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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효훈 Apr 03. 2023

살고 싶다는 마음, 스즈메의 문단속

허무한 삶, 죽음이 곁에 있는 삶 속에서 내일을 그리는 일

이 글은 <스즈메의 문단속>(2023)에 더해 <너의 이름은>(2017), <날씨의 아이>(2019)의 스포일러를 다루고 있습니다. 해당 영화의 내용을 자세히 알고 싶지 않다면, 글을 읽지 않으시는 걸 권장합니다.



(OST와 함께!)



'재난 3부작'이 전하는 이야기


<스즈메의 문단속>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재난 3부작>으로 명명되는 작품의 마지막으로 여겨진다. 앞선 <너의 이름은>이 혜성 충돌을, <날씨의 아이>가 폭우-홍수를 다뤘다면 <스즈메의 문단속>은 명백하게 지진을 다룬다. 이 세 편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살짝 다르다.


<너의 이름은>이 다루는 메시지는 '잊지 말자'에 가깝다. 이름을 잊게 되는 주인공이 상대의 이름을 찾게 되는 여정을 그렸다. 그 메시지는 사실 '재난 피해자, 재난을 잊지 말자'와 같은 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날씨의 아이>는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할 수는 없다'라고 말한다. 히나를 희생하면 도쿄는 맑아질 수 있고, 수백년 간 그렇게 '날씨의 아이'가 희생되어 왔지만 호다카는 '날씨 따위는 미쳐도 된다, 이 세계는 원래 미쳐 있었으니까'라며 히나를 선택한다. 도쿄는 결국 물에 잠기지만 작품은 그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날씨의 아이>가 말하는 건, 재난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물에 잠겨버린 도쿄를 사람들은 외면할 수 없다. 재난은 외면할 수 없다. <너의 이름은>에서 혜성 충돌로 사라진 이토모리는 잊혀질 수 있지만, 매일 같이 비가 오는 도쿄는 잊을 수 없다. <날씨의 아이>는 재난을 받아들이라는 선언에 가깝다. 우리는 외면할 수 없고, 이를 막기 위해 누군가를 희생하는 식으로 우리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다. 



물론 실제 재난은 '재난 3부작'의 어떤 작품들과도 다르게, 개인의 희생만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거야'라는 식으로 '누군가는 받아들여야 할 일'이라고 치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 모두는, 똑같이 재난을 받아들여야 한다. 히나를 잃은 호다카의 재난만으로 세상은 굴러갈 수 없다. 그 누구도 잃지 않은 채, 우리는 똑같이 그 재난을 나눠 가져야 한다. 그렇게 재난을 잊지 말고 함께 살아가야 한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그 다음을 다룬다. <너의 이름은>에서 재난을 잊지 말 것, <날씨의 아이>에서 재난을 받아들일 것을 전했다면 <스즈메의 문단속>은 재난 이후의 삶을 다룬다. 재난을 겪은 삶, 재난을 겪은 사람들이 이어가는 삶, 그들과 함께하는 우리의 삶, 그리고 삶, 그 자체.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소타는 마지막에 평소의 주문에 더해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외친다.


삶이 허무한 것쯤은 알고 있고, 죽음이 언제나 삶 곁에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좀 더 살고 싶습니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이 '삶에 대한 의지'를 다룬다. '삶에 대한 의지'를 다루며 재난 피해자를 바라보는 우리들에게 재난의 파괴력을 상기시키고, 실제 재난을 겪은 이들에게 위로를 건넨다(물론 받아들이기 어려운 트라우마를 폭발시키는 작업일 수도 있을 것이다). <너의 이름은>은 재난을 막았고, <날씨의 아이>는 재난이 일상이 된 사회를 그린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재난 이후의 사람을 그린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얼핏 보면 <너의 이름은>과 마찬가지로 재난을 막는 이야기지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재난을 겪은 우리'에서 출발한다.


<너의 이름은>과 <날씨의 아이>, 그리고 <스즈메의 문단속>은 그런 면에서 시계열적인 순서라고 볼 수도 있고, 메시지적으로도 순서를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스즈메의 문단속>이 그리는 재난은 '재난 3부작'이 다루고자 했던 2011년 3월 11일의 동일본 대지진을 정확하게 그리고 있고, 스즈메가 그 재난의 피해자로 등장한다는 점에서부터 이미 신카이 마코토는 <스즈메의 문단속>에서야 가장 다루고 싶었던 메시지를 전했던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따라오는 강력한 질문, 개연성


<너의 이름은>과 <날씨의 아이>에서도 따라붙었던 이야기지만, <스즈메의 문단속>은 더 강하게 반발을 사는 지점이 바로 '개연성'이다. 스즈메는 왜 소타를 따라가는가. 순전히 잘생겼다는 이유만으로? 어떻게 큐슈에 사는 여고생이 도쿄에 이르는 지점까지 대장정을 할 수 있는지,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스즈메에게 그렇게 친절한지, 스즈메는 본지 며칠밖에 되지 않은 소타를 위해 왜 목숨을 버리려고 하는지, 스즈메는 왜 단 한번도 이모나 어른에게 설명을 하지 않는지... 



개인적으로는 그 개연성에 대해 조금도 의심을 품지 않고 영화를 봤다. '그럴 법한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애초에 사람이 의자로 변하고 고양이가 말을 하고 문을 닫으면 지진이 나지 않는 세계관을 설정한 영화가 아닌가. 물론 그것만이 원인은 아니다(게다가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인물들의 행동이 개연성이 없어도 된다는 이야기는 설득력이 없기도 하다). 다만 최소한 이 영화가 주고자 하는 목적에는 개연성이 별로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는 느낌을 받았기에 자연스럽게 개연성을 덜 신경쓴 것이 아닐까.


일단 '스즈메'의 행동이 개인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선에 있지 않다. 애초에 수많은 영화의 캐릭터들 중에서 '나라도 그랬겠다'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결국 영화는 대부분 특정한 사건을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개연성은 '그래, 그럴 만하네'의 수준이 된다. 그리고 내게는 스즈메의 행동이 '그럴 만 하네'에 가까웠다. 자신이 문을 여는 바람에 지진이 나는 것을 목도하고, 그 지진을 막는 사람이 의자가 되어버렸다. 문이 열렸기 때문에 이제 일본 열도 곳곳에서 지진이 날텐데, 그걸 막을 사람은 의자가 되버린 신세다. 거기서 소타에게 '그래요, 그럼 전 학생이니까 여기서 돌아가서 공부나 열심히 해야겠어요'라고 할 수 있을까?


도쿄에서의 사건도 스즈메의 캐릭터를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스즈메는 결국 도쿄의 인명 피해를 막기 위해 소타를 스스로 요석으로 꽂아 넣었다. 자기 스스로 누군가를(정확히는 문을 닫고 재난을 막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 아니라, 교사가 되고 싶어하는 하나의 '인간'을) 죽음으로 희생시켰다. 소타의 할아버지 말처럼, 그것이 '모든 것을 다 잊고, 입을 다물만한' 일인가? '이제 소타가 요석이 되었으니 나는 돌아가야지'라고 할 수 있는 일인가?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최소한 스즈메는 그런 캐릭터가 아니다.



죽는 건 조금도 두렵지 않아요.
죽는 건 어차피 운에 달린 일일 뿐이에요.


스즈메의 행동이 이해가 간다면


스즈메는 동일본 대지진의 피해자였고, 삶의 모든 것이었던 어머니를 잃었다.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사건을 겪고 나면 사람은 '허무함'에 빠진다. 살아 있는 건 운일 뿐, 그에는 어떤 의미도 가치도 없다. 살아 있을 자격도, 죽어야 할 자격도 이 세상에는 없다. 스즈메는 본인이 죽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재난을 겪고, 끊임없이 '생'에 대해서 물었을 것이다. 나는 왜 살고 있는가? 내 삶의 이유는 무엇인가? 과연 내가 살아갈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


우리는 수많은 작품에서, 실제의 역사에서, 자신의 죽음을 걸고 숭고한 행위를 하는 이들을 본다. 그건 위험한 지역에 몸을 던지는 투사이기도 하고, 목소리를 내는 용기이기도 하다. 죽음이 아니더라도, 삶 전체에서 자신은 빈곤한 삶을 살며 모든 돈을 기부를 하는 이들도 본다. 그들에게 삶이란 무엇이고 희생이란 무엇인가? 그들은 '내 목숨을 희생할 수는 없지'라고 생각했을까? 그들에겐 자신의 목숨을 바쳐 자신 삶의 의미를 완성할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독립운동일 수도 있겠고, 가족을 지키는 것일 수도 있겠다. 


스즈메에게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자신'보다, '삶의 의미를 쫓고 있는' 소타의 삶이 더 가치있었으리라 생각할 수도 있다. 소타는 실제로 재난을 막는 사람이고, 훌륭한 선생님이 될 수 있는 상냥한 사람이다. 사실 그런 계산법을 떠나, 스즈메는 본인 스스로 누군가를 희생시켰다는 것이 참을 수 없는 현실이었을 것이다.  물론 재난에서 엄마가 스즈메 대신 희생한 것은 아닐지라도, 스즈메에게는 '더 이상 소중한 사람을 잃을 수 없다'란 생각이 박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스즈메에게 '내 손으로 누군가를 잃게 만들었다'는 행위가 과연 잊고 살아갈만한 일이었을까?



스즈메는 이모를 본다. 자신의 삶을 위해 희생한 삶. 더할나위 없는 사랑이고 감사함이지만, 스즈메에겐 동시의 부담이 되는 이모의 삶. 이모와 스즈메는 서로의 삶만큼의 무게를 안고 산다. 스즈메는 늘 스스로 물었을 것이다. '이모에게 내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내가 누군가의 삶을 걸만큼의 삶일까?'.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는 끊임없이 묻는다. '나는 왜 살아남았나요?', '왜 누군가는 죽어야 했고, 왜 나는 살아야 했나요?' 그 질문에 정답은 없다. 답은 오로지 '그런 건 없다' 뿐이다. 삶은 원래 의미가 없고, 허무할 뿐이다. 스즈메는 그걸 조금 일찍 깨달았던 사람에 불과하다.



주인공들은 왜 늘 10대일까


거기에 더해, 신카이 마코토가 주인공으로 늘 '10대'를 그리는 것에도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10대 시절 우리는 우리가 마주한 문제, 그 순간의 감정이 가장 중요한 시기를 겪는다. 돌이켜보면 그렇게까지 믿거나 행동한 일이 아니었겠지만, 그 시절의 나에겐 그랬다. 10대란 그런 시기다. 20대 후반의 취업준비생이 소타를 만나 여행을 했더라면 그는 스즈메와 다르게 행동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10대는, 그렇다(고 소비된다). 10대의 삶엔 어른들의 사정이 중요하지 않다. '개연성'이라는 이름의 '현실'을 단순히 '어른들의 사정'으로 치부할 수 있는 10대는 순수하다. 신카이 마코토는 그 순수함을 좋아한다고, 꾸준히 말해오는 듯 하다. 


그렇기에 <너의 이름은>에서 타키는 미츠하를 찾는 여행을 떠나서 '없어진 마을'을 눈 앞에 보고서도 돌아가지 않는다. 그렇기에 <날씨의 아이>에서 호다카는 도쿄를 버리고 히나를 택한다. 그렇기에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스즈메는 소타 대신 요석이 될 결심을 한다. 찢어진 옷, 맨발의 자신을 보고 수군거리는 사람들 속에서도, 자신을 믿지 않는 어른(이모와 소타의 친구 세리자와)들 앞에서도 조금도 굽히지 않고 당당하다. 스즈메에겐 부끄러움, 두려움이 중요하지 않다. 드디어 삶의 의미를 찾았고, 드디어 자신이 목숨을 걸고서라도 마주하고 싶은 세상을 만났다. 설명해봤자 '현실'을 들이대며 '일단 학교부터 돌아와라'라고 할 어른들에게 설명을 할 이유도, 가치도 느끼지 못한다. 


나는 오히려 이렇게 생각했다. 신카이 마코토는 '개연성'을 말하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 것만 같다. '왜요? 멋지지 않나요? 그 순수함?' 물론 좋게 말하면 순수함이고 나쁘게 말하면 지루함이자 평면성이다. 예를 들어 <초속5센티미터>의 주인공은 한없이 지루했다. 또한, 조금의 현실적인 고뇌도 없이 마치 준비된 '토지시'인양 달려드는 스즈메는 어찌나 평면적인 인물로 보이는가(물론 난 실제로 복합적인 인물인 스즈메를, 감독이 굳이 설명하고 싶지 않았기에 평면적으로 보여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신카이 마코토의 관심사는 그 뒤에 있는 듯 하다. <날씨의 아이>에서 호다카가 왜 마을을 떠나 가출을 했는지 설명하지 않듯이, 그는 언제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더 중요한 사람이다.




개연성은 일부러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실, 그는 어느정도 개연성을 숨겨두기도 했다. 그게 전면에 배치되지 않았기에 '설명해야만 하는 개연성은 개연성이 아니다'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난 더 그가 치고 있는 장난같다고 느꼈다. 예를 들어 스즈메는 단순히 소타가 잘생겼기 때문에 따라간 것이 아니다. 그날 아침 스즈메는 어린 시절 문 뒤편의 세계를 헤매는 자신의 기억이 담긴 꿈을 꾸었다. 그리고 미래를 보았던 그 장면에서, 고등학생 스즈메는 소타와 함께 있었다. 실루엣으로만 남겨진 소타를 어린 스즈메는 분명히 보았고, 그 날의 스즈메는 그 꿈을 다시 꾸었다. 스즈메는 소타에게 알 수 없는 이끌림을 느꼈을 것이다. 잘생김 뿐만이 아니라, '4살의 자신이 본 그 실루엣'에서부터. 그리고 소타에게 제대로 길을 알려주지 못했다거나, 위험한 곳으로 안내했다는 불안감도 있었겠지만, 신카이 마코토는 그 개연성을 택하지 않고 '잘생겼다...'라는 대사를 택했다. 


게다가 스즈메의 행동들에 개연성을 더해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책임감이 강한 아이라서, 보답받고는 못 견디는 성격이라서, 아니면 원래부터 모험심이 가득한 아이였어서. 단순히 소타를 좋아해서 요석이 된 게 아니라고. 자신이 요석을 뽑는 데서부터 시작한 일을 스스로가 결말을 맺어야겠다는 책임감에서 비롯된 선택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중간에 '맞아! 난 중요한 일을 하고 있어!'라고 외치기도 하지 않는가. 10대 시절, 내가 세상을 구하고 있는데라는 사실은 얼마나 사람의 눈을 멀게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 힌트들을 굳이 많이 드러내지 않았다. 난 이 모든 일이 의도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무엇을 위해? 그저 신카이 마코토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스즈메가 이런 애라서- 저런 애라서-라고 설명하면 오히려 메시지는 약해진다. 그가 전하고 싶은 건 개연성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왜 스즈메에게 모두가 친절한가요?


바로 이 지점이 그렇다. 가출 여고생에게 세상 사람들이 모두 친절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최소한 <날씨의 아이>에서 호다카가 겪는 어려움처럼, 차갑고 무서운 세상을 일부 보여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스즈메에게는 친절한 사람들 뿐이다. 물론 스즈메가 그들을 도와주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그들은 상냥하다. 왜일까? 그건, 스즈메가 하나의 '개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스즈메는 '아이언맨' 혹은 '배트맨'같은 단일 인물이 아니다. 스즈메는 결국 재난을 겪은 수많은 사람들을 상징한다.



스즈메에게 밥을 주고, 재워주고, 옷을 주고, 모자를 주는 사람들은 마치 재난을 겪은 이들을 돕는 사람들과 닮았다. 신카이 마코토가 전하고 싶었던 건, '재난을 겪은 사람들에게 친절한 세상'이다. 스즈메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될 수많은 피해자들이,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들을 마주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게다가 스즈메를 돕는 이들이 강자가 아니라는 점에서도 그 메시지는 한결 강해진다. 산사태로 학교를 잃은 또래 여고생, 혼자서 아이 둘을 키우는 싱글맘조차도 그들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재난 피해자를 돕는다. 


그렇기에 그들은 친절한 NPC에 그치고, 개연성은 사라진다. 하지만 그 모든 건 감독의 선택이다. 신카이 마코토는 이 영화를 통해 자신이 전하고픈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데에만 치중하고 있다. 그 메시지는 결국 하나다. '재난을 위로한다'는 형태로 드러나지만, 그 메시지는 위에서 말했듯 결국 '재난 이후의 삶'이다. 감독 인터뷰에서도 신카이 마코토는 '살고 싶은 그 마음이 희망'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의지와 다르게 찾아오는 재난 앞에서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무엇일까? 그 답은 곧 '살고 싶다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살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살아가야 한다. 재난 이후에도. 그게 신카이 마코토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아닐까.



살고 싶다는 마음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였던 소타가 '좀 더 살고 싶습니다'라고 말한다. '죽음이 두렵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스즈메는 재난을 겪고 한없이 울고 방황하는 자신을 보며 말한다.


나는 너의 내일이란다




부모를 잃고, 집을 잃고, 마을이 사라진 곳에서 삶의 의미를 잃은 어린 스즈메에게 '더 살아도 좋아', 이 고통을 안고 더 살아도 좋다라고 말하는 건 결국 스즈메 역시 '살고 싶다는 마음'을 전하는 행위가 된다. 고등학생 스즈메는 4살의 스즈메에게 '살고 싶다'는 희망을 건넨다. 고통스러운 지옥과 같은 오늘을 견디고, 내일을 맞이하자는 이야기. 재난 이후로 나아가자는 이야기. 일본 전역을 이동하는 여행 중 스즈메를 도와준 이들도 겪어낸 그것. 힘겨운 삶과 재난에 지지 않고 살자는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 다시 스즈메를 돕는다. '내일을 위해'.


그렇기에 스즈메가 거치는 도시들 역시 실제 재난의 피해를 보았던 지역으로 설정이 되었다. 에히메도, 고베도, 도쿄도 실제 재난을 겪었던 곳들이다.  과거 재난을 겪은 도시에 사는 이들. 그들이 재난을 겪은 스즈메에게 건네는 위로와 도움. 그 모든 걸 지나, '죽어도 좋다'고 외쳐왔던 스즈메가 마지막으로 건네는 메시지는 '죽어도 좋다'가 아니다. '내일'이다. 재난은 막을 수 없고,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안녕을 유지할 수 있지도 않다. 재난은 우리를 덮쳤고, 또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당장 우리 주변에도 재난을 겪는 이들이 있다. 그 모두에게 신카이 마코토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하나다. '우리에겐 내일이 있다. 살고 싶은 마음을 가지자'라는 것.


그렇기에 세리자와는 차를 멈추고 바라본 동일본대지진 지역에서 '경치가 좋다'고 말한다. 스즈메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재난을 겪었던 이곳을 어떻게 긍정적으로 볼 수가 있지?라는 의문이다. 하지만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재난을 겪었던 슬픔과 아픔 속에만 매몰될 것이 아니라고. 재난이 지나고 나면 우리에겐 내일이 있다고.



내일을 찾는다는 것


<너의 이름은>과 <날씨의 아이>에서 재난을 겪지 않은 이들에게 메시지를 전했다면,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그제서야 직설적으로 재난을 겪은 이들을 상대로 메시지를 던진다. '내일'이라는 단어를. '삶은 허무하고, 죽음은 내 곁에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조금 더 살고 싶습니다'라는 문장을. 그러기 위해 이모와 스즈메는 필연적으로 갈등한다. '조카를 위해 헌신하는 삶', '헌신에 부응하는 삶'을 사느라 스스로의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던 그들은 솔직한 마음을 꺼내놓고, 서로를 받아들인다. 이모는 '너는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구나'라고 말하고, 터만 남은 고향에서 '저 아이는 무엇을 하려는 걸까?'라고 묻는다. 



'삶의 의미'를 찾는 일만큼 중요한 일이 있을까?


재난의 기억을 검은 펜으로 울며 칠할 수밖에 없었던 아이가,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방황할 수밖에 없었던 아이가, '어차피 삶은 운에 따라 결정되는 것'을 굳게 믿고 있기에 그만큼 삶의 의미가 가벼워질 수밖에 없는 아이가, 스스로 '내일'이라는 희망을 꿈꾸게 될 의미를 찾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영화의 결말에서 스즈메는 비로소 재난을 딛고 내일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어리석어도 괜찮아, 추해도 괜찮아, 올바름의 저 너머에서 너와 손을 잡고 싶어


주제가 '스즈메'의 가사가 영화 엔딩을 장식할 때 다가오는 건 바로 '그 어떤 것'보다도 '너와 손을 잡고 싶다'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미 없어진 이토모리 마을을 찾아가는 어리석음도(너의 이름은), 피투성이의 맨발에 가출 여고생이라는 추함도(스즈메의 문단속), 도쿄 전부를 물에 잠기게 한다는 올바르지 않은 일도(날씨의 아이) 상관없다. 중요한 건 너와 손을 잡는 일이다. 여기서 너는 결국 재난을 겪은 우리다. 



우리는 그 모든 걸 딛고 살아야 한다


<스즈메의 문단속>을 보며 끊임없이 울었다. 어린 스즈메가 엄마를 찾는 장면이 가장 컸지만, 문단속을 하며 마주하는 마음을 묘사할 때도 울었다. '다녀올게'라고 문 밖을 나선 이들이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일. 그 안에 잠긴 수많은 '살고 싶다'는 마음. 살고 싶다는 마음에도 죽음을 겪은 이들, 아이러니하게도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를 묻게 되는 생존자들. 재난과 함께 잠겨버리고 잊혀져 버린 생명들, 마음들, 삶과 희망들. 그것을 마주할 때면 눈물이 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스즈메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밖에 없는 개인사가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나는 '사는 건 그저 운에 불과하다'는 스즈메의 대사에 100% 동감할 수밖에 없다. 왜 소중한 사람을 우리는 일찍 잃어야 하는가. 거기엔 어떤 기준도, 자격도 없다. 그 답 끝에 남은 건 허무함이고, 허무함은 내 삶을 뒤흔든다. 삶이 허무한 것이라면,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나 역시도 하루 아침에 죽을 수 있는 존재인데, 그럼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고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뉴스, 정치, 사건, 올바름, 그름, 돈과 명예, 권력, 힘, 기쁨과 슬픔, 이 모든 건 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죽으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 죽으면 무의미한 것에 불과한 것들 뿐인데. 우리의 삶은 고작 순식간에 사라질 것들에 의미를 걸 수밖에 없단 말인가? 나는 왜 살고 있고, 왜 내일을 맞이해야 하는가? 차라리 죽으면, 모든 것이 편하지 않을까? 사람을 잃고 나는 수많은 이들의 시선 속에서, 책임감과 부담 속에서 살고 있는데, 죽고 나면 이것조차 사라지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는 살아야 한다. 살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내일을 마주해야 한다. 삶은 원래 허무하고 죽음은 내 옆에서 함께 숨쉬고 있지만, 삶의 고통과 재난의 무게가 우리를 짓누르지만, 그래도 우리는 살아야 한다. <날씨의 아이>에서 사람들이 물에 잠긴 도쿄에서 살아가야 하듯이, 재난을 우리의 삶 속에 받아들이고 우리는 살아야 한다. 날씨의 아이를 바쳐 비를 막는 건 재난을 외면하는 일이다. 하지만 그걸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재난을 받아들이고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잊고, 외면하고, 문단속을 통해 막는다고 재난이 우리 삶과 유리되지는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재난을 겪고도 살고 싶다는 마음이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스즈메가 소타를 살리고 자신이 죽어도 좋다고 말할 때, 나는 그것이 '본지 며칠 됐다고 지 목숨을 걸어?'라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스즈메가 또 다시 누군가를 잃었을 때, 심지어 자신의 손으로 그를 희생시켰을 때, 스즈메가 겪을 감정을 생각하면 '죽음이 두렵더라도' 그렇게 외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때로는 살아 있는 것이 더 큰 고통이라고 느껴지는 순간이 우리에겐 찾아오니까. 그 순간 우리는 잠시나마 '차라리 죽고 싶다'고 말하게 되니까. 그런데 그 일을 통해 세상도 구할 수 있고, 내 삶의 의미도 찾을 수 있다면, 충분히 '소타'를 살리러 가는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모든 건, 사랑


사랑이 할 수 있는 일이 아직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직 있을까


<날씨의 아이> 주제가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대사는 끊임없이 묻는다. '사랑이 할 수 있는 일이 아직 있을까'라고. 삶에 대한 희망, 내일에 대한 희망은 결국 '사랑'이 된다. 살고 싶다는 마음은 결국 '사랑'에서 출발한다. 그렇기에 어쨌거나 <너의 이름은>부터 <스즈메의 문단속>에 이르기까지 사랑이라는 코드가 등장한다(물론 스즈메의 문단속은 그 고리가 남녀 주인공보다는 복잡하게 등장한다. 이모가 스즈메에게 주는 사랑, 스즈메에게 주는 친절한 이웃의 사랑과 같은 것들). 


제가 볼드모트로부터 살 수 있던 이유가, 고작... 사랑인가요?


내가 평생에 걸쳐 가장 사랑했던 작품 중 하나, <해리포터>는 지독하게 사랑을 다루는 작품이다. 덤블도어는 지루한 동화같은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해리가 살아남을 수 있던 이유도 사랑, 해리가 볼드모트를 이길 수밖에 없는 이유도 사랑, 마법부 미스터리 부서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힘 역시도 사랑, 마법을 뛰어넘는 유일한 힘, 사랑. 그건 사랑을 통해 만들어진 보호마법과 릴리에 대한 스네이프의 사랑, 어쨌거나 미워하면서도 버릴 수 없던 조카에 대한 페투니아의 사랑과 같은 직관적인 예시들도 있지만, 어쨌거나 <해리포터>에서 가장 강한 힘은 사랑이다. 



사랑이 할 수 있는 일은 아직 있다. 사랑은 '너를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만든다. 그러니 <너의 이름은>도, <날씨의 아이>도 주인공들은 우리가 보기에 '뭐 얼마나 봤다고 그렇게까지?'라고 하지만 상대를 잃지 않기 위해 세상을 건다. 


우리는 타임 플라이어, 시간을 치닫는 클라이머, 시간의 숨바꼭질 이젠 서로를 잃고 싶지 않아
- 너의 이름은 ost


너와 함께 길러온 사랑이니까 너와 함께가 아니라면 의미가 없어
-날씨의 아이 ost


너만 있다면, 너만 있다면 그 뒤에 이어지는 말들이 아무리 두려운 모습을 하고 있어도 이 두팔로 자, 껴안으러 갈 수 있어
-스즈메의 문단속 ost




사랑을 말하는 이유


사랑은 불가사의하다. 우리는 세 작품 속 인물들이 왜 서로에게 사랑에 빠지는지 완전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건 동시에 사랑의 본질이기도 하다. 사랑엔 물질적이고 절대적인 기준도 없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거릴만한 이유도 없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사랑은 누군가의 삶의 의미가 되고 내일이 되고 살고 싶다는 희망이 된다(사실, 난 세 작품의 캐릭터들 행동의 동기가 순전히 상대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해리포터>에서 스네이프는 오로지 릴리에 대한 사랑으로 평생을 헌신하고 희생한다. 그 사랑은 자신이 그토록 미워했던 원수의 아들인 해리포터를 지키는 동기가 된다. 덤블도어조차 '너도 해리를 아낀 적은 없지 않나'라고 묻는 상황에서, 스네이프는 자신의 패트로누스로 그 답을 보여준다. 나는 언제나(Always) 릴리를 사랑했고, 그것이 이 모든 일의 이유라고. 덤블도어가 '사랑이 가장 강력한 힘'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자신의 인생을 걸고 이중첩자라는 위험한 일을, 사람들에게 악역을 도맡고 원수의 아들을 지키는 일을 할 정도의 동기가 누군가에게 있단 말인가? 하지만 사랑은 그에 대한 대답이 된다. 


그렇기에 신카이 마코토의 '재난 3부작'의 작품들이 조금은 우스운 형태긴 하지만, '사랑'이라는 형태를 다룬다고 생각한다. 재난을 기억하는 일도, 재난을 받아들이는 일도, 재난을 딛고 내일을 그리는 일도, 모두 사랑에서부터 출발한다. 서로를 아끼는 마음. 서로를 위하는 마음. 비현실적이고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인 일을 하게 하는 마음. 재난을 겪은 이를 안아줄 수 있는 마음. 사람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 사람을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 그 마음에서 우리는 시작할 수 있다.




우리는 영화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바랄까


<스즈메의 문단속>이 나쁜 평가가 없을 수는 없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느샌가부터 나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영화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 출발점은 바로 <라라랜드>였다. 나는 라라랜드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주인공들의 행동도, 이해가 가지 않는 모습을 대책없이 포장하는 영화의 분위기도, 그 모든 걸 찬양하는 사람들의 반응도. 하지만 나는 <라라랜드>의 오프닝을 사랑한다. 그거면 충분하다. 하나의 영화가 하나라도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면, 그건 의미가 있다. 물론 내가 그 의미를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영화를 보는 행위가 그런 것 아닐까. 


<탑 건 : 매버릭>을 두고 제국주의의 망령이라거나, 그저 오락 영화에 불과할 뿐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탑건>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헤어질 결심>의 주인공들,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헤어질 결심>은 영화예술의 정점을 경험하게 해주었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내게 어떤 영화보다도 강렬한 메시지를 줬다. 그럴 수밖에 없는 건, 감독이 거기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메시지를 위해 많은 걸 버렸다. 개연성도, 복잡한 캐릭터도, 상세한 설명도 버렸다. 하지만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포기한 모든 걸 활용했다.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굳이 일본 전설들이나 기호와 상징들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을까? 일본인들만 아는 내용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이 영화는 재난을 겪은 이들을 위한 영화이지, 일본 신화와 역사를 설명하는 영화가 아니다. 어떤 감독은 그걸 인류보편적인 것으로 바꿀 수도 있었겠지만, 그 모든 건 감독의 선택이고, 그에 따른 결과는 다른 길로 우리를 안내한다. 신카이 마코토가 이끌고자 했던 길은 '살고 싶다'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마음이고, 난 그 정도면 충분했다. 사실, 그게 이 영화에 대해 남길 수 있는 한 마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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