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쟁여둔 에피소드 하나 풀고 갑니다...!
언젠가 엄마가 본인의 어린 시절 겪었던 일화를 하나 들려주었다. 그 추억 속의 원피스와 비슷한 물건을 구하게 된다면 쓰고 싶었던 이야기인데, 안타깝게도 이번 주의 나는 다른 방도가 없다. 아껴둔 소재를 털어야지.
막 눈이라도 내릴 것 같던 어느 겨울 저녁, 낡은 책상 위에 파란색 체크무늬 원피스가 한 벌 곱게 개어져 있다. 카라는 새하얗고 주름을 풍성하게 잡은 소매는 소설 속 빨간 머리 앤이 그렇게나 부러워하던 퍼프소매다. 그 원피스를 입고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는 어린 안 여사는 새 옷이 마음에 쏙 든다. 안 여사의 어머니, 그러니까 나의 외할머니가 큰 맘먹고 사다주신 새 옷이니 아주 아껴가며 입으리라고 다짐한다. 검소할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에 그래도 새 원피스를 입을 수 있는 건 교회의 크리스마스 예배 행사 때문이다. 한 달 동안 열심히 준비한 무대를 올리는 날로 다른 친구들도 이날만큼은 말쑥한 차림으로 단장하고 올 것이다. 어린 안 여사는 속으로 안도한다. ‘올해는 나도 다른 아이들 사이에서 어색하지 않겠지?’
그때 안 여사의 아버지, 나의 외할아버지가 안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잠깐의 정적이 따라 들어왔다.
외할아버지가 다시 방을 나갔을 때 어린 안 여사는 본능적으로 뭔가를 들킨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문 밖에서 부모님이 낮은 소리로 다투는 소리가 들린다. 잠시 후, 외할머니가 구두를 챙겨 신고 현관문을 나서는 모습을 본다.
“내가 생각할 때는 우리 아버지가 본인 눈에 예쁜 딸이 밖에 나가서 여러 사람들 눈 앞에까지 예쁜 건 싫으셨던 거 같아…. 과잉 보호지, 뭐.”
"와... 진짜 고구마 백만 개...! 옷 좀 입고 싶은 거 입는 게 뭐 큰 일이라고."
“그때 외할머니가 친했던 아주머니가 한 분이 있었는데 딸 이름이 미선이라고 아직도 기억 나. 그 집도 마침 미선이가 교회에 갈 때 입힐 새 옷을 하나 장만했는데 스커트였어. 그것도 아마 녹색 체크무늬였던 것 같아. 근데 외할머니가 그 집에 가서 미선이 스커트를 좀 달라고 하셨대. 내가 맘에 들어했던 그 원피스 하고 바꿔 준다고…."
"... 스커트랑 원피스를 바꿨다고?! 그래서 엄마는 어떻게 했어?"
"어떡하긴 뭘 어떡해, 서러워서 울었지. 그래도 별 수 없었어. 아버지가 워낙 반대하셨거든. “
가여운 어린 안 여사의 고통이 거기서 끝나지 않았으리라는 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껴가며 입어야지 생각했던 내 소중한 원피스를 친구가 입고 있는 모습을 크리스마스 예배 내내 지켜봐야 한다는 건 얼마나 가혹한지! 그 마음을 생각하면 밤사이 얼굴도 모르는 도둑이 들어서 훔쳐가 버리는 편이, 그래서 그 행방을 영영 모르는 편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그 ‘미선이’라는 친구분을 지금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한 번쯤은 물어보고 싶다. 그때 그 옷이 원래 친구의 옷이었다는 걸 알았는지, 알았다면 친구가 혹시라도 속상해하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는지, 속상한 마음을 알았다면 원래대로 다시 바꿔줄 생각은 없었는지, 마지막으로 그 원피스... 얼마나 예뻤는지. 이런 질문이 이제 와서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는, 수십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엄마가 기억하고 있는 일이라면 어린 마음에는 얼마나 상처가 되었을지…. 안타깝게도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렇게 기록으로 남기는 일 밖에는 없다.
언젠가 엄마의 추억 속에 그 원피스와 비슷한 걸 발견하게 된다면 꼭 사서 다시 엄마에게 돌려주고 싶다. 지금 입기에는 조금 촌스러울지 몰라도 그렇게라도 어린 안 여사의 마음을 풀어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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