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좀도둑 가족'을 읽고
1.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이야기 세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기로 유명한 감독이다. 그리고 이 소설은 그의 이야기 세계에서 독특한 지점을 차지하고 있다. 좀도둑 가족은 가족의 붕괴가 아닌 새로운 가족의 형성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와 같은 그의 초기작들이 주로 혈연 관계로 이어진 가족의 이야기를 다뤘다면, 좀도둑 가족은 그러한 제도화된 가족이 아닌 다른 형태의 가족을 보여준다. 시대가 바뀐 이유일까. 현대로 넘어오며 혈연이라는 요소는 가족의 필요조건이 아닌 것처럼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 소설은 우리에게 ‘진짜 가족을 이루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서늘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감독은 일본에서 연금 부정수급으로 사회문제가 된 한 가족의 기사를 보고 해당 이야기를 집필했다. 이 작품은 단순히 가족 공동체라는 내부 세계가 아닌, 사회 공동체에서 가족이라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사회적인 고민이 담겨있는 작품이다. 제목에 드러나있는 가족이라는 단어에서부터, 우리는 이미 ‘혈연관계’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글을 읽어 나간다. 그에 덧붙여, 첫 장에서 쇼타와 아버지라는 단어로 시작되는 문장은 그들이 혈연 관계라는 착각을 가중화 한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우리는 알게 된다. 그들은 모두 혈연관계가 아니고, 도둑질을 통해서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는 가짜 가족이라는 것을.
2. 의지와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 가족
우리는 과연 이 가족을 ‘진짜’라고 바라볼 수 있을까? 그들은 철저히 의지와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 가족이다. 혈연 관계로 이루어진 가족은 필연에 의해 형성된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를 선택했고 의지에 의해서만 지탱될 수 있다는 특이성을 지닌다. 혈연에 의해 이루어진 가족이라고 더 끈끈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가끔 그들은 서로 떨어지고 싶은데도 떨어질 수 없는 기구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혼은 그 단적인 예시 중에 하나로, 필연에 의해 가족이 되었음에도 선택과 의지에 따라 가족관계를 끊어 버리기도 하는 것을 우리는 자주 볼 수 있다. 그렇게 필연적인 관계도 해체를 맞는 와중에, 아무런 강제 요소 없이도 유지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진짜 가족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그들을 하나의 가족으로 묶은 요소는 무엇이었을까.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드슨은 현대로 들어서면서‘가족은 더 이상 공동의 거주나 경제적 협동, 혈연적 결속의 역할을 떠맡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이제 상호적인 정서적 교감이 가족을 이루는 더 중요한 요소라고 말한다. 이들은 철저히 그들의 의지와 선택에 의해서 가족이 된 사람들이다. 누군가에게 버림받고 상처받은 그들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갔고, 서로에게 의지하며 정서적 유대를 나눈다는 측면은 그들을 가족으로 만드는 요소 중 하나였다.
3.호혜성의 문제와 쇼타의 선택
속물적이지만 재산도 그들을 가족으로 만드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은 철저히 돈에 대한 호혜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가족이었다. 관계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 사이에 결코 그냥 주는 것은 없었다. 그들은 다들 각자의 몫을 해 돈을 벌어왔고, 어린 쇼타에게도 그것은 예외가 아니었다. 주고받음이 있어야 유지될 수 있는 그들의 관계에서 호혜성이라는 요소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유리가 들어오고 나서부터 그 관계가 뒤바뀐다. 호혜성이라는 것을 요구하기에 유리는 너무 어렸다. 그러나 유리가 성장해 도둑질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서, 이 관계도 변화하기 시작한다. 유리는 자신도 조금이라도 가족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도둑질을 하는 쇼타의 행동을 모방한다. 하지만 쇼타는 이러한 유리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고, 이것은 마지막에 쇼타가 하는 선택에 큰 영향을 준다.
쇼타는 도둑질을 하다 경찰에게 걸리고 말고, 이 사건을 계기로 정체가 폭로되며 가족은 흩어지게 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쇼타의 의도적인 선택이었다. 그는 자신의 의지에 의해 경찰에게 잡힌 것이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적 원칙에 따르면, 아무리 가족이 하나의 단위라고 할지라도 개인은 가족이라는 집단을 위해 희생될 수 없다. 어쩌면 쇼타가 보기에, 그들은 서로를 가족의 존속을 위한 도구로서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비춰졌을 지도 모른다. 그것은 서로를 더 나쁜 길로 이끄는 행위였고, 쇼타는 그걸 넘어선 더 나은 길이 있다고 믿었기에 그런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쇼타가 그렸던 긍정적인 미래와 달리 현실은 냉담했고, 그의 선택은 결말에서 우리에게 서늘한 현실의 모습을 제시해준다.
4.과연 우리는 이 가족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과연 우리는 이 가족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그들을 진짜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와는 별개로 이 가족에게는 여러 문제점이 존재한다. 첫번째는 앞에서 말한 것 같은 돈에 대한 문제이고, 두번째는 교육에 관한 문제이다. 헤겔은 재산이 가족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라고 이야기한다. 하나의 인격을 형성하는 가족은 법적 주체로서 자신의 존속을 위해 재산을 지녀야만 한다. 그리고 그들은 돈이라는 요소를 위해 아이들에게 도둑질이라는 범죄 행위를 가르친다. 가족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교육의 측면에서 이것은 용납될 수 없다. 부모에게 배운 것을 바탕으로 아이는 자아를 형성하고, 그것을 토대로 또다른 독자적인 가정을 형성한다. 쇼타가 오사무에게 배운 도둑질을 바탕으로 계속 성장했다면 그는 올바른 자아를 가진 어른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그러한 과정을 유리에게 또 반복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에 드러나는 쇼타의 선택은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마냥 그들을 나쁘게 볼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그들이 서로에게 주었던 정서적인 유대감은 우리가 함부로 평가할 수 없을 만큼 돈독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누구보다 서로를 잘 이해하고, 서로가 아니었으면 주지 못했을 정서적 안정과 사랑을 주었다. 후반부에 경찰에게 조사를 받던 노부요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아이를 납치한 게 아니라 주운거라고, 버린 사람은 따로 있지 않나요?’. 그들이 서로에게 부족한 점이 있었더라도 서로에게 준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자기 친자식임에도 아이를 학대하고 버리는 친부모와, 비록 실수와 결함이 있었지만 진심으로 아이를 대한 노부요 중에, 과연 우리는 노부요가 더 못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5.과연 ‘진짜’ 가족이란 무엇인가?
과연 ‘진짜’ 가족이란 무엇이고, ‘가짜’ 가족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정서적 유대감, 재산, 교육의 측면에서 이 가족의 진위여부를 따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의 진위여부가 아니라, 우리가 그 과정들을 통해 가족과 사회에 대해 어떤 이야기들을 얻어갈 수 있을지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감독은 이야기를 한 방향으로 끌고 나가지 않는다.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이야기는 쉽지만 매력적이지 않다. 한 방향은 우리에게 하나의 진리, 즉 교훈을 밀어붙이는 듯한 압박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한 지점을 피하기 위해 이 소설은 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기보다는 그저 현상과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각자에게 생각할 여백을 남겨준다.
혈연 관계 없이 이어진 가족은 나름대로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들은 도둑질을 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엄청난 범죄처럼 다가오지는 않기에 우리는 그들과 가까워지며, 소설을 보며 내적인 친밀감을 쌓는다. 하지만 소설의 중반부부터 드러나는 그들의 기이한 행동은 우리를 다시 그들로부터 떨어뜨려 놓는다. 후반부에 불편한 마음으로 소설을 보고있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결말은 허무하다. 가족들은 다시 해체되고, 원래의 생활로 돌아간다. 그리고 부모에게 학대를 받던 유리 또한, 사회의 아무런 조치 없이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초반부에 가족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던 우리에게, 결말은 또 다른 문제를 제시한다.
사회는 이 좀도둑 가족이 진짜 가족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들 눈에 이 가족은 돈을 위해 모인 사기꾼 집단일 뿐이다. 그래서 사회는 이 가족을 해체시키고, 자신들이 더 옳다고 믿으며 모든 것을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다. 좀도둑 가족은 그들이 믿는 정상적인 형태의 가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과연 사회가 일반적으로 요구하는 정상성에 맞춰 모든 것을 바꾸는 것이 모두에게 좋은 선택이었을까? 유리가 다시 학대가정으로 돌아가는 모습에서 우리는 왠지 모를 서늘한 기운을 느끼게 된다. 그저 ‘정상적’인 가족의 모습으로 그들을 돌려놓는 것이 우리가 기대했던 최선의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는 냉담했고, 원리원칙에 따라 모든 것을 돌려놓는다.
우리는 이러한 가족의 형태가 그저 개인적인 이슈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사회가 만들어낸 가족이다. 그리고 사회는 다시 그 가족을 외면하고 있다. 우리는 단순한 측면에서 그들을 바라보아서는 안된다. 그 모습에는 모두 사회의 책임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외면을 통해 또다른 악순환을 반복해서는 안된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성으로의 회복이 아니라, 그들에게 약간이나마 부족했던 지점들을 채울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들의 고리를 끊어버리는 것이 아닌, 어떻게 하면 그들의 고리를 더 탄탄하게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해야한다. 다시 그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단순히 가족에 대한 이야기로만 보였던 이 소설은 다시 우리 사회의 모습을 돌아보게 만들며 이야기를 끝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