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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효훈 Feb 11. 2016

톡톡 튀는 청년을 죽인 건 당신이다

이 사회 청년들은 단 한번도 '다른 생각'을 허용받은 적 없다

“(…)세세한 스펙 따위 별 상관 없으니 거기에 목숨 걸고 그러지 말고 큰 꿈을 가져봐”

                                                                                              <표백>, ‘취업 선배들과의 대화’ 中, 장강명, 26p


20대로 살다 보면, 들려오는 숱한 말들 중 하나는 ‘20대니까 그래도 톡톡 튈 거 아니냐!’와 같은 것들이다. 20대니까, 젊으니까 창의적인 아이디어도 낼 거고, 다른 생각도 할 수 있을 거고, 특별한 생각도 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 그러니까 너희는 우리도 생각했을 법한 뻔한 것 말고 조금 다른 것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기대가 담겨 있는 말이다. 


허나 그 말을 들으면, 사실 황당함뿐이다. 그동안 우리에게 ‘새로운 것’을 떠올리고, 생각하고, 이야기하도록 한 적이 있던가? 지금 20대는 ‘죽음의 트라이앵글’이라는 입시지옥의 10대를 거쳤고, 미국인들도 ‘못 풀겠다’라고 하는 수능 영어 문제들을 고교 3년 내내 풀었으며, ‘10 to 10’이라고 흔히 불리는,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공부 스케줄이 잡힌 학원을 다니며 자랐다. 그 지독한 교육의 목적은 단지 ‘대입’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함이지 배움은 아니었다. 결국 지금 20대는 자신이 기억하는 인생의 절반 이상을 무한히 반복되는 암기와 답이 정해져 있는 문제풀이로 보냈다. 


 ⓒ 소셜펀치 

그 10대의 삶에는 ‘새로운 생각’ 혹은 ‘다른 생각’은 조금도 낄 틈이 없었다. 학교에서는 잤고, 학원과 독서실에서 홀로 자습서와 문제지를 풀었고, 사람을 만난다면 모니터에서 홀로 가열차게 떠드는 인터넷 강의 강사였다. 수업시간에는 아무도 질문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질문을 하거나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하고, 학교와 학원에서 가르쳐주는 것 이외의 것을 하는 아이들은 ‘문제아’가 되었다. 그 10대의 삶에서 대입을 제외한 모든 것은 ‘대학 가서 하라’는 선생님과 부모님의 강압에, ‘지잡대 가면 인생 망한다’는 사회의 강압 아래 빛이 바랬다. 


‘닐’의 아버지는 닐이 하버드에 가서 의사가 돼야 한다며 닐이 좋아하는 연극을 그만두게 한다 ⓒ죽은 시인의 사회  

결국 그렇게 10대를 보내고 대학에 들어온 이들에게 이제는 ‘기성세대와 다른 생각을 하고 그걸 행동에 옮겨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서 직접 행동으로 옮기고 있는 청년들에게 ‘취업 준비 안 하느냐?’라는 강압을 가한다. 또한, 그 새로운 청년들이 새로운 시도에 실패하면 ‘경력에 공백이 있다’며 그동안의 시간과 도전을 낭비로 취급하면서 말이다.  



“그러면 늙은이들더러 도전 정신을 가지라고 하겠니?”

                                                                                                <표백>, ‘취업 선배들과의 대화’ 中, 장강명, 26p



‘우리는 이제 뇌가 굳어서 그런 것 못한다’고 한다. 허나 지금 20대는 뇌를 ‘암기’ 외에 다른 용도로 써 본 일이 없다. ‘젊은 애들은 좀 톡톡 튀어야지’라고 하는 당신들이 ‘다른 생각하지 말고 외우기나 해라’고 했기 때문이다. 뇌에게 다른 생각을 허하면 그것은 이 사회에서 도태를 의미했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면 대가리를 한 대 갈기며 “공부나 해”라고 소리쳤다. 당신들은 나이가 먹어서 뇌가 굳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말랑말랑했던 뇌를 굳이 굳혀야만 했다. 


우리의 중·고교는 갈수록 수능과목에만 치중하고 있다. 고등학교의 H.R, C.A, 동아리 활동 둥은 대학 스펙의 한 줄 남기기가 아니라면 사라지거나 유명무실하다. 학부모들은 예체능 교육시간을 최소수준으로 줄이는 자율형 사립 고등학교를 원한다. 외고는 외국어 인재를 기르고 과고는 과학 인재를 기르는 것이 아니라 수능을 잘 풀어 명문대에 갈 인재를 기른다. 


그러한 사정은 대학교육도 마찬가지다. 최근 EBS의 다큐 <교육대기획-서울대 a+의 조건>에서 서울대 상위 1% 학생의 공부법을 분석했다. 그들은 교수의 말을 요약 정리하는 수준이 아니라 녹음해서 모든 말을 ‘베끼는’ 수준으로 공부하고 암기했다. 교수의 생각과 다른 의견을 쓰면 대학에서조차 A+의 성적은 보장받을 수 없음은 서울대생들의 발언에서 드러난다. 우리의 대학교육 역시 암기의 연장일 뿐 창의와는 연관이 멀다. 그나마 다른 세상을 공부하는 교양 과목은 전국의 대학생들이 ‘들을 교양 과목이 없다’고 불평해도 줄어들기만 할 뿐이다. 


 A+학점은 녹음을 하여 교수의 모든 말을 달달 외운다 ⓒEBS 교육대기획 캡처  


“(…)젊은 사람들이 잃을 게 얼마나 많은데… 일례로 시간을 2,3년만 잃어버리면 H그룹 같은 데서는 받아주지도 않잖아요. 나이제한을 넘겼다면서.”
“(…)승률이 희박해 보이니까 자기들은 안 하고 청년의 패기 운운 하는 거잖아요.”
“이름이 뭐랬지? 넌 우리 회사 오면 안 되겠다.”

                                                                                         <표백>, ‘취업 선배들과의 대화’ 中, 장강명, 26~27p  



솔직하자. 당신들은 이런 제도를 만들어서 우릴 가뒀을 뿐만 아니라 우릴 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신들은 그동안 다른 생각을 하던 10대들에게 ‘좋아! 너 정말 새로운 생각을 했구나!’라고 칭찬한 일이 있던가? 대학생이 돼서 자신의 취미활동에 탐닉하는 20대에게 ‘자기계발을 하는 모습이 좋다. 더 정진하렴! 취업준비는 천천히 해!’라고 격려한 일이 있던가? 어떠한 것에 재능을 보이는 10대에게 수능 문제지를 쥐여주고 다른 일을 하려는 20대에게 토익책을 쥐여주지 않던가? 우리를 만나면 ‘그래서 수능 몇 등급?’이라는 말로 우리를 평가하고 ‘대학은 어디? 학점은? 토익은?’이라는 말로 우리 인생의 성공 여부를 가르지 않던가? 


정말로, 정말로 그동안 당신들은 10대가, 20대가 암기 말고 창의적인, 새로운 것을 하려고 할 때 그들을 응원하고 인정한 적이 있나?


“우리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떠한 네 생각도 가져서는 안 된다” ⓒEBS 교육대기획 캡처  

사람은 그가 살아온 환경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지금의 20대가 삶 내내 남다른 생각과 창의가 말살되는 환경에서 살도록 해놓고 이제 와서 창의를 요구하다니. 우리가 당신들에게 스마트폰을 완벽하게 다루지 못하고, SNS를 잘하지 못하는 것을 두고 ‘왜 그렇게 이해를 못하냐’라고 하면 ‘살면서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데…’하며 억울하지 않겠는가? 20대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왜 뻔한 것만 이야기하느냐’라고 한다면 억울할 수밖에 없다. 


뻔한 것만 가르쳐줬잖아!  


게다가 당신들의 ‘평가’가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상황에서 다른 것을 냈다가 무슨 일이 날 줄 알고? 우리는 다른 질문을 했을 때 선생님이 ‘오, 그것참 좋은 질문이다!’라고 말하는 환경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아, 쟤는 왜 질문을 하나’라는 환경에서 자랐다. 면접장에서, 시험답안에서 새로운 답안을 냈다가 낙방을 하고 성적표에 D가 찍힐 수도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다른 생각을 보일 수 있나? 


지금의 20대들의 뇌는 주입식 교육을 받은 당신들과 비슷하지 당신들의 상상 속에 그려진 톡톡 튀는 20대와 가깝지 않다. 물론, 그래도 우리는 아직 사회에 상대적으로 ‘덜’ 길들여졌기에 다른 생각을 할 가능성이 조금 더 높긴 하다. 허나 우리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게 우리 잘못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해봤자 안 먹히고’, ‘해서 안 되는 위험을 겪느니 남들 하는 대로 하는’ 거고, ‘해온 게 그것밖에 없어서 그것밖에 못 하는’ 거다.  



“거 봐, 아까는 도전하라고 훈계하더니 내가 막상 도전하니까 안 받아주잖아.”

                                                                                               <표백>, ‘취업 선배들과의 대화’ 中, 장강명, 27p



창의를 보고 싶다면, 당신들부터 바뀌어야 한다. 학교와 학점, 영어점수로 사람의 모든 것을 평가하고 그 평가의 결과를 통해 당신들이 정한 ‘사회적 클래스’에 차등적으로 진입하게 하면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향해서 ‘왜 나와 다르지 못해!’라는 건 개가 자신의 새끼에게 “너는 왜 ‘야옹’이라고 울지 않아!”라고 하는 격이다. 이 사회는 당신들이 원하는 사람이 되어야 인간으로 대접받고, 살 수 있다. 


결국 당신들이 원하는 사람은 창의적인 사람이 아니라 당신이 살던 시대에 인정받던 인간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가장 못하는 게 ‘다른 생각 하기’다. 당신들이 원하는 톡톡 튀고 다른 생각하는 창의적 인재는 일찌감치 당신들이 날개를 자르고, 짓밟고, 무참히 숨을 조여서 죽였기 때문에, 없다


최소한 당신들의 그 ‘잘난 세상’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연극의 꿈을 접게 된 닐은 결국 자살한다. 하지만 이것은 살인이다 ⓒ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캡처   


“대학, 성적 얘기말고 다른 얘기 좀 해보고 싶은 청소년들의 모임”

                          2010, 하자센터, 창의를 다루는 청소년 모임의 초대문구. 2013년에 모임은 사라지고 말았다.



*이 글은 고함20(www.goham20.com)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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