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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효훈 Mar 08. 2020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코로나19의 시대 한복판에서

오랜만에 머리를 잘랐다. 따릉이를 타고, 올림픽공원을 지나 집에 가기로 했다. 오랜 만의 봄 날씨에, 올림픽공원에 사람이 많았다. 그간 코로나19로 줄어들었기에 이만큼 많은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모두가 마스크를 썼다는 점을 제외하면, 종종 코로나19 이전 주말에 올림픽공원을 왔을 때 볼 수 있었던 풍경이었다. 그 모습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코로나19로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서 생각이 났으니까.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가 아장아장 걷는 모습을 찍으며 웃는 부모님, 아이와 배드민턴을 치고 공을 주고받는 어른들, 벤치에 느지막히 앉아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들, 잔디마다 앉아 함께 사진을 찍고 누워서 휴식을 즐기는 사람들, 농구코트에서 시합을 하는 청소년들과 농구를 배워가는 가족, 카페 밖에 앉아 헤드폰을 쓰고 노트북을 두들기는 청년, 러닝을 하며 호흡을 가다듬는 사람들, 그저 함께 산책을 하는 연인과 가족, 손자가 있는 유모차를 끌고 있는 노인... 


올림픽공원은 넓고, 그렇기에 그 수많은 공간들에 모두가 각자의 자리를 얻은 채 따스해진 주말 오후를 즐기는 풍경은 정말이지 그동안 잃어버렸던 감각이었다. 그들 모두가 손을 잘 씻고 다니길 바라면서도, 그 수많은 시민들의 에너지가 사라진 지금을 생각했다. 그럴수록 헛웃음이 나왔다. 정쟁에 눈을 켜는 사람들, 자신의 이득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이들의 몸짓들은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과 에너지원이 될 시민들이 그 에너지를 멈추고, 서로를 두려워하고, 고통을 감내하는 동안 그들은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기는 커녕 우리 사회가 안 좋은 방향으로 굴러가도록 정말 열심히 하지 않았나. 그것은 얼마나 나쁜 일인가.


경제학과로 전공을 정하고 난 뒤, 배움이 짧고 의지가 부족해 많은 것을 남기진 못했으나 내가 배운 게 있다면 경제를 움직이는 건 단순히 이론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실제 경제를 구성하고 있는 시민들이 중요한 축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정책이 예고되어도 그 정책을 예상하고 시장이 움직여 그 정책이 소용없어지기도 하고, 시민들의 움직임으로 인해 정책이 예상하지 않은 방향으로 경제가 움직이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시민들의 경제심리가 위축되는 것은 전체 국가 경제에 심대한 타격이 될 수밖에 없고, 시민들이 두려움을 잃지 않고 본연의 경제활동을 이어가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아쉽고도 화가 나는 장면들을 나는 숱하게 보아왔다. 비난을 통해 조회수를 얻거나 인기를 얻거나 상대를 무너뜨리려는 이들을 보아왔고, 사람들의 두려움을 이용해 장사를 하려는 파렴치한 이들을 보아왔고, 사람들이 협력이 아니라 서로를 미워하고 두려워하고 피하도록 부추기는 이들을 보아왔다. 그들은 주말 오후 올림픽공원에서 만난 사람들의 에너지를 깎고, 부수는 행위를 서스럼없이 자행해왔고, 그건 다시 우리의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나는 정부가 보다 솔직하게 많은 이야기들을 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어느 상황에 처해 있는지, 그리고 그를 위해 우리는 어느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받아왔는지, 정부는 이 일에 발벗고 나서 책임자로서 역할을 다할 것이며, 어떤 정책들을 내놓을 것인지. 그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 시민들에게 이런 점을 부탁한다고 당부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전면 입국금지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마스크는 하루 생산량이 1000만 장이니 모두가 매일 쓸 수는 없으므로 먼저 필요한 의료진과 대구경북 지역을 고려하겠다고, 지금 방역을 위해 부족한 것들은 어떤 것이고,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언제까지 이렇게 대처를 할 것이고, 이런 점에서 어려움이 있지만 해결해나가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보다 공적인 자리에서 공적인 형식으로 말했으면 어떨까 생각한다. 허나 내외부적으로 너무 감정적으로 대응을 하는 건 아닌지 생각이 될 때도 있었고 어떤 때는 성급했고 어떤 때는 늦은 면도 있었다.


정치인들은 불필요한 쇼를 했다. 불필요한 비난에만 열을 올렸다. 메르스 때부터 조언 집단으로 전문성을 인정받아온 감염학회를 비롯한 전문가 집단이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이야기를 했다는 이유로 '사회주의 의사'라거나 '정부의 비선'이라는 비판에 열을 올렸다. 한창 방역에 힘써야하는 시기에 결국 자문단이 해체되는 기이한 꼴까지 만들어냈다. 나는 의협의 회장이 전염병에 가장 적합한 전문가라고 생각지는 않지만, 의협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들의 목소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보다 전염병에 적합한 전문가 집단을 공격하는 일이 합당한지는 모르겠다. 재계는 재계의 소리를 내고, 공공은 공공의 소리를 내고, 전문가들도 자신의 전문영역에 맞는 소리를 내면 될 일이 아닌가. 그 모든 걸 종합해서 판단하는 건 결국 정부의 몫이 아닌가. 어느 분야에는 전문가일 수 있는 교수나 특정인들은 불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과도하게 목소리를 냈고, 정치인들은 그런 현상을 부추기다 못해 앞장섰다. 이번 일을 통해 '한탕' 해보겠다는 기회주의만이 보였고, 평소엔 대립하더라도 국가적 위기 상황에는 합심해서 당장 국가에 필요한 조치들을 실행할 수 있는 위치의 사람들로서 해야할 일을 고민하고 움직이는 모습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언론의 본령이 비판이라고 한다면 고개를 끄덕거릴 만 하다. 잘하고 있는 걸 집는 것보다는 부족한 부분을 취재해 보여줘 고치게 하는 것이 더 낫다고도 생각한다. 허나 기본을 지키지 않는 모습이 너무 많았다. 어딘가에 누가 쓰러졌다고 하면 코로나 때문인지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으나 소위 유사 언론들은 그걸 올리며 불안감 장사에 급급했다. 메이저 언론들은 '돌파' '뚫렸다'라며 자극적인 보도만을 일삼았다. 인문계 교수가 교내 커뮤니티에 쓴 글을 단독이라며, 그가 한 전염병 예상을 중요한 의견인 마냥 보도했다. 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내용을 논란으로 만들고, 전후관계와 맥락을 설명하지 않고 사건을 설명하려 들었고, 어떤 공공적인 가치도 없는 내용들을 보도하기 바빴다. 나는 언론의 본령이 비판이다라고 말할 때는, '민주주의와 우리 사회의 자유를 위한'이란 말이 앞에 생략되어 있다고 믿는다. 비판을 위한 비판이나 사적인 감정과 판단을 위한 비판이 언론의 본령이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정말로 이 기사가 우리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인가?라고 답을 내릴 수 없는 기사가 너무 많았다. 누군가의 말을 검증하지 않고 앵무새처럼 받아적고, 어느 정책과 사건을 설명하지 않고 보이는 모습만 내보내는 것이 진짜 기사라 할 수 있는 일인가? 


인턴기자를 하며 얻을 수 있는 특권은 바로 '질문할 수 있는 권리'였다. 내가 시민이라면 하지 못했을 질문을, 시민이라면 만나지 못했을 사람에게 질문할 수 있었고 그들은 실제로 답을 했다. 그 권리는, 이 사회에 필요한 메시지를 할 수 있는 전문가를 '찾고 검증해서', 그 목소리를 내보내는 일이 언론이 사회에 기여하는 일이기에 가능하다고 믿는다. 전문가가 아니라면 그의 목소리를 담아선 안되고, 사실이 확인되지 않았다면 내보내서는 안된다. 뉴스룸의 명대사가 말하지 않던가? "사망선고를 내리는 건 의사의 일이지 언론의 일이 아니다"라고. 가장 필요한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판단하고, 그 메시지를 낼 사람을 찾고, 그 메시지의 진위 여부를 가르는 것이 기자의 일이 아닌가?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불안감을 가속시키에 가기로 했다. 오랜 만의 봄 날씨에, 올림픽공원에 사람이 많았다. 그간 코로나19로 줄어들었기에 이만큼 많은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모두가 마스크를 썼다는 점을 제외하면, 종종 코로나19 이전 주말에 올림픽공원을 왔을 때 볼 수 있었던 풍경이었다. 그 모습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코로나19로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서 생각이 났으니까.


지금 모두가 힘든 이 시점에 더 힘들 사람들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한 기사를 찾기 어렵다. 현장에서 싸우고 있는 의료진을 시작으로, 당장 생계가 위험해진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회사에서 부당해고를 하거나 엄포를 주거나 하는 등의 부당행위에 노출된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당장 대구경북에 거주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고, 요양원을 비롯한 곳에 있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무슨 문제를 겪고 있으며,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를 보도하고, 그에 따라 정책이 움직이도록 해야 하지 않나. 잘못되고 있는 현장에 대해 지적하는 동시에 사람의 목숨을 두고 경마식 보도를 하거나 괜한 혼돈을 주지 않도록 자중하고 보다 더 많은 검증을 스스로 해야 하지 않나. 좋은 기사도 보았지만, 신문방송학과 1학년 학부 수업에서도 '털릴만한', 저널리즘의 기본조차 되지 않은 쓰레기들을 생산하는 모습을 매순간 봐야 했다. 그것도 '1등 언론'임을 자부하는 메이저 언론사들로부터도. 아무렇지 않게 통계 그래프를 조작하고, 불필요한 목소리를 담고, 필요한 말이 아니라 하고 싶은 말을 '야마'로 잡아 되도않는 것들을 끌어모아 기사로 만들고, 그 어떤 검증도 하지 않고 그대로 보도하는 일들은 오랜시간 기자를 꿈꿨던 사람으로서 지켜보기 너무 어려운 수치스러움이었다. 20살 신문방송학과 학생들도 쓰지 않을 기사를 쓰는 일이 부끄럽지 않을지,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쓴다'라는 정체성도 지키지 못한다면 왜 펜을 잡고 있는지. 


물론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쓴다라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안다. 나 역시 기자를 포기한 이유 중 하나에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쓸 자신이 없어서'가 들어가 있다. 언젠가는 타협을 하거나, 잘못된 기사를 쓸 것 같았고 그렇다면 나같은 사람은 기자가 되지 않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내가 좋은 기자가 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은 버틸 수 있으나, 잘못된 기사로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다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글쟁이'들의 자부심은 결국 자신의 글에 대한 철저한 자기검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우리도 직장인일뿐'이라면서 잘못된 글을 쓰는 일을 타협하려 드는 건 법을 지키고 사회에 기여하기 위해 노력하는 수많은 직장인들에 대한 모욕이다. 


내가 가장 화가 나는 지점은, 코로나19가 잦아들고 나면 공공기관과 의료기관들은 부족했던 점을 되돌아보고 그것을 개선하기 위한 조치를 해 나갈 것이지만 언론계는 그렇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보도에 대해서 어떤 사과도 하지 않을 것이고, 고치기 위해 바꾸려고 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놓고 '우리는 언제나 팩트만을 보도해왔다'며 꼴사나운 자기칭찬에 열을 올리기 바쁠 것이다. 권력에 대한 감시를 한다고 하지만 본인들이 얼마나 이 사회에 해악을 끼치고 있는지는 되돌아보지 않고, 조회수 장사와 본인들의 입맛에 맞는 모습만을 이 사회에 만들기 위해 또 수많은 오보를 양산해낼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정부는 보다 많은 이야기들을 솔직하고, 또 담담하게 말하고, 이유를 설명하고, 시민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책임자라는 확신을 심어줬으면 좋겠다. 우리 사회는 마스크 해외 수출을 금지하기 위해서도 수많은 절차가 필요한 국가이기 때문에, 즉 통수권자가 마음대로 경제주체들의 행위를 금지할 수 없기에 정치인들의 빠른 결단이 필요하다. 그들은 전염병에 있어 전문가가 아니므로 말을 줄이고 전문가들에게 필요한 것이 빠르게 조치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누군가를 비판하고, 나서서 길거리에 소독약을 뿌리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는가? 필요한 법적 조치가 무엇이 있는지를 검토하고, 지역구에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를 빠르게 파악하는 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자 해야 하는 일 아닌가? 언론은 그만큼 필요한 목소리를 전달하고, 불필요한 목소리를 제거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사람들, 방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목소리들을 찾아서 공적인 공간으로 옮겨 놔야 한다. 그런 것들이 우리 사회에 필요하지 않은가?


각 주체들이 오히려 대혼돈을 바라는 양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서로를 불신하도록 만들고, 차별하고 두려워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것이 내가 코로나19때 목격한 현장이다. 하지만 동시에 사람들은 여전히 공원을 산책하고, 함께 운동하고, 대화를 나누고, 함께 식사를 하는 일상을 잃었고 또 필요로 한다. 개개인을 위해서일 뿐 아니라 개개인의 심리에 따라 반응하는 경제를 위해서도 그렇다. 지금 우리에게는 미움과 차별과 불신이 아니라 신뢰가 필요하다. 협력이 필요하다. 언제까지 시민들과 현장의 전문가들이, 경제현장에 있는 이들이, 홀로 그 두려움과 어려움에 맞서게 해야 할까. 당장 손님으로부터 감염되진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을 수많은 사람들과, 또 동시에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자신의 가족이 병들지 않을까 두려워할 수많은 사람들과, 현장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전염병과 싸워야하는 의료진들에게만 '버텨야 한다'거나 '서로를 믿자'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들이 버틸 수 있도록, 서로를 신뢰할 수 있도록 담당자들이 움직였으면 좋겠다. 주말 오후 올림픽공원에서 목격한 모습들이 사라지지 않고 앞으로 찾아올 봄날과 함께, 자주 발견할 수 있는 모습이면 좋겠다. 사람들이 에너지를 잃지 않고, 웃음기를 품고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서로에게 존재로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난 연말이 되면 언제나 명동을 떠올리는데,  그 인파가 지긋지긋하면서도, 그 안에 있음으로서 우리는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그러니 두려워할 것 없다고 무언가 서로의 존재로서 응원을 받는다는 느낌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의 공포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사회는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그 연결이 끊어진 개인에게는 그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가서 머리를 자르고, 누군가가 파는 밥을 먹고, 누군가와 함께 일을 하고, 누군가들이 있는 행사에 가고, 누군가의 서비스를 이용하고, 어딘가로 떠나는 일들이 지속되야 우리는 서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다. 오늘도 현장에서 싸우는 의료진들과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이들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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