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린 것 받은 것 그리고 오래된 것의 팀워크
봄이 시작될 즈음에 애독하던 러아배 님의 유튜브 채널에서 옷 나눔 이벤트가 있었다. SS 트렌드를 소개하면서 러아배 님의 옷장에서 이미 있는 아이템 중 트렌드 키워드에 맞는 아이템을 선별해서 소개한 동시에 댓글로 원하는 아이템을 신청하면 구독자들에게 선물로 보내주는 이벤트였다. 내가 러아배 님 채널을 좋아했던 이유는 트렌드에 맞춰서 무작정 쇼핑하기 전에 이미 옷장에 있던 아이템 중 다시 꺼내 입을 수 있는 옷을 먼저 찾아본 후에 꼭 필요한 것들만 계획적으로 쇼핑하는 법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스스로와 한 약속을 지키느라 새 옷을 사지는 않지만 좋아하는 인플루언서가 이렇게 좋은 이벤트를 한다기에 애독자로서 꼭 참여하고 싶었다.
러아배 님이 소개한 옷들 중에서 내가 마음에 들었던 아이템은 자수가 정성스럽게 들어간 원피스였다. 올해 봄/여름에는 화려한 색감과 플라워 패턴, 자수와 레이스가 특징인 1940년대 빈티지 드레스가 유행이라고 하는데 내 옷장에는 아직 없는 아이템 중 하나였다. 자수와 장식으로 달린 수술 등이 화려해 보이긴 해도 검은색 바탕이라 흰 티셔츠에 받쳐 입고 재킷을 걸치면 데일리룩으로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옷을 받으면 꼭 후기를 작성해 올리겠노라고 댓글을 남겼는데 운이 좋게도 그게 당첨이 되었다. 그 후기를 3개월이 지난 오늘에서야 쓰게 되는 샘이다.
원래는 옷을 받자마자 머릿속에 생각해둔 대로 코디를 짜서 입고 사진도 찍어서 현장감 있는 후기를 적어 보고 싶었는데 막상 드레스를 입어보니 생각해 둔 매치가 썩 만족스럽지 못했다. 바스트 밑단의 주름 때문에 안에 받쳐 입은 티셔츠가 자꾸 울고, 봄에 날씨가 따뜻해지면 충분히 입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꺼내 둔 트렌치코트와 입으니 어두워보이기만 하고 잘 어울리지 않았다. 고민 끝에 마음에 드는 코디를 짤 수 있을 때까지는 후기도 잠시 보류하기로 했다.
드레스 자체는 참 예쁘고 품이 많이 들어간 옷이다. 특히 두 겹으로 된 스커트 자락의 레이스 단에 꼼꼼하게 들어간 샹들리에와 별 모양의 자수가 빈티지한 감성을 한껏 살렸다. 무릎을 살짝 덮는 길이의 A라인이라 원피스라서 귀엽기도 했다. 분명 예쁜 옷인데 적당한 활용법을 찾지 못해서 볼 때마다 고민이 되었다. 꼭 잘 코디해서 입고 싶었다.
그러다가 엄마 옷장에서 올리브 색의 니트를 발견했다. 짜임이 성긴 편이라 초여름까지는 시원하게 입을 수 있을 것 같았고 여유롭게 늘어지는 어깨선과 품이 넉넉한 소매는 요즘 트렌드를 딱 반영한 디자인이었다. 원피스 위에 니트를 레이어드 하면 원피스 안에 받쳐 입을 아이템에 대한 고민은 해결되는데 왜 그동안 이 생각을 못했던 건지, 내가 아무리 옷을 좋아해도 어떤 옷을 어떻게 응용해서 입을지는 늘 하더라도 부족한 새로운 고민의 영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휘뚜루마뚜루 활용하기 좋은 꼬임 벨트를 둘러서 허리선을 높게 잡아주면 편하지만 자칫 담요를 둘러 쓴 것처럼 부 해 보일 수 있는 옷에 라인을 만들어 줄 수 있다.
마무리는 예전에 압구정 #레이크넨 (Reike Nen) 샘플 세일할 때 장만한 회색 가죽 샌들이다. 따져보니 6년 전에 데려온 녀석이다. 굽도 여러 번 갈고 오래돼서 가죽 색깔도 조금 바랬는데 그건 또 그대로의 멋이 있어서 매년 버리지 못하고 꺼내 신게 된다. 좀 무겁고 투박한데 튼튼해서 오래 신었다. 다른 곳에서는 보지 못한 디자인이라 애착이 가기도 하고.
오늘은 안 여사에게 빌린 옷보다는 러아배 님에게 나눔 받은 옷과 오래 함께 했던 신발에 대해 더 신이 나서 자랑이 길어졌다. 그래도 이 셋 중 어느 하나라도 내게 없었다면 촬영 조차 하지 못했을 것 같아서 참 다행스러운 마음이다. 옷이 그냥 옷이던 때와 이렇게 하나하나 애정을 갖고 뜯어보게 되는 지금 나의 시선이 참 많이 바뀐 것을 느낀다. 이 여름이 끝날 때까지 나의 “1년 간 옷 안 사기”라는 도전은 계속될 테지만 그 이후에도 소비패턴이 아마 예전처럼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전 같았으면 새로 사고 싶은 옷으로 위시 리스트가 한가득이었을 텐데 - 물론 그 리스트는 내가 조금만 고삐를 늦추면 언제 또 불어날지 모르지만 - 이제는 오래 지키고 싶은 옷의 리스트가 조금씩 늘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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