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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효훈 Feb 01. 2021

질투에 관하여

질투가 나를 휘감는 날이면

MBTI를 하다보니 질투에 관한 문항이 있었다.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건 어쨌거나 질투에 관한 내용이었다. 나는 질투를 하는 편이다. 재능있는 이들을 보고 그저 그렇구나하고 넘길 만큼의 아량은 가지고 있지 않다. 동경을 하는 것도 아니다. 난 그들처럼 될 수 없음을 알고, 되고자 하지도 않는다. 멋지다. 그리고 그들은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다. 분한 마음이 일렁인다. 나는 그것을 질투라 부른다.


최근 페이스북에서 그런 문장을 보았다. '질투를 하는 것을 보니 이 업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는 것'이라고. 적절한 문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나는 어떤 업에 있어서 질투를 하기 보다는, 그 이의 인생 전반에 걸친 것을 질투해왔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소유한 이에 대한 질투. 내가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정확히는 '그'로 태어나지 않는 한 가지지 못할 재능과 능력과 자산에 대해 질투한다.


길지 않은 삶에서 가장 강렬하게 남아 있는 질투의 기억은 고3 때다. 현재는 학종이라 불리는, 입학사정관제를 준비했던 시기였다. 많은 대외활동을 거친 것은 아니었으나, 어쨌거나 알음알음 수많은 대외활동의 소위 '인싸'들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그 때는 싸이월드를 통해 일촌 파도타기가 가능한 시대였다). 싸이월드 프로필에 새겨진 그들의 이력은 가진 것에 나름 우쭐하곤 했던 자신을 얼마나 처량하게 만들었던지. 



유엔, 국회 등 공신력 있는 단체의 이름이 들어간 대외활동에서 '의장'과 같은 멋드러진 역들을 맡고, 어느 대회에서 수상을 하고... 그들이 가진 이력에는 끝도 한계도 없었다. 거기서 멈추었다면 나의 질투 역시 무럭무럭 자라진 못했겠으나, 그들은 '공부'마저 잘했다. 모든 것을 갖춘 '인재'들이었다. 최소한 그 때 내 눈에는 그랬다. 그 순간 맛본 절망감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최소한 한 달 간, 매일 밤 잠자리에서 그들이 떠나지 않았다. 그들과 나를 비교하며 스스로를 더 괴로운 궁지로 몰아 넣을 수밖에 없었던 시간들이었다.


그 다음 질투의 기억은 20살에 찾아왔다. 고등학생 때 처음 이력을 알게 된 이였다. 앞선 질투가 누군가를 특정할 수 없는 여럿의 이야기였다면, 이번 질투는 정확히 그 대상이 한 명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 사람은 현재도 자신의 길을 걷고 있고,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으므로 혹여나 특정될 수 있는 부분을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어쨌거나 그 사람은 나보다 나이가 한 살 어렸지만, 이미 고등학생 때 엄청난 성취를 거둔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떨어졌던 대학교의 전형을 통해 합격했던 대표 사례이기도 했다. 그 대학 전형에 떨어졌을 때 그 실패감이 어마어마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내가 실패한 길에서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나에게는 어떠한 선언 이었다. '봐, 전형은 문제가 없었어. 너가 부족했을 뿐'이라고. 한창 자괴감을 느끼고 있던 군에서, 내가 동경하던 무언가에 등장한 그를 보고는 절망하기도 했다. 그는 그렇게 잊을만 하면 내 삶에 다양하게 등장하곤 했다. 그 때마다 나는 질투를 느꼈다.


살면서 질투를 했던 일이 많지는 않다. 애인의 이성친구에게 질투를 느끼는 일이야 많았으나, 그러한 질투가 아니라, 내 삶을 기반으로 했을 때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이에게 분한 감정을 느끼는 '질투'의 경험은 크게 그 두 번(혹은 두 사람) 뿐이다. 나는 언제나 긍정적인 사람에 속했고, 자신을 썩 괜찮은 사람으로 믿으며 살아왔다. 근거는 없었지만 자신이 꽤나 괜찮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마음을 가진 채 사람들을 평가하기도 했다.


질투의 경험은 그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순간들이었다. 삶이 통째로 부정당하는 느낌. 질투를 할 만한 대상은 많았으되 질투를 느낀 일은 적었으므로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 내가 잘하고자 했던 것, 내가 가지고 싶었던 것들을 소유한 이들에 대한 질투였다. 그러니 나는 어느 날 내 옆에서 살았던 소위 '금수저'를 질투해 본 일도 없었고, 공부를 잘했던 친구들에게도, 농구를 잘했던 친구들에게도, 바둑을 잘 두었던 친구들에게도, 게임을 잘 했던 친구들에게도 질투한 일이 없으나 때로 질투를 했다. 내 삶이 밀려난 느낌을 주는 이들에게.


질투의 경험은 그닥 좋은 일이 되지 않는다. 부정적인 감정이 자신을 감싸고, 괜스레 나를 평가절하한다. 주변인들에게 궁시렁대거나, 틱틱대거나 하는 일로 이어지기가 일쑤다. 대부분 평온한 상태, 그것도 긍정적인 기분을 '항상성'을 가지고 있는 내가 '-', 마이너스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몇 안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 기분은 전혀 유쾌하지도 않고, 쉽사리 해결되지도 않는다. 그 감정이 더 긍정적인 나로 나아가는데 도움이 되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허나 때로 질투는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나를 찾아와 휘감는다. 또한 나 역시 질투에 빨려 들어가는 때가 있다. 즉, 나 스스로 질투를 할 만한 일을 만든다. 내게 질투란 감정을 선사한 이를 SNS에서 팔로우하는 일도 그 일이 될 것이고, 누가봐도 내가 질투를 하게 될 만한 콘텐츠임을 알면서도 접근하는 일들이 그렇다. 주기적으로 먹어줘야 하는 약도 아니건만 나는 그렇게 몇 개월, 혹은 1년, 혹은 그 이상의 주기로 질투를 내 몸에 두른다. 


그 질투에 출구가 있는지 여전히 나는 모른다. 스스로 '찌질하다'고 여기기도 하면서도, 질투란 기분에 몸을 맡기는 기분이 고3 처음 절망감을 맛본 때처럼 나쁘지는 않다. 과거 '우울할 땐 우울한 음악을 듣는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그 사람들이 우울한 기분을 '즐기듯' 나 역시 '질투'를 즐기는지도 모를 일이다. 혹은 자극이 필요한 나 자신에게 스스로 회초리를 들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오늘도 내겐 까닭모를 질투가 찾아왔고, 그 기분을 풀어버림과 동시에 기록하고자 꺼버린 불을 켜고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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