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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유월 Aug 19. 2023

<남매의 여름밤>: 아는 사람 이야기

영화 ‘남매의 여름밤’을 보고

옥주와 동주, 그리고 할아버지의 집

남매의 여름밤은 문학적인 영화이다. 교과서의 여느 현대문학 파트에 실릴 것만 같은 그런 단편소설. 초등학생 때 우리 교과서에 이 작품이 실렸다면, 어린 나는 몰래 눈물을 삼키며 이 작품을 읽었을 것 같다는, 그런 상상을 한다.


1)아는 사람 이야기


윤단비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스크린 안을 벗어나더라도 계속 이어지고 있을 것 같은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우리들, 벌새, 남매의 여름밤 같은 한국의 독립영화들을 볼 때 나는 영화 속에 나 자신을 투영한다. 나에게 독립영화가 가진 매력은 바로 그것이었다. 나의 경험을 영화 속에 투영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우리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좋았다.

내가 좋아하는 많은 영화들은 대부분 내가 환상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한다. 한번도 겪은 적 없는 이야기, 그래서 가슴이 두근거린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영화들은 내가 겪은 이야기를 되짚어보게 함으로써 더 깊은 울림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영화를 나가도 계속 상영될 것만 같은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지켜보는 느낌이다. 나의 삶, 영화를 보는 관객들, 그 어느 누군가의 삶과도 교차점을 이룰 것 같은 영화이다.


2)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남매의 여름밤’ 이라는 제목을 처음 보았을때, 나는 어린 남매의 풋풋한 어린시절을 담은 가벼운 독립영화일 거라고 생각했다. 영화가 끝나고 바라본 제목에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의미들이 함축되어 있었다. 비록 감독의 의도가 아닐지라도, 나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남매

‘남매’라는 단어에는 어린 남매와 어른 남매, 즉 두 남매가 함축되어 있다. 결국 나는 이게 돌림노래의 일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영화의 후반부, 옥주의 아빠와 고모가 할아버지를 모셔둘 요양원을 보고 오는 장면에서, 옥주의 아빠와 고모는 이런 대화를 나눈다.

‘기분이 좀 그렇네’

‘당연하지, 아버지를 요양원에 모실 생각을 하니…’

‘아니…나중에 내가 늙고, 옥주랑 동주가 나를 요양원에 내비두고 온다고 생각하니까…’

결국 동주와 옥주도, 아빠와 고모처럼 되지 않을까 하는 서글픈 생각이 스친다.


-여름밤

여름밤은 말 그대로 이 영화의 시간적 배경을 나타내고 있지만, 영화의 핵심주제를 보여줄 수 있는 키워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 리뷰에서 이런 문장을 보았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옥주와 동주에게는 앞으로도 몇번의 여름방학이 찾아오고, 어른이 된 후에도 여름밤은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시절은 계속 한 자리에 머물러있다. 1년에 한번 돌아오는 계절 속에서 그 둘은 이 시절을 계속 생각하게 될까? 돌아보고 싶지 않은 시간도 있었지만, 돌아보고 싶은 시간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날의 여름밤을 기점으로 이제는 할아버지가 빠져있으니까, 이제 그 시절은 돌아올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추억이란 이름으로 두 아이의 곁에 남아있을 것이다.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동주와 옥주에게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이 계절을 회상하게 할 것이다.



3.가족이란 울타리

이 영화는 가족에 대해, 그리고 복잡미묘한 가족의 의미와 문제에 대해 다룬다. 다 큰 자식들은 원래 있던 가족을 떠나 자신만의 새로운 가정을 이룬다. 나는 항상 이 과정이 참 서글프다고 생각했다. 원래 가족이라고 생각했던 울타리는 영원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것 역시 고리가 얽히며 조금씩 각자의 중심이 옮겨간다. 어렸을때의 나는 나와 엄마,아빠, 오빠가 내 가족의 중심이라 생각했는데, 결혼을 하면 가족의 중심이 나,남편,그리고 나의 아이로 옮겨간다. 만약 나의 아이가 결혼을 한다면, 나의 아이의 고리 또한 그쪽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 또한 나 이전에 가족이 있다는 사실도 미묘하게 내 기억 속에서 지워져 있었다. 이제는 우리 아빠, 엄마의 가족의 중심이 여기로 옮겨온 것이다. 그래서 우리 가족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당연한 사실, 아니 어쩌면, 현상이다. 그래도 나는 이 사실이 서글프다. 가족 또한 영원하지 않은 세상이라니.


이 영화는 그러한 가족의 복잡미묘한 의미를 보여주는 것 같다. 원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던 옥주의 아빠와 고모는 이제 각자의 가정을 이뤘다. 그리고 이제는 내 가족의 중심이 더 이상 할아버지가 아닌 나와 나의 자식들에게로 옮겨가는 것이다. 아빠와 고모가 할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내고, 집을 팔아 돈을 얻으려는 행동 또한 모두 여기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기적이다 정말로. 하지만 이상하게 비난하기도 어렵다. 만약 내가 그 상황이라면 저러지 않았을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4.어린 서술자의 시점

영화의 샷은 대체적으로 3인칭에서 바라보는 듯한 장면이 많다. 대문의 위치정도에서 가족의 모습을 바라보는 씬이나, 멀리서 찍은 듯한 장면이 그렇다. 하지만 영화는 대체적으로 아이들의 시점을 대변하고 있다. 특히 주인공 옥주의 감정과 생각에 카메라가 투영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든다.


아이들은 상황에 대한 더 객관적이고 솔직한 눈을 지닌다. 이미 현실에 찌들어버린 어른들은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를 합리화하면 애써 사실을 외면하지만, 아이들은 아니다. 아이들은 대체적으로 철저하게 진실을 마주하려고 하고, 그래서 아이의 눈으로 보는 세상이 어른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할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내고 집을 팔려고 하는 아빠에게 옥주는 말한다. ‘아빠, 그건 아니지 않아?’. 아빠는 숨기려 하면서도 수치심을 들킨 듯 부끄러운 표정이다. 옥주는, 우리가 아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대신 해준다.


영화 속 옥주의 감정은 미묘하다. 할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보내지도 그렇게 친하지도 않았지만, 잠깐의 아주 짧은 여름날을 보내고 난 뒤 할아버지와는 암묵적인 유대감이 쌓였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할아버지를 떠나보내는 옥주의 감정은 복잡미묘했을 것이다. 나도 그 기분을 안다. 할아버지에 대해 오열을 할만큼의 친분감이 쌓인것도 아니니, 대외적인 상황에서 펑펑 울기는 왠지 민망하다고, 사춘기 소녀는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추억이 쌓여버린(그것도 최신의 추억)상황 속에서, 이제야 관계를 시작한 상황에서 그 존재가 없어지는 허탈감은 정말 슬프다.

그래서 옥주가 장례가 끝나고 난 뒤, 집에서 그렇게 슬프게 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분명 혼자 울고 싶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는 게 아닌, 그저 감정을 흘려보내고 싶은 그런 슬픔. 게다가 아빠가 할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내고 집을 팔려고 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는 옥주는 이미 떠나보낸 할아버지에게 말할 수 없는 죄책감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5.상징적인 표현, 꿈


영화는 상당히 많은 메타포를 함유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흥미롭고, 가장 두드러진 것이 꿈에 대한 이야기였다. 영화 속에는 세 가지의 꿈이 나온다.

첫번째는 아빠의 꿈. 옥주의 아빠는 아침 8시 30분에 동주를 깨운다. 학교 갈 시간이라고, 후다닥 일어난 동주는 아빠에게 성을 내며 준비를 하다, 지금이 방학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웃으며 다시 잠이 든다.

두번째는 고모의 꿈이다. 고모는 가끔, 아니 자주 자기 엄마의 꿈을 꾼다. 마치 당연한 존재처럼 고모의 꿈의 나오는 엄마.

세번째는 옥주의 꿈이다. 이미 가족을 떠난 엄마가, 할아버지의 장례식에 찾아오는 꿈.


고모는 말한다. 결국 꿈은 원하는 것을 보여준다고. 평소에 생각하고 있지 않아도, 현실에서는 부정해도, 꿈 속에서는 나타난다는 것이다. 꿈은 무의식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가끔은 아빠의 꿈처럼 싫어서가 아니라, 그저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사라져버린 기억이 찾아오기도 한다. 또 가끔은 고모처럼 일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기억이 찾아오기도 하고. 그리고 옥주처럼 기억하기 두려워 반사적으로 지우려 했던 기억이 찾아온다. 옥주는 엄마를 싫어한다 말하지만, 장례식장에서 엄마와 마주하는 꿈을 꾼다. 결국 옥주의 무의식에는 엄마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좋은 영화다. 멋지거나 화려한 영화가 아닌 정말 좋은 영화. 과장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계절의 미묘한 질감이 너무 좋았다. 앞으로 한국에 이런 영화가 많아지면 좋겠다. 아역 배우들의 연기도 정말 연기가 아니라 느껴질 정도로 좋았다. 옥주의 연기가 성숙하고 섬세했다면, 동주는 정말 옆집에 사는 아이처럼 너무 귀여웠다.


너무 귀여운 동주와 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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