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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엠마한 Jan 21. 2021

Step 0. 모든 일의 시작

'엄마 옷장 100% 활용하는 법'


  우연히 눈에 띈 블라우스 한 장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작년 겨울에 장만한 아이보리색 스커트를 올해는 조금 더 일찍 꺼내 입고 싶었다. 인조 가죽으로 만든 유연하면서도 무게감이 있는 롱스커트다. 한 겨울에는 짜임이 굵은 스웨터나 스웨트 셔츠와 같이 입었는데 초가을부터 입자면 넉넉하고 하늘하늘한 느낌의 상의가 어울릴 것 같았다.


  낮에는 아직 더워서 니트류는 패스, 바스락거리는 면 소재 셔츠는 매치했을 때 어딘지 모르게 답답해 보였다. 딱 마음에 드는 상의가 없어서 고민하며 집 안을 돌아다니는데 옷걸이에 무심하게 툭 걸려있는 블라우스가 눈에 들어왔다. 마침 하늘하늘한 실크 소재에 색감도 오묘한 초녹색이었다.


‘내 스커트랑 어울리는지… 한 번 걸쳐나 볼까?’


  들려오는 마음의 소리. 


  나의 숙련된 촉이 말하길 이건 입어 보나 마나 예쁠 게 뻔했지만 모든 건 추측이 아닌 검증이 필요한 법이니까. 말 그대로 한 번 걸쳐나 보려 했는데 거울 속의 모습이 원하던 실루엣에 딱 들어는 게 아닌가! 그러자 나머지 퍼즐을 맞춰야만 한다는 생각에 서랍에서 초커[1]를 꺼내어 목에 둘렀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대로 외출하더라도 손색이 없는 오랜만에 마음에 쏙 드는 차림이었다. 


  그렇게 한참 거울 앞에 서서 구경하다가 엄마 옷을 입고 있는 스스로가 신기해서 사진을 몇 장 찍었는데 곧 퇴근한 엄마가 들어왔다.


“엄마, 이 옷 너무 맘에 들어! 나, 가끔 빌려 입어도 돼?”


“그건 또 언제 찾아서 입어봤대? 하여튼… 나 닮아서 예쁜 건 잘 찾아. 가끔 빌려 입어.”


  핀잔을 주면서도 못 이기는 척 빌려 주는 안 여사였다. 옷을 아끼는 사람에겐 옷 하나하나에 다 스토리가 있다. 매장 안에 걸려 있는 수많은 옷 중에서 바로 ‘이 아이’를 데려온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빌려 입는 건 아무리 모녀간이라도 좀 눈치가 보인다.


  그래서 ‘엄마의 옷장’을 소재로 글을 써보자고 마음먹었을 때 쉽게 허락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솔직하게 얘기하고 양해를 구했던 게 통했는지 “옷을 새로 사달라는 것도 아닌데, 괜찮겠지.”라며 통 크게 허락해 준 안 여사였다. 그게... 아마도 일 년이나 계속될 줄은 몰랐겠지만 말이다. 


  어릴 적 엄마의 옷장은 화장대만큼이나 궁금한 로망의 세계였다.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소설 “빨간 머리 앤”의 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주인공 앤이 친구 다이애나와 마릴라 아주머니의 옷장에서 그녀의 젊었을 적 추억이 담긴 옷을 꺼내 입어보며 ‘숙녀 놀이’를 하는 모습은 내가 어릴 적 동생들을 데리고 장롱 곳곳을 탐험하던 기억과도 닮아있다. 물론 이번처럼 '공식적으로' 허락을 받고 하는 그런 일은 아니었지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면 이제는 마음에 드는 옷을 슬쩍 걸쳐보아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몸이 자랐다는 것뿐이지 않은가? 게다가 여자들이 많은 집에서는 자매나 모녀 사이에 서로 옷을 빌려 입거나 물려주거나 하는 일은 흔하다.


  자, 그러니 본격적인 탐험을 시작하기에 앞서 ‘다 커서 어린애처럼 옷장을 뒤지다니 이게 조금은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일말의 의심이 싹트는 나 자신을 위한 멘탈 정비는 이쯤 하두기로 하고. 이제, 준비되었으니 엄마의 옷장 앞으로 가서 문을 한 번 열어보자.


(달칵)


“…”

두구두구두구...!

[1] 초커(chocker) : 목에 꽉 끼는 목걸이나 넥타이 따위를 이르는 말. (출처: 네이버 패션전문자료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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