진을 건지기 어렵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시치리가하마역은 훨씬 내리는 사람도 적고, 개인적으로는 이곳이 해변 사진을 찍기엔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바닷가를 앞에 두고 우측에 보이는 섬이 에노시마 섬이고, 날씨가 좋은 날엔 저 멀리 후지산도 보인다(물론 내가 갔을 땐 안보였다). 이곳은 해변이 길게 퍼져 있고, 바다 색은 푸르러서 마음이 탁 열리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특히 도쿄의 복작한 시내에 있다가 오면 더 차이가 실감난다. 이곳에서 한참을 머무르며 사진을 찍었는데, 피크닉을 온 일본 학생들이나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해변가 입구 앞에는 편의점이 있어서, 신라면을 사서 생라면을 먹었다. 일본 어느 편의점에나 신라면은 팔고 있는게 다행. 한참을 바닷가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무더운 7월의 일본이었지만, 바닷바람은 충분히 시원했다. 아름다운 날이었다.
개인적으로도 시치리가하마 역에 내리는 걸 권장하는 이유는, 이곳에서 가마쿠라고쿄마에 역까지 걸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20-30분 정도면 충분하고, 그저 한쪽 방향으로 가면 되기에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 무엇보다 바다를 앞에 두고 노면전차가 지나는 '풍경'을 찍고 싶다면, 가마쿠라고쿄마에 역 스팟이 아니라 시치리가하마역에서 가마쿠라고쿄마에 역으로 가는 길에 사람이 없는 곳이 있다. 나 역시 그곳에서 한참 사진을 찍었다.
우리 말고 한두 그룹 정도가 더 있었는데, 가마쿠라고쿄마에 역 앞은 어림잡아 30팀 정도가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차이다.
어쨌거나, 바다를 왼쪽에 끼고 가마쿠라고쿄마에 역을 향해 가는 길은 즐겁다. 어디를 둘러봐도 꽤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져 있고, 도시를 지나는 에노덴을 보는 맛도 쏠쏠하다. 이따금씩 지나는 자동차들도 충분히 멋진 배경이 되어준다. 그래, 이 풍경을 보러 가마쿠라에 왔지-라는 생각으로 충분히 만족스럽다.
소문대로 가마쿠라고쿄마에 역 앞은 사람이 정말 많다. 그래서 본인만 렌즈에 담게 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곳이다. 다만 그럼에도, 꼭 사진에 담지 않아도, 사람이 정말 많아도, 그 모습만큼은 충분히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곳이다.
가마쿠라고쿄마에 역을 지나서는, 에노시마로 이동했다. 중간중간 사진에 보이던 섬이다. 가는 길에는 나름 힙한 가게들도 여럿 있고, 골목 자체가 고즈넉해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특히 중간중간 길에는 에노덴이 다니고 있어서 열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다시 사람들과 함께 지나는 맛도 있었다. 일상이라면 이 전차에 길을 멈춰야 하는게 귀찮을 수 있겠지만, 나같은 관광객 입장에선 즐거운 경험이니까.
에노시마 섬까지는 가마쿠라고쿄마에 역에서 도보로 30분 정도다. 물론 프리패스가 있기 때문에 한정거장 정도 타서 걸어가는 거리를 조금이라도 줄이는 것도 좋다. 고시고에역이나 에노시마역에서 간다면 조금 더 시간을 단축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 때는 그냥 걸어갔고, 그 경험이 나쁘지 않았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갈 무렵이었고, 에노시마 대교를 지날 땐 하늘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에노시마 섬 안에 학교가 있지는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소풍을 왔다가 돌아가는 건지 학생들이 꽤 많이 스쳐 지나갔다. 비교적 왁자지껄한 그 모습마저도 괜찮았다.
원래는 에노시마 신사까지 올라갈 심산이었다. 그곳엔 전망대도 있고 카페나 가게도 있어서 들러볼만 하겠다 싶었다. 다만 하루 종일 걸어서인지, 또 저녁이 되면서 급격히 피곤해졌고 오르막을 오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초입에서 다시 내려와 에노시마 섬의 특산품(?)인 시라스 덮밥을 먹었다. 메인 상점가에 있는 가게여서 관광객 식당 같은 느낌이 나긴 했지만, 딱히 가릴 처지가 아니기도 했고(일본에선 생각보다 가게들이 일찍 문을 닫고, 지금 먹지 않으면 어디든 갈 수 없을 것 같았다)어차피 시라스 덮밥에 대한 기대가 높지 않아서 상관없다는 마인드였다.
시라스동은 잔멸치덮밥으로 보면 대충 그 느낌이 맞는데, 시라스가 치어를 의미하는 만큼 멸치, 정어리 등을 이용한 음식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가게마다 내는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이 동네에선 대부분 가게가 시라스동을 내고 있고, 내가 간곳은 시라스만 가득찼다기 보다는 다른 것들도 섞어 놓아서 난이도가 그렇게 높지는 않았다. 그럭저럭 이 지역의 유명한 음식의 맛은 이렇군- 하고 먹을 만한 맛이었다. 물론 또 먹냐고 하면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래는 메뉴판을 번역 어플에 돌렸던 것인데, 시라스동 외에도 먹을만한 음식은 여럿 있는 편이다. '전형적인 관광객용 음식'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관광객 식당을 가는 것도 때로 의미가 있기에 에노시마에 온다면 한 번 쯤 먹어볼 수는 있겠다. 물론 나도 원래 계획상으로는 이걸 먹으려던 건 아니었고 미리 선택해둔 다른 음식점이 있었는데 그곳이 하필 문을 닫는 바람에 '이렇게 된 이상 시라스동이나 먹자'가 되긴 했다.
그리고 다시 에노시마 대교를 건너, 에노덴을 타고 왔던 길 그대로 신주쿠 역에 돌아왔다. 에노덴에는 퇴근한 사람들과 집에 가는 학생들이 섞여 있었고, 그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이 학생들이 나와 같이 먼 곳에서 소풍을 온 건지, 아니면 후지사와역 인근에 살면서 가마쿠라고교를 다니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의 재잘거림은 잔뜩 지친 내게 꽤 괜찮은 소음이었다. 여행의 즐거움은 홀로 자유로워지는 것도 있지만, 현지의 일상 속에 함께 하고 있다는 느낌에서도 생기곤 하니까.
가마쿠라-에노시마는 정말, 꽤 아름다웠다. 다음에 간다면 겨울에, 겨울 후지산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