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엄마의 옷장인가?’
- 합리적인 소비를 추구하는 패션피플을 위한 엄마 옷장 속 아이템 100% 활용하기
언젠가 오래된 포켓 앨범 속 나와 동생들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다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지금 보아도 어색하지 않은 패션 센스 때문이다. 우리를 '꼬마 패피[1]'로 만든 주인공은 다름 아닌 우리 엄마, 안 여사다.
위로는 오빠, 밑으로는 남동생 사이에서 유일한 여자였던 엄마는 언뜻 들으면 공주처럼 귀하게 자랐을 외동딸이다. 한 살 위의 오빠한테서 물려받은 시커먼 남학생 교복, 관리하기에 편하다는 이유로 귀밑까지 바짝 깎아 자른 단발머리, 심지어 때가 탄다는 이유로 고무신조차 검은색만 신었다는 그녀의 칙칙했던(?) 과거를 모른다면 말이다. 뼛속까지 실용주의자인 아버지, 곧 나의 외할아버지는 그 시절 대부분의 부모가 그랬듯 검소하고 엄하게 자식을 키우셨다. 게다가 학자 타입이었던 외할아버지의 성정을 생각하면 딸이 소중하고 예쁠수록 외모를 꾸밀 시간에 책이라도 한 자 더 보라고 가르치셨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패션의 끼를 타고난 어린 여자아이에게 새카만 남자 교복은 창피함을 넘어 자존심에 스크레치가 날 일이었다. 학교에 가면 또래 여자아이들이 원색의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와서 자랑하는데, 자신은 오빠가 입다 물려준 무채색 옷만 한가득이라니! 안 여사는 어린 마음에 옷장 서랍을 열 때마다 서러워서 펑펑 울었다. 결국 외할아버지는 당시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교복이나 다름없었던 빨간색 실내화와 책가방을 한 세트 사주시며 딸의 서운함을 조금이나마 달래줄 수밖에 없었다.
비록 예쁜 옷은 안 사주셨지만, 외할아버지는 아끼는 딸에게 본인만의 방식으로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셨다. 누구든 본인이 노력한 만큼 이루는 것이지 능력에는 남녀 차이가 없다고 늘 말씀하셨다.
“너도 사내아이들과 똑같이 다 할 수 있다”
그런 가르침을 받고 자란 덕으로 안 여사는 학생 시절 늘 전교 1~2등을 놓치지 않았다고 한다. 외할아버지는 똑똑한 딸이 혹시라도 외모에 신경 쓰느라 공부를 소홀히 할까 봐 여자아이다운 차림을 하는 것을 그토록 못마땅해하셨던 것 같다. 다행히도 그 와중에 외할머니는 지혜롭게 딸의 편이 되어주었다.
안 여사가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외할머니께서 외할아버지 몰래 치마나 블라우스를 한두 장 사다 주셨다. 문제는 그 옷을 입고 등교를 하는 일이 거의 ‘007 작전’이었다는 것! 모처럼 '예쁜 옷'을 입은 모습을 외할아버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안 여사는 부모님이 거실에서 아침 식사를 하는 동안에 후다닥 옷을 갈아입고 도망치듯 집을 나섰다. 이른 아침부터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학교로 뛰어가는 조그만 여자아이의 함박웃음은 아마 한 겨울 입김에도 감춰지지 않았을 터였다.
이렇게 옷에 관해서라면 무조건 진심이었던 안 여사가 스무 살이 되던 해, 어느 한 날이라도 허투루 보낼 수 있었을까? 대학생이 되자 드디어 용돈 다운 용돈을 받게 된 안 여사는 점심을 굶고 차비를 아껴서 한 달을 꼬박 모은 뒤 당시 여대생 패션의 중심지였던 '이대 앞'에 등판했다. 지금 생각해도 선뜻 고르기 쉽지 않은 보라색 구두를 사기 위해서였다. 이제 다른 누구의 간섭도 없는 온전한 자신만의 옷장을 갖게 된 안 여사의 행보는 과감했고, 그녀의 옷장은 수많은 격동의 변화를 거치며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 오늘에 이르렀다. 직장에서 안 여사의 별명은 일찌감치 '베스트 드레서'였고, 이는 그녀에게 합당한 이름이자 자부심이었다. 그런 엄마는 나의 마땅한 자랑이기도 했다.
옷 잘 입는 엄마를 둔 덕분에 나는 패션만큼은 조기 교육을 받으며 자라왔다. 옷 자체를 좋아하고 잘 입고 싶은 욕망은 어쩌면 엄마한테서 물려받은 문화적 DNA라고도 말할 수 있다. 패션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일을 하는 삼십 대의 평범한 직장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옷은 꾸준히 나의 식지 않는 관심사 중 하나였고 나만의 취향이라 부를 만한 것을 형성하기까지 안 여사만큼이나 다양한 옷을 사모으고 탐닉해왔다.
그런데 한창 옷을 많이, 또 자주 샀던 이십 대 초반에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던 문제들이 요즘 들어 보이기 시작했다.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국내외 SPA 브랜드, 길게는 한 달에서 짧게는 일주일 단위로 타이트하게 돌아가는 신제품 사이클, 품절 대란이라는 광고 문구를 신호 삼아서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는 유명 브랜드의 카피 제품, 그 반짝 유행이 지나가고 산처럼 쌓일 철 지난 재고 더미. 결국은 상당수의 멀쩡한 옷이 유행 때문에 만들어졌다가 유행이 지나서 버려진다. 이렇게 필요 이상의 옷이 만들어지고 버려지는 전 과정에서 지구는 점점 병들어간다. 패션은 즐거움이지만 무분별한 생산과 소비의 굴레 안에서 그 한계는 분명하다. 언젠가는 그 즐거움에 상응하는 책임이 나와 내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앞에 닥쳐올 거라 생각하니 한 순간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런저런 이유로 지난 2-3년은 새 옷 사는 일에 선뜻 지갑이 열리지 않고 있던 차에 느닷없이 '코로나 19' 대유행이 닥쳤다. 공항에서 스케줄 근무를 하던 직업의 특성상 갑자기 줄어든 근무 일수와 함께 수입이 줄어든 것은 위기라 할 만했는데, 남아도는 시간을 어찌할까 궁리해보니 또 기회로 삼을 만한 일이기도 했다. 늘 마음 한 구석에 간직해둔 작가의 꿈을 실행에 옮기는 일 말이다. 내게 목 끝까지 찰랑찰랑한 이야깃거리는 바로 옷이었고 그 이야기의 가장 적합한 출발점은 안 여사의 옷장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1년 동안 옷 안 사기 + 엄마 옷장 털기’ 프로젝트는 반은 필요에 의해 나머지 반은 작가적 호기심으로, 용케도 처음 결심한 1년을 채웠다. 조금은 엉뚱하게 들리기도 하는 지난 1년 간의 실험은 무엇보다 넘치는 호기심에 비해 이야기꾼의 자질은 부족한 탓으로, 직접 경험하지 않은 일은 글로 쓰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안 여사를 설득하는 일은 예상대로 쉽지 않았다. 옷이라는 소재 특성상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이 꼭 필요했는데, 작가로서의 자아 못지않게 나와 내 가족의 프라이버시 또한 소중하기 때문에 옷장이나 얼굴이 직접적으로 나오면 안 되었다. 사진 속에 여우나 캥거루 얼굴이 등장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촬영은 두말할 것 없이 장소, 모델, 촬영, 조명, 편집, 협찬까지 전부 셀프였다. 그 와중에 촬영 때마다 “왜 자꾸 엄마 옷에 눈독을 들이냐”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어떤 날은 애교로 무마하고 또 어떤 날은 엄마가 출근한 사이 몰래 빌려다 입고 다시 가져다 놓은 적도 있었다. (물론 그러다 들킨 적도 있고!) 100%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시작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 절반이라도 안 여사의 암묵적인 허락과 혹은 넓은 아량이 아니었다면 이 프로젝트를 1년이나 끌고 오기란 힘들었을 것이다.
엄마의 옷장은 보물섬이었다. 예전엔 내 옷장을 채우기 바빠서 한 번도 엄마의 옷장을 열어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 프로젝트를 계기로 새삼스레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엄마 옷을 빌려 입은 거라고는 생각지 못할 정도로 핏이 좋은 기본 스웨터부터 내 옷장에선 한 번도 본 적 없는 하늘하늘한 실크 블라우스 그리고 요즘 유행하는 무드의 오버 사이즈 코트까지 잘 찾아보면 활용도 높은 아이템이 많았다. 내 옷장과 엄마 옷장은 생각보다 꽤 괜찮은 컬래버레이션을 이루었다. 그래서 마음먹었다. 이 재미난 일을 책으로 한 번 엮어보기로!
[1] 패피: 패션(fashion) 피플(people)의 줄임말. 옷을 좋아하고 잘 입는 사람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