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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효훈 Sep 01. 2019

공정함에 대한 분노에도 계급이 있다

군대에 있을 때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 주로 했던 일은 생활관에서 영화를 보는 거였다. 그래도 나는 운이 좋아서 올레티비가 있는 부대에서 근무했는데, 무료로 풀린 영화들을 하나하나 보는 것이 주요 행사(?) 중의 하나였다. 그 때 내가 불만을 품은 것이 있었는데, 무료 영화 특성상 대부분 B급 영화긴 했지만, 한국 영화는 유독 조폭이나 학교폭력과 연관된 내용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뒷골목을 헤매는 양아치, 조폭이 움직이는 거리, 학교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검은 세력'과의 연관이 지긋지긋했던 나는 그러한 영화 하나를 또 완주하고 나서 "아니 대체 요새 세상에 저런 일이 얼마나 흔하다고 맨날 저딴 영화를 만드는거야?"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내게 돌아온 대답은 전혀 예상 밖이었는데, "내가 살던 동네에선 저랬는데?"라는 말이었다. 


비단 이런 일 뿐만은 아니다. 군대가 내게 준 몇 안되는 긍정적인 부분 중 꽤나 큰 가치가 있다면, 그건 내가 보지 못한 세상을 체험시켜줬다는 것이다. 내가 서울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뭔가 '다른 사람'으로 대하는 이들, 내겐 너무나 지긋지긋하고 절망스러웠던 산골과 시골마을의 풍경이 서스럼없는 이들... 굳이 일일이 그 사람들이 어땠는지를 나열하고 싶지 않기에 줄이지만, 그 이전까지 나는 '서울도 못 사는 동데 많고 서울도 그냥 그런 도시 중 하나에 불과한 것 뿐인걸'이라는 단순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2년의 시간 동안 그 생각이 무참히 깨지고는 내가 얼마나 특별한 환경에서 성장했는지를 배웠다. 비단 '서울살이' 뿐만은 아니었다. 한창 세상을 빨빨거리며 돌아다녔다고 자부했지만 그건 고작 서울에서의 이야기였고, 전국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그 때 조금이나마 눈치챘던 것 같다. 최소한 '내가 모르는 세상이 있다'정도는 배울 수 있었다.


나는 이래저래 그러한 문화의 충돌을 겪을 일들이 많았던 것 같다. 어쩌다보니 다양한 지역과 동네에 거주하는 이들을 만날 기회가 더러 있었다. 그 과정이 내게 준 건 겸손함이었다. 이를테면, 오늘처럼 미용실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어디 사느냐란 질문에 '송파구에 산다'라고 이야기를 했을 때 돌아오는 '좋은 동네에 사시네요'라는 말에 가타부타 핑계를 많이 대지 않는 법같은 것이다. 지금 내가 거주하는 곳은 송파구에서도 풍납동이고, 이곳은 흔히들 기대하는 '송파구'랑은 그 궤를 달리하는, 사실 서울 내에서도 특이한 케이스에 속하는 동네지만, 어쨌거나 그것을 일일이 설명하는 건 부질없는 짓이다. 최소한 내가 풍납동의 옆동네인 강동구에서 자랐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어디가서 '제가 자란 환경은 정말이지 별로였어요'라고 할 만한 깜냥이 아니란 것 정도는 익혔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누군가가 내게 '촌동네에 사시네요'라고 한들 나는 별로 기분이 나쁠 일이 없다는 게 이유겠다. 난 내가 자라난 동네가 촌동네가 아니란 것 쯤은 안다. 강남구에 사는 어떤 시민 A가 보기엔 그럴수도 있겠지만, 그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면 뭐 그러려니하고 말 것이고, 그렇다고 한들 바뀌는 게 없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말로 상처를 받을 거란 것을 안다. 그리고 그런 이가 자격지심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사회란 것도 배웠다. 최소한 우리 사회가 누군가의 지역이나 동네, 혹은 여타 자라난 환경이나 학교를 두고 가타부타하는 것이 '무례'하다는 것 쯤은 공유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격지심이 사라지는 게 아니란 건 안다. 


굳이 지역이 아니더라도 대학이나 무엇이나 여러 이유로 나 스스로가 익힌 일이다. 고3 수험생활 때 수시를 준비하며 만났던 이들에 대한 끔찍한 '자격지심'이 여전히 내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처럼,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여긴다는 건 그런 일이었다. 사실 지역이나 동네 정도면 개인에 따라 웃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것이 '연봉'이 되고, '사는 집의 크기'가 되는 식으로 발전해나가기 시작한다면 그건 정말로 '어려워진다'. 발언권을 '포기당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니까 군대에서 만났던 어느 이는 내게 "너 서울 산다며? 나 예전에 학교에서 수학여행으로 서울 가봤어"라는 말이라도 전할 수 있었으나, 그 이외의 것들은 입 밖으로 꺼내기가 어렵다.


최근 몇 주일 간 우리 사회에선 공정이 이슈였던 것 같다. 법무부장관 후보자 개인이나 그의 자식에 대해서도 난 하고 싶은 말이 없다. 내가 아니더라도 그 이슈에 대한 이야기는 '과분하게 많다'. 늘상 얘기하곤 했던 '그래서 정시냐 수시냐'에 대해서도 지금은 관심이 없다. 내가 궁금한 건 다른 이야기다. 어떻게 보면 가장 분노할 법한 이들이 가장 침묵하는 상황에 대한 이야기다. 왜 90의 상황에 대해서 70과 80들은 맘껏 이야기하고 분노하지만 10과 20은 이야기조차 꺼내지 못하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그들에게 마이크를 주지 않아서일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그 누구도 그들에게 이 이슈에 대해서 말해도 된다고 말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발언권을 포기'당했기 때문이다. 


어느 지역 대학에서 이 이슈에 대해서 성명을 낸다고 돌아올 답변이 무엇일까? "어, 그건 너희들을 염두에 두고 한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그러니까 '공정'은 너희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잖아. 그렇지? 너희는 그냥 노력을 안한 거고"가 아닐까? 물론 살아가면서 어떤 이슈에 대해서 가장 손해를 봤다거나, 가장 심적으로 힘들어야 하는 사람들만이 말을 해야 하는 건 아니다. 설령 나와 아무 관계가 없더라도 이야기하고 분노할 수 있어야 하는게 당연히 건강한 사회다. 내가 더 가졌다는 이유나 덜 힘들다는 이유로 '그래도 나는 괜찮아'라고 할 이유는 없다. 힘든 건 힘든 거고 화나는 건 화나는 거고 말하는 건 말하는 거니까. 


다만 궁금한 건 왜 누군가는 말을 해선 안되는 분위기가 사회 저변에 깔려 있느냐는 거다. 그리고 우린 2016년에 경험했다. 어느 지역대학에서 시국선언을 했다가 '니네가 뭐라고 분위기 따라 그런 걸 하냐 ㅋㅋㅋㅋ'는 비웃음이 세상을 뒤덮었다. 그리고, 애초에 그 시국선언이 나오기 전에 수많은 내부인들은 이야기했을 거다. "우리는 그런거 하면 욕만 먹어"라고. 이 이슈를 몇 주 째 수십 수백건이 달하는 기사를 쓰면서 왜 어딘가에 있는 이들에게 마이크를 댈 생각은 하지 않는 걸까. 


고등학생이 인턴을 할 수는 있지만 저 사례는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보다 고등학생이 인턴도 할 수 있다구? 고등학생이 교수를 만날 수 있다구?라고 생각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세상이 그렇지 뭐'라며 흘깃 지나가는 이들의 이야기는 왜 나는 접하기가 어려운걸까. 관심이 없어서일까 그 이야기를 가져와봤자 쓸모가 없다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어서일까. '쟤는 공정하지 않게 우리 대학에 왔어'라는 비판이 우리 사회에서 공정을 다루는 '그렇게나 중요한' 목소리인걸까.


내가 궁금한 건 한 가지다. 지금 분노는 어디를 향해있는 건지가 궁금하다. 지금 우리 사회는 공정한데 '저 사람'이 공정하지 않은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가 궁금하다. '저런 세계가 있었다는 말이야?'라고 분노하는 건지가 궁금하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대표되는 목소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후자는 아닌 것 같다. 필요에 따라 공정이라는 단어를 제멋대로 끌어다 쓰는 이들이 모든 걸 어지럽히고 있다는 느낌 뿐이고, 그만큼 더 궁금해지고 절망스러움을 느낄 따름이다.


물론 실제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가지는 절망은 후자에 가까울 것이지만, 집권하는 사람들은 그 목소리를 오독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러니까 '위법은 아니다'라는 이야기만이 맴돌 뿐일 수도 있겠다. 실제 장관이 되는 것과 사회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이해하고 그에 따른 목소리를 내는 것이 정치인의 책무라면 그런 이야기는 별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이 사안 자체에 대해서 가타부타 더이상 붙이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런 이슈만 나왔다하면 어김없이 '공정함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는 청년들이'라는 문장을 발견할 수 있지만, 그리고 그런 청년들이 분노해서 목소리를 높이고 시위까지 나섰다고 다들 난리를 피우고 있지만, 지금 공정을 운운하는 사람들이 과연 대부분이 청년인가라고 하면 그건 아닌 것 같고, 많은 청년들은 이러한 이슈에 공정함을 운운했다가는 욕이나 먹을 것이란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들이 말하는 '청년'이라 함은 자기들 세상과 눈에서만 보이는 이들이란 것도 너무나 명징하게 보이는 것이고, 그만큼 청년이라는 단어가 공허해질 수밖에 없다. 


공정하지 않음에 분노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있으며, 당장 최근에 대입을 겪었을 이들인만큼 더 공감할 수 있겠지만, 그 분노라는 것은 표출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아니면 일찍이 거세되어 또다시 '세상은 원래 그렇지 뭐'라며 좌절되는 수많음 감정들을 떠올리면 더욱 더 이 논란들과 언론에서 집중적으로 비추는 목소리들이 우습게 보이는 것이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쟤는 공정하지 않은 것 같아'라는 누군가의 감정은 공정함에 대한 청년 세대 전체의 엄청난 분노로 읽힐 것이고, 어떤 공정함에 대한 분노는 '패배자의 분풀이'로 밖에 읽히지 않을 것이고, 그걸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분노는 사라지고 좌절과 자기검열, 패배감, 자격지심만이 우리 사회를 떠돌게 될 뿐이다. 그리고 거기에 과대 대표된 찌질함까지. 높은 계급의 분노만이 살아남는 세상에서 분노의 양은 보잘 것 없을 뿐이지만, 어쨌거나 우리 사회는 매일같이 화를 내고 있을 뿐이다. 사람들의 자격지심과 자기검열을 아래 세계에 잔뜩 박아둔 채. 그러니까 이곳에서는 화를 낼 수 있는 것도 권력일 뿐이다. '어.. 우리 동네는 촌이 아닌데?'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자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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