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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효훈 Oct 06. 2019

광기, 그리고 천재와의 연결고리

영화 <위플래쉬Whiplash> 리뷰

아래 내용은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라라랜드>(2016) 이후 더 관심이 갔던 영화가 있다면, 감독의 전작 <위플래쉬>(2014)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음악영화'라는 틀 안에서 스토리가 흘러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어거스트 러쉬>(2007)나 <비긴어게인>(2014), 원스(2007)과 같은 느낌이려나. 다만 이것은 조금 더 음악을 다루는 장면에 집중을 해서, 뭔가 멋지고 개쩌는 음악 장면이 담겨 있겠지. 라는 추측을 했다. 후자의 추측은 포스터에서 기인한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영화가 아니었다. 이 영화의 주제는 '광기'다. 광기의 소재가 음악, 그 중에서도 드럼인 것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광기를 주제로 한 영화는 소재를 살인으로 할 수도 있고, 범죄로 할 수도 있고, 그것이 우리가 자주 보거나 으레 예상할 법한 것들이지만, 이 영화는 그 소재를 음악으로 했을 뿐이다.


<라라랜드>를 보고나서 내 평가는 그랬다. 빈약한 스토리(특히 후반으로 갈수록)를 메꿀만큼 압도적인 몇몇 장면(특히 오프닝)과 음악으로 영화 자체의 의미를 증명하는 영화. 사람의 감정을 통째로 쥐고 흔들만큼의 장면이 있기에 모든 것들이 용서될 수 있는 영화. 그 땐 그저 그렇게 보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서는 감독의 특성 자체가 그러한 '압도적인 장면'을 만들어 내는 것에 있나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은 이 영화의 마지막 10분을 두고 "이 장면만으로도 가치 있는 영화"라고 평하고들 있었으니까.


뭐, 어쨌거나 마지막 10분이 주는 울림이 크긴 하다. 그것이 <라라랜드>에 비할만 하냐라고 하면, 종류가 살짝 달라 쉬이 비교하긴 어려우며 내 개인적으로는 대단했지만, '엄청난 전율'을 가져올만큼의 수준은 아니었다고 할 뿐. 그랬기에 그 마지막 10분의 '광기'에 대해 다룰 생각은 별로 없다. 내가 다루고 싶은 건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인 '천재를 향한 광기'다. 



영화는 천재를 만들고 싶은 연주자 플레처와 위대한 드러머가 되고 싶은 앤드류를 다룬다. 그리고, 지독하게도 그 둘만을 다룬다. 주변인물이나 사정은 최소한으로만 등장할 뿐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위대한 드러머'라는 목표를 앞에 둔 이들의 시야에선 그 무엇도 잠시 스쳐지나갈 뿐이고 중요하지 않음을 보여주듯이. 동시에 그들은 큰 의미가 없는 존재다. 자기보다 실력이 떨어지지만 경쟁해야 하는 다른 드러머 라이언, 자신을 무시하는 친지와 동시에 아껴주는 아버지, 사랑에 빠지지만 곧 헤어짐을 전하는 여자친구 니콜. 그들의 삶, 가치관, 일상은 영화에서 배제되어 있다. 주인공 앤드류를 방해하는 존재들일 뿐이다. 


90살까지 아무 일 없이 조용히 사는 것 보단 34살까지 오래 살고 오래도록 기억되는 것이 훨씬 낫죠.


그렇기에 니콜은 가족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자신을 은근히 무시하는 이들에게 건방진 태도로 일침을 날리고, 좋아했던 여자친구에게 '위대해져야 하는데 넌 방해가 될테니까' 작별을 전한다. 그 판단에서 니콜의 생각이나 감정, 의견은 배제되어 있다. 애초에 앤드류는 그 영역에 관심이 없다. 앤드류에게 관심이 있는 건 '위대한 드러머'가 되는 것 뿐이니까. 그렇게 앤드류의 시야는 점점 좁아지고, 오직 드럼을 칠 뿐이다.



그런 그를 자극하는 건 대학 내 최고 밴드인 <스튜디오 밴드>를 맡고 있는 플레처. 그에게 눈에 띄어 발탁된 앤드류는 그에게 인정받기 위해, 그의 밴드에서 살아남기 위해 광기로 스스로를 몰아 넣는다. 플레처는 마찬가지로 '광기'에 빠진 지휘자다. 온갖 인신공격을 서슴치않고, 폭력까지 휘두른다. 인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독선과 공포로 밴드를 지배한다. 매일 밤 피를 흘리며 드럼을 치는 앤드류가 광기에 빠져드는 건 플레처의 지도 방식이 가져온 결과다.



(몇 시간의 드럼 연주 경쟁 끝에 진 앤드류의 경쟁자에게)
너희 둘은 드럼에 묻은 피나 닦고 나가


영화는 음악영화의 일반적인 기승전결을 따라가지 않는다. 광기에 빠져가는 앤드류만을 다룰 뿐이다. 드럼만을 바라보는 앤드류는 결국 교통사고를 당하고, 피를 철철 흘린 채로 연주장에 나타난다. 할 수 있다며 드럼 앞에 앉은 그는 결국 사고로 인해 드럼을 제대로 치지 못하고, 그에게 욕설을 날리며 호통치는 플레처에게 달려들어 "이 모든 게 당신 때문"이라고 악을 쓴다. 



그 일로 학생들을 강압적으로 다뤘다는 사실이 드러나 학교에서 잘린 플레처를 만난 앤드류는 그와 대화를 하게 되고, 플레처는 자신의 관심은 오로지 '제 2의 버디 리치'와 같이 위대한 드러머를 만드는 곳에만 있다고 말한다. 위대한 음악가는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자극과 압박을 통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다고. 찰리파커가 위대한 재즈 색소폰 연주자가 될 수 있었던 건 존스에게 심벌즈를 맞은 뒤였다는 말과 함께.


세상에서 제일 쓸모 없는 말이 뭔지 알아? 그만하면 잘했어(Good Job)이야


그래도 선은 지켜야 하잖아요.
너무 세게 몰아붙이면 제2의 찰리파커도 좌절할 거에요


아니, 아니야. 진짜로 제2의 찰리파커라면, 좌절할리가 없거든


플레처는 대화 말미에 자신이 카네기 홀에서의 연주를 준비하고 있으며, 그 자리에 오라고 말한다. 결국 앤드류는 무대에 오른다. 하지만, 플레처의 제안은 속임수였다. 자신의 폭력행위를 고발한 앤드류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부른 것이었고, 앤드류에게 말해주지 않은 다른 음악으로 연주를 시작한다.



내가 등신인 줄 알아? 네놈이 찔렀다는 건 알고 있었어


 앤드류는 형편없이 첫 음악을 보내고는, 무대에서 도망쳤다가 마주한 아버지와 포옹한뒤 다시 돌아와 플레처의 존재를 무시하고 직접 드럼 솔로로 연주를 시작한다. 


내게 맞춰요. 신호줄테니까



그렇게 <카라반>, <위플래쉬>를 연달아 연주하는 앤드류는 광기 그 자체다. 동료 연주자들도, 조소를 보내던 관객들도, 플레처도 그에게 따라갈 수밖에 없다. "뭐하는 짓이야? 네놈을 죽여버릴 거다"라고 하는 플레처도 결국은 앤드류에 맞춰 지휘를 시작한다. "내 템포에 맞춰"라고 언제나 윽박질러왔지만, 결말에서 플레처는 앤드류의 템포에 맞추고, 그렇게 영화는 끝이 난다.



이 영화를 두고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첫째, 예상하지 못한 스토리라서. 둘째,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가 복잡해서. 셋째, 불편함 감정이 들 수밖에 없는 내용이라서. 넷째, 그럼에도 마지막 10분의 장면은 압도적이었어서. 이 영화를 두고 평가는 갈리고 있었다. 1)열정을 불태운,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장엄한 씬이 있었다. 최고. 2)폭력을 정당화하고 있다. 그리고 3)이 영화를 보고 잊힌 열정을 찾자!!!라는 의견까지.


감독의 인터뷰와 평론가들의 평가를 찾아보니 감독은 플레처를 전혀 긍정하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앤드류도 긍정하지 않았다. "앤드류요? 10년 뒤엔 결국 알콜 중독을 겪다가 자살하겠죠"라고 답했으니까. 극 중에 나온 다른 플레처의 제자가 압박으로 인해 결국 자살했던(플레처는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했다) 사실을 떠올리게 만드는 인터뷰다. 



<위플래쉬>는 채찍질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광기, 특히 위대한 인간을 향한 광기는 채찍질을 통해 만들어진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모습으로 발현되어야 하는가? 플레처가 진정 1명의 위대한 드러머를 만든다한들, 100명의 가능성있는 인재를 죽인다면 그럼에도 그의 교육방식은 비호받아야 하는가? 광기가 없이는 천재가 될 수 없는 걸까? 천재들은 누구나 광기를 가지고 있을까? 


불광불급. 미쳐야 미친다라는 말은 우리 사회에서도 꽤나 널리 알려진 말이다. 유명인사들이 으레 자랑스럽게 '좌우명이다'라고 소개하기도 하고, 어딘가의 서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제목의 책이기도 하니까. 그 말 자체는 틀림이 없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은 옳은가? 심벌즈를 던진 것과 플레처가 앤드류를 몰아세웠던 과정은 기실 다르지 않나? 하지만 그렇다면 천재를 만드는 과정은 어떤 방식이어야 할까? 그의 내면에 잠들어있는 '광기'는 어떻게 깨워야 하는 걸까? 


물론 나는 플레처의 방식에 절대로 동의하지 않는다. '제2의 찰리파커'가 될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실낱같은 외부자극에도 스스로 내면의 '광기'를 깨우는 사람일테니까. 이 영화가 문제작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 광기를 적나라하게 그려냈고, 감독은 주인공 둘 그 누구도 긍정하지 않지만(인터뷰를 통해 밝혔다), 얼핏 보면 영화가 스토리 속에 등장하는 '모든 광기'를 옹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드럼은 꼭 피를 내며 쳐야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 연주자는 무가치하며, 밴드의 지휘자는 원래 혹독하게 멤버들을 몰아세워도 된다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가 영화로서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마지막 10분"에 있지는 않다. 최소한 내게는. '광기'를 이렇게 적나라하게 모든 러닝타임을 투자하여 그려낸 영화라는 점에서 그렇다. "마지막 10분"이 내게 어색한 이유는, 그 장면이 만들어진 과정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대단하다고 해서 그 모든 과정이 아름다운 게 아니란 건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이를테면, <피아니스트>에서 명장면으로 꼽히는 연주장면이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는 이유는 그 과정과 그 안에 담긴 감정들이 고스란히 표현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위플래쉬>의 마지막 10분의 감정은 긍정적인 감정이 아니다. 서로를 미워하는 지휘자와 드러머, 복수를 그렸던 지휘자와 그에게 망신을 당한 드러머, 상대를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인정하게 되는(내면의 음악가적 울림이든 그 자리에서 그나마 체면을 살리기 위해서든) 지휘자와 모든 것을 내걸고 연주하는 드러머. 죽이겠다는 지휘자와 엿이나 먹으라는 드러머. 그리고 그 둘이 이뤄내는 연주. 그 감정은 긍정적이고, 기쁘고, 정리가 되는 것들이 아니다. 부정적인 감정들에서 기반해 근본적으로 불편함을 잔뜩 껴안고 있다. 그 멋진 연주가 '해피엔딩'이라고 확언할 수도 없다. 


물론 그 미묘한 감정들이 오가고, 그것이 영화로 표현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러나는 압도적인 드럼연주가 그 장면을 더 긴장감있고 '폭발적'이고 '전율'을 가져오는 것이겠지만, 나는 그 의도된 불편함이 만드는 또 다른 느낌의 폭발을 마냥 좋게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저 그 장면을 표현할 수 있는 한 단어는 '광기'였고, 그 '광기'는 온갖 분노의 모습으로 표출되고 있었으니까. 그러한 광기는 앤드류를 갉아먹는 것이고, 그러한 광기가 긍정되는만큼 폭력은 일상이 되고 사람들의 마음은 병들어가는 거니까.



내게 <위플래쉬>는 음악 영화는 아니다. 광기를 다룬 영화다. 그리고 그 광기를 적나라하게 묘사하여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걸 두고 어떻게 해석할지는 우리의 몫이다. 덮어놓고 그 광기를 찬양하든, 부정하든, 냉소적으로 바라보든, 거리를 두든. 하지만 내게 이 영화는 '천재'는 곧 '광기'다라는 말이 만든 수많은 결과들을 연상케 한다. '내면의 광기'는 그를 좋은 길로 이끌지만 억지로 만들어지고 꺼내지고 짓밟힌 광기는 뒤틀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조커>(2019)를 통해 보고 있지는 않나. 전설적인 드러머가 될지, 조커가 될지, 10년 뒤에 자살한 드러머가 될지. 그 모든 이야기들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고, 그건 모두 우리와 우리 사회가 '광기'를 어떻게 보고 다루냐에 따라 달린 일이다. 그리고 <위플래쉬>는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자, 이 둘의 광기를 잘 보셨나요? 어때요? 끝내주던가요?





지금 우리는 타인을 채찍질하며 '너를 천재로 만들기 위함'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나?

아니면 본인 스스로가 채찍질을 하고 있나.

본인 스스로의 채찍질은 내면의 갈구에서 비롯된 것인가, 아니면 그 역시 외부에서 비롯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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