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편가르기와 공격 대신 논리와 설득이 우리 사회엔 필요하다
5시간 32분. 김광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3일 국회에서 직권상정된 ‘테러방지법’에 반대하기 위해 시작된 필리버스터(무제한토론)를 진행한 시간이다. 23일 저녁 7시경 시작된 발언은 24일 새벽 1시를 넘겨서야 끝이 났고, 다음 발언자에게 차례가 넘겨졌다.
5시간 32분은 과거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의원시절 세웠던 5시간 19분을 넘긴 기록이다(글이 나가는 24일 오전 11시 현재, 은수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필리버스터는 7시간을 넘어서며 김광진 의원의 기록을 갱신했다).
필리버스터는 1973년에 사라졌다가 2012년 국회선진화법으로 부활했고, 이번 필리버스터는 부활한 이후 처음이다. 필리버스터는 본회의에서 법안 통과를 반대하기 위해 현역 재적의원의 3분의 1이상이 찬성하면 시작된다. 더 이상 발언할 의원이 없거나, 24시간 이후에 재적의원 5분의 3이상이 종료에 찬성하거나 회기가 끝나면 종료된다.
현재 새누리당 의원만으로는 5분의 3이상을 채울 수 없으며, 회기가 끝날 경우 법안은 통과되지 못한다. 드라마 <어셈블리>에서도 주인공 진상필 의원(정재영 분)이 25시간 동안 필리버스터를 이어 가다가 결국 회기가 종료되어 총리 임명안 통과를 저지한 모습을 그린 바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통’
김광진 의원의 필리버스터 발언은 최장기록 달성은 물론 5시간 동안 미리 준비한 연설문을 준비하지 않고 발언하면서도, 중복되는 내용 없이 몇 가지 자료를 통해 자신의 반대 논리를 명확히 설파한 것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이번 필리버스터가 가지는 의미는 그뿐만은 아니다. 바로 필리버스터를 통해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확인’시켜준 것이라는 점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토론과 논의 대신 강행, 무분별한 공격과 그를 통한 편 가르기로 곳곳에 상처를 남겨왔다. 대통령의 연설에는 질의응답 시간이 빠져있거나 미리 질문 내용과 순서까지 정해진 기자회견으로 ‘불통’이 남았다. 여당과 종편을 비롯한 몇몇 언론사들은 논리를 전하는 대신 ‘종북’과 같은 자극적인 언어를 통해 상대를 ‘나쁜 놈’, ‘우리 사회의 적’으로 구분 짓기에 바빴다. 그 과정에서 남은 건 상호 적개심과 불신이었고, 우리 사회에 필요한 논리와 개개인의 다양한 의견들은 사라지고 말았다.
새누리당이 정말로 법안통과를 원한다면 국회 본회의장을 벗어나서 ‘야당 의원들이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거나 ‘정상적인 국회 진행을 막는다’와 같은 기존의 단순한 ‘공격’방식으로 몰아세울 것이 아니라, 필리버스터에 직접 참가해 왜 법안이 통과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조목조목 설득을 해야 할 것이다.
필리버스터가 가져온 변화는 바로 그 지점이다. 기존처럼 ‘몸싸움’만으로는 국민에게 ‘여야의 차이’를 보여주기도, 그 안의 논리를 보여주기도 어렵지만, 한쪽이 감정적 공격을 멈추고 논리로 시작한 이상 다른 한쪽도 그에 따라와야 하는 모습으로 만들어진다.
필리버스터 잇는 의원을 응원합니다
단순한 신변잡기 공격과 편 가르기는 논의를 사라지게 했지만 필리버스터는 국민들에게 ‘야당에서는 지금 자신들의 논리를 정당한 절차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것은 우리 사회에게 다시 ‘합의를 위해서는 우리 모두의 논의와 설득의 과정이 더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필리버스터가 적개심과 편 가르기를 낳을 뿐인 그간의 ‘조잡하고 추한’ 방식 대신 서로의 생각을 논의한 뒤, 국민에게 묻고 결정하는 과정의 본보기를 만드는 계기가 되길 기원한다. 필리버스터를 잇는 의원들을 응원하는 이유다.
응답해야 할 것은 1997, 1994, 1988과 같은 과거가 아니다. 응답해야 할 것은 지금 우리 사회 눈앞에 놓인 현안들이다. 그 현안들은 우리에게 ‘지금 너희는 어느 사회로 나아갈 것이냐’를 끊임없이 묻고 응답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번 새벽, 이 물음에 대해 김광진·문병호·은수미 의원은 필리버스터로 응답했다. 동시에 우리사회에 43년만에 부활한 필리버스터에 응답하라고 요구하는 듯하다. 우리가 내려야 할 결정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번 필리버스터에서 나온 세 의원의 15시간이 넘는 발언들이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 사회는 ‘감정 싸움’과 단순한 ‘규정 짓기’ 대신 ‘논리에 근거한 언어’로 응답해야 한다.
*이 글은 고함20(www.goham20.com)과 오마이뉴스(www.ohmynews.com)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