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언제 떠나더라도 바캉스 룩은 딱 이 계절 한정이니까..!
이렇다 할 휴가 계획 없이 - 혹은 대부분의 계획을 취소한 채 - 보낸 지난여름에 비해, 올해는 조심스럽지만 미뤄둔 여행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어디라도 가볼까 생각 중인 분들이 꽤 있을 것이다. 본격적인 해외여행은 시기상조라서 비행기를 타고 타국의 하늘만 살짝 구경하고 돌아오는 '무착륙 관광 비행'이 오히려 인기다. 아무리 라운지와 면세품 쇼핑을 즐길 수 있다고 해도, 생각해보면 영종도까지 먼 길을 달려와서 입/출국장을 통과하는 수고스러움까지 기꺼이 감수하려는 그 심리는 참 알 듯 말 듯 신기하다. 공항 밥을 5년 넘게 먹으면서도 난생처음 들어보는 이런 패키지가 생각보다 잘 팔리는 걸 보면 여행의 욕구란 이토록 본질적인 문제인가 새삼 놀라기도 하고.
물론 억누르고 있는 해외여행의 욕구를 실현할 수만 있다면 남국의 더위를 불사하고라도 당장 떠나고 싶다는 여행 마니아가 내 주위에도 몇몇 있다. 그렇지만 어찌어찌해서 외국에 나갔다손 치더라도 걸리는 문제는 한 둘이 아니다. 아무래도 그곳의 분위기가 외국인에게 호의적이던 예전과는 같지 않으리라는 염려가 첫째, 해외에 다녀와서부터 2주 동안은 꼼짝없이 집안에 갇혀 있어야 하는 자가격리 조건이 둘째, 이제는 대한민국 내 나라 여권 하나만 달랑 들고서 입국장을 당당히 통과할 수 있던 그런 좋은 시절은 옛날 얘기라는 게 셋째다. (물론 이 모든 규제 사항이 하루가 멀다 하고 바뀌고 있으니 항공여행을 목전에 둔 사람이라면 출 도착지의 출입국 규정은 매일 한 번씩은 필수로 찾아보기를 추천한다.) 그러니 항공권과 호텔 예약 사이트를 뒤지기 이전에 네이버든 카카오톡이든 일단 앱부터 켜고 인근 병원에 남는 백신이 없을까 찾아보는 쪽이 현명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스친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휴가철은 피해서 휴가를 다녀오는 걸 선호하는 편이다. 휴가라면 마땅히 쉴 수 있어야 하는데 목적지까지 힘들게 가서 자연경관보다 사람 구경을 더 많이 하게 되는 상황이 내겐 오히려 더 스트레스라서다. 휴양지에 한창 사람이 몰리는 성수기에는 조용한 도심에서 평소대로 일하다가 늦여름부터 초겨울 사이에 적당한 날을 골라 열기가 가신 한적한 관광지의 여유를 - 플러스 가성비를 - 즐기다 오는 게 좋다. 작년에는 동생의 생일이 있는 5월에 짧은 호캉스를 다녀왔는데 극성수기로 넘어가기 전 미리 다녀오는 휴가 역시 괜찮은 선택이었다.
생각해보면 휴가를 일 년 중 원하는 때에 갈 수 있는지도 개인마다 사정이 다를 테니, 누군가에겐 썩 와닿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렇더라도 휴가를 언제 가더라도 여름 특유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바캉스룩을 즐길 수 있는 건 일 년 중 딱 석 달뿐이니 옷만큼은 시의적절하게 입어주고 싶은 게 옷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 그래서 준비한 오늘의 코디는 ‘금요일엔 바캉스 룩’이다. 일단 활동하기에 편하고 노출이 없어 출근 룩으로 손색이 없고 퇴근길에는 이 옷 그대로에 밀짚모자 하나 딱 쓰고 캐리어 하나 딱 끌면 바로 휴가를 떠나도 될 정도로 시원한 휴양지 룩. TPO를 따져보아도 멀티 플레이가 가능한 코디에 오랜만에 이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땀이 나도 시원한 바람만 불면 금방 마를 것 같은 산뜻한 네이비 컬러의 체크무늬 시스루 블라우스와 하늘색 캐미솔 세트는 엄마의 옷장에 걸려 있었다. 옷을 만든 사람의 의도대로라면 블라우스 잠가 입고 원래 달려 있던 제감으로 된 벨트를 허리에 둘러서 [1] 페플럼이 종 모양으로 퍼지는, 전체적으로 모래시계 모양이 되게끔 입어야 하겠지만, 내게는 옷이 한 치수 정도 크기 때문에 영락없이 얻어 입은 - 물론 얻어 입은, 아니 빌려 입은, 혹은 그냥 엄마 몰래 꺼내 입은 게 맞지만, 정말로 그렇게 보이고 싶은 건 아니니까 - 모양새이므로 첫 단추만 잠그거나 전부 오픈해서 카디건처럼 걸쳤다.
신경 쓴 부분이 페플럼만은 아니었다. 소매 끝은 카라 꽃 모양으로 디자인되어 있고 소매는 전체적으로 상하 방향의 셔링을 잡아 볼륨감을 주되 유치한 느낌은 들지 않은, 공들여 만든 옷임을 알 수 있었다. 여름만 되면 빈약한 팔 때문에 반소매나 민소매를 입을 때 항상 신경이 쓰였던 나로서는 신체적 단점을 이렇게 옷 자체의 디자인으로 자연스럽게 감출 수 있다는 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하의는 사진상으로는 차이가 잘 보이지 않지만, 지난주에 입었던 아이보리색 정장 바지보다 조금 더 얇은 화이트 팬츠다. 바지 밑단이 아래로 갈수록 아주 살짝만 퍼지는 느낌이라 편하고 밑단의 여유분이 충분한 상의와도 잘 어울렸다.
휴가며 여행 얘기를 길게 늘어놓긴 했지만, 실은 직장을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당분간은 본업에 집중할 생각이다. 적응할 것 투성이의 '경력직 뉴비(newbie)'에게 휴가는 아직 썩 와닿지 않은 얘기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옷으로 기분 정도는 내 볼 수 있는 거니까?!라고 생각하며 준비해보았다. 다만 이 글을 읽고 계신 독자 여러분의 편안하고 안전하며 무사한 여름 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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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페플럼(peplum): 블라우스나 재킷의 웨이스트 라인 아랫부분을 말하며, 턱이나 프릴을 잡아 러플 또는 플라운스에 사용할 때가 많다. (출처: 패션전문자료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