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넨원피스를 아우터로 입기
전에 언급한 바 있지만 최근 이직하게 되었다. 이직을 준비하면서 면접을 보러 다닌 회사들이 하나같이 다 강남에 있었기에 먼 출퇴근길을 어느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다. 덕분에 공항철도에서 9호선 급행열차로 환승하는 ‘프로 출퇴근러’의 민첩함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요즘이다. 오늘은 쉽지 않았던 이직을 도와주었던 친구를 소개할 생각이다.
작년 한 해, 코로나로 어떤 회사는 폭발적인 성장을, 어떤 회사는 무척이나 힘든 시간을 경험했다. 전 직장은 후자에 속했다. 공항일을 하며 나름의 보람을 느꼈으므로, 버티며 지내다 보면 곧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세상을 마주하며, 성장하고 싶은 욕망과 그저 외부의 상황이 나아지길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현실의 괴리는 점점 커졌다. 아직 젊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언제까지 내 인생의 운전대를 누군가에게 빼앗겨버린 듯한 기분으로 지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커리어 고민뿐만 아니라 당장 매달 통장에 들어오는 월급이 줄어들었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물론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더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은 오래 해왔던 일을 내려놓고 새로운 일에 도전해야 한다는 두려움을 결국 이겼다. 그렇게 이직을 마음먹고 5년 만에 토익 시험을 쳤다. 시험을 보기 바로 며칠 전 겨우내 사귀던 사람과 헤어졌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점수는 시험을 다시 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단지 시작에 불과했지만 그 일이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키웠던 것 같다. 오직 나만이 나를 구할 수 있다는 믿음. 그래서 다행이고, 그러니 흔들리지 말고 정한 길로 계속 나아가 보자는 믿음.
이력서를 새로 쓰고 구직 사이트를 매일 같이 드나든 지 한 달째,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기 시작했다. 막상 인사 담당자에게 연락이 오자 반가움도 잠시, 덜컥 겁이 났다. 사람이 필요해서 공고를 올리는 회사들은 대부분 스타트 업이었다. 공항에서 정석대로 일해온 사람을 면접까지 불렀을 때는, 어느 정도의 기준은 충족해서였겠지만 과연 나라는 사람이 전혀 다른 업계에서 일할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그들에게 내가 동료로 같이 일하고 싶을 정도의 확신을 줄 수 있을까?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얻은 이 기회를 꼭 잡고 싶었다. 예상 질문 리스트를 작성하고 나니 자려고 누워서도 면접관에게 할 대답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라는 사람을 그들의 기억에 또렷하게 남기고 싶었고, 적어도 뻔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면접 하루 전 날, 면접 복장을 고르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빨간 바지를 꺼내어 입어 보았다. 말 그대로 선명한 빨간색이라서 좋아하는데도 자주는 못 입었던 옷이다.
'면접에 빨간 바지를 입고 가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 흔치는 않을 것이다. 그 바지는 색 자체로는 튀었지만 내 피부톤과 잘 어울리고 편안했다. 빨간 바지 위에 같은 빨간색의 레터링이 깔끔하게 들어간 크림색 티셔츠를 입고 그 위에 단정한 베이지색 재킷을 걸친 거울 속의 내 모습은 밝고 자신감 있어 보였다. 전혀 다른 업계로 이직을 선택하면서, 내가 가장 깨고 싶었던 건 정석대로 주어진 일, 정해진 일만 하는 사람일 거라는 이미지였다. 해야 할 일을 능동적으로 찾아서 하는 사람, 다양하게 변화하는 업무환경에 유연하게 적응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부각하고 싶었다. 자신만의 개성은 있으되 팀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그런 사람 말이다. 빨간 바지로 완성한 나만의 면접 복장은 그런 내 의지를 잘 드러내 주는 옷이었다.
역시나 내 옷차림이 당시 면접관이었던, 지금의 상사분들 뇌리에 강렬하게 남긴 한 모양이다. 나중에 회사에 빨간 바지를 입고 갔더니 “어? 대리님, 이거 면접날 입었던 그 옷 맞죠?” 하면서 알아보는 과장님도 있었다. 최종면접까지 갔다가 아쉽게 함께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연락을 준, 또 다른 회사에서도 ‘빨간 바지를 입고 오셔서 그런지 옷차림이 아주 산뜻하다’는 칭찬을 듣기도 했다. 둘 다 패션회사는 아니지만 확실히 면접에서만큼은 빨간 바지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더 있다. 한창 면접 보러 다닐 때에는 일부러 말하지 않고 있다가 합격한 다음에야 가족들에게 이직 소식을 전했을 때, 가만히 듣고 있던 안 여사가 나에게 한 첫 질문이 뭐였냐면,
“근데, 너 면접 볼 때는 뭘 입고 갔니?”
빨간 바지에 베이지색 재킷을 입고 갔다고 대답하자, 엄마는 “그랬구나, 잘했네?’ 하고는 끝. 보통은 넘는 안 여사의 반응, 역시 그 엄마에 그 딸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간결한 문답이었다.
오늘은 그런 엄마의 옷장에서 빌린 카키색 리넨 원피스를 아우터로 활용해서 한여름에도 즐길 수 있는 빨간 바지 룩을 준비해봤다. 빨간색이 여름에는 더워 보일 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렇게 강렬한 원색은 흰색, 검은색, 회색 등 무채색과 코디하기 쉽고 같이 있으면 대비되는 효과를 주어 더 산뜻해 보인다. 특히 사진 찍으면 확실히 알 수 있다. 봄엔 티셔츠와 재킷으로, 여름엔 슬리브리스 탑에 리넨 소재 아우터로 시원하고 편안하게 스타일링했다. 원피스를 아우터로 활용한 이유는 원래 원피스로 입기엔 옷이 좀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덕분에 옷 하나의 여러 쓰임새를 발견하고 빨간 바지와의 조화도 생각해 낼 수 있었기에 썩 괜찮은 선택이었다.
촬영을 하다 보니 데님 소재와도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바지만 청치마로 갈아입고 몇 컷 더 찍어보았다. 라이트 한 색감에 군데군데 헤지고 올이 풀린 디테일이 멋스러운 이 청치마는 딱 여름 한정으로 작년부터 입었던 나의 애장품 중 하나다. 생각대로 카키색의 리넨 아우터와 편안하게 잘 어우러져서 이렇게 입고 당장 어디든 놀러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휴가 계획들은 다들 세우셨나요? 나만 아직 예약 전인가??)
이제 한 번의 포스팅만을 남겨두고 있어서 조금은 시원섭섭한 마음이다. 그전에 일단은 다음엔 또 무슨 얘길 할지부터 고민해야 한다. 어떨 때는 그냥 당장 눈앞에 놓인 일에 집중하는 것 외에 더 좋은 선택이 없기도 하다. 사실 나는 이제부터 다음 주간 회의 때 발표할 자료를 만들어야 한다. 하하하.. 그럼, 다음 달에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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