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다른방식으로 보기’ (파트2)
<파트2>
4.저자의 일관된 태도에서 오는 주장의 설득력
이 책의 설득력은 문장끼리의 연결성 혹은 적절한 근거의 측면보다는, 이 책이 지니고 있는 일관된 태도에서 두드러진다. 번역 과정에서 비교적 매끄럽지 않게 해석이 되면서 문장끼리의 연결성은 조금 떨어졌지만, 책 속에서 화자가 유지하고 있는 일관된 태도는 독자를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기존 관념과 분리되어, 철저하게 ‘보는 행위’를 통해 그림을 분석해보자는 저자의 태도는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에서도 드러난다. 책 속에서 삽화를 삽입하는 방식은 이 그림 자체의 정보를 전달하려는 의도로 사용되지 않고, 그저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해줄만한 ‘이미지’로서 사용된다. 그래서인지 그는 해당 그림 도판의 정보를 지워놓거나, 잘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배치해놓는다. 그가 새로운 방식을 제시한다 주장하며 관습적인 방식으로 그림의 정보를 적어 놓았다면 독자들은 배신감을 느꼈겠지만, 내용과 일치하는 형식 또한 사용하는 그의 태도는 독자들을 설득하는 힘을 만들어내고 있다.
또한, 화자의 사상이나 믿음에서 오는 일관된 태도도 이 책 내에서 설득력을 만들어낸다. 맨 처음에 이 책을 읽으면 각 챕터 사이의 연결성을 파악하기 어렵지만, 여러 번 읽다보면 각 챕터 사이의 연결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약자에 대한 관심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약자로 대우 받던 쪽에서 그림을 설명한다. 자본주의 혹은 계급 사회에서 약자로 대우받던 노동자 혹은 시민층의 입장을 고려하고, 지배 계급의 문제점을 비판한다. 남녀 관계에서도 오랫동안 남성에 의해 관리되던 여성의 입장을 고려하고 있다. 이렇게 기존의 보수적인 접근 방식을 벗어나, 약자에 관심을 가지는 일관적인 비평적 태도 또한 독자들의 거부감을 없애는 역할을 한다.
5.책의 성과
1)케네스 클라크와 비교한 전통적 사고에 대한 대항
존 버거는 전통적인 미술사학자들의 아카데믹하고 보수적인 방식에 이의를 제기했는데, 케네스 클라크와의 비교를 통해 그의 비평의 파격성을 설명할 수 있다. 케네스 클라크는 존 버거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영국의 유명 미술 비평가이다. 미술 평론가 정연심에 따르면, 케네스 클라크와 같은 예술학자들은 “서구 예술의 성취와 미적가치를 높게 평가하면서 그 과정에서 일련의 거장들의 작업을 중심으로 예술이라는 ‘거대서사’를 구현해내는 주류적인 입장을 택했지만”2), 존버거는 그 반대의 입장을 택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는 서구 예술에 우호적인 태도보다는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강자가 아닌 약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비평을 했다.
클라크는 전통적인 시선에서 누드화, 특히 여성의 누드화를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클라크는 그의 저서 <누드의 미술사>에서 알몸과 누드의 차이점을 이야기하며 누드는 회화가 성취해낸 하나의 보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누드는 ‘몸의 아름다움’을 포현한 것이라는 클라크의 말은 많은 화가들에게 누드는 외설이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주며 그들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누드가 외설이 아니라는 클라크의 말은 논리적으로 납득이 가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가 그저 예술의 한 형식으로만 누드화를 파악했을뿐 사회적인 관점에서 누드가 어떻게 정의되는지에 대한 문제를 빼먹었다는 것이다. 케네스 클라크의 주류적인 관점에서, 누드 속에 나오는 여성들은 남성들이 바라보는 성녀 혹은 창녀와 같은 이분법적인 방식으로 조작되고 신비화된다. 하지만 저자는 그렇게 여성을 신비화하는 남성들의 시선, 즉 기존의 관념이 얼마나 폭력적인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2)진보적인 주제 선정
특히 주제 선정 측면에서, 1970년대의 백인남성, 즉 약자와는 거리가 먼 입장에 있던 존 버거가 페미니즘에 대한 목소리를 낸 것은 매우 흥미로운 점으로 삼을 수 있다. 현재 우리에게 페미니즘이란 단어는 매우 익숙한 단어이지만, 막 여성의 권리에 대한 물결이 일고 있었던 1970년대 당시에 페미니즘은 생소한 주제였다. 특히 운동을 주도하는 진보적인 성격의 사람들과는 달리 이미 미술계를 차지하고 있던 보수적인 권력층에게 이 주제는 달갑게 여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존 버거는 젠더와 여성의 대상화에 대한 주제를 전통적인 유화, 그리고 현시대의 광고와 엮으며 그 문제점을 제기했고, 이는 상당히 파격적인 행보로 볼 수 있다. 또한 현시대에도 제기되고 있는 ‘과연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가?’라는 민감한 문제의 측면에서, 존버거와 같은 남성이 페미니즘에 대한 목소리를 내는 것은 당대의 상황으로 봤을 때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많은 변질된 페미니즘 중 여성 중심주의 페미니즘은 남성을 혐오하고 여성의 권리에 대한 문제는 오직 당사자인 여성만이 낼 수 있다고 남성들을 배척한다. 하지만 휴머니스트 페미니즘은 다르다. 더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를 위해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휴머니스트 페미니즘은 남성과 여성을 동료라는 연대의 개념에서 본다. 즉, 올바른 페미니즘을
만들어가는 데에는 성별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존 스튜어트 밀과 같이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남성 페미니스트로서의 존 버거의 주장은 휴머니스트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존버거는 마르크스주의적 사상을 바탕으로 글을 쓰는 작가였기 때문에 저자의 사상과 책의 주제를 연관지어 볼 수 있는데, 알아두어야 할 점은 그는 결코 교조주의적인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마르크스주의란 극단적인 정치적 공산주의에 대한 지향이 아니라 약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지향을 의미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자신의 관심이 필요한 노동자 인권이나 약자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5장과 7장의 주제에서도 그의 지향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그림을 주로 향유하던 지배계급의 시선에 맞춰있던 보수적 비평을 탈피하고, 약자의 입장을 생각하는 비평을 제시한다. 또한 그가 평소에 약자에 계급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정신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그들을 지원해주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책에 나타난 그의 태도가 거짓이 아닌 진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3) 예술사회학적 관점의 사용
르네상스 이후의 예술은 독자적인 학문 분야로 인정받으면서 사회 혹은 과학과는 동떨어진 학문으로 여겨져왔다. 하지만, 19~20세기에 마르크스주의적 예술 이론과 하워드 베커와 같은 사회학자들이 등장하며,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논리에 반발을 드는 계기가 발생하게 된다. 예술 사회학자들 각자의 관점은 크게 다르기는 했지만 공통된 것은 우리가 사회적 관점에서 예술을 파악할 필요가 있으며 모든 예술은 사회적, 역사적 흐름과 관계되어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런 주장들에 의해 기존의 예술을 고립된 분야로 파악했던 미학적 관점에 반성이 제기됐으나, 존 버거가 활동하던 시기에도 여전히 예술 사회학적 관점이 비주류에 속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특히 보수적 성향을 지닌 영국 미술계에서는 아직도 미학적, 예술 철학적 관점이 주를 이뤘고, 존버거는 이 책을 통해 예술 사회학적 비평을 제시하며 다시 논의의 장을 넓히는 데에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책 속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이란 그림의 설명에서, 그는 화가나 그림 내의 기술적인 부분이 어떠한지에 대한 설명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는 그 그림 속의 물건, 혹은 대사들의 태도를 당시 시대적 상황과 연관지어 해석한다. 그림 속에 드러나는 지배계급의 자본, 자기 과시와 관련된 모습 말이다. 존버거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그림을 ‘프레임 안에서 그 그림이 보여주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프레임 바깥의 세계에 대해 그 그림이 이야기하는 차원에서 해독’하고 있다. 이와 같은 관점은 미술계에 다시 예술 사회학적 관점을 상기시키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모든 예술에서 미학적 관점을 배제하고 정치적 관점에서만 해석하려 했던 마르크스주의적 예술이론과는 달리, 존버거는 미학적 관점과 사회학적 관점을 적절히 섞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그는 기존의 사회적인 관점에서 그림을 해석하면서 파격적인 방법을 제시했지만, 그렇다고 기존의 미학적인 측면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의 책에는 두 관점이 적절한 방식으로 섞여있으며 그러한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성과 중 하나이다. 두 관점의 적절한 융합은 다양한 해석의 관점으로 독자에게 다가오며, 흑백 논리처럼 어떤 방식이 맞다고 정의하지 않고 있기에 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