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자유인의 일생
홍세화 선생님이 영면하셨다. 나의 대학생 시절, 그는 김규항, 박노자, 진중권, 강준만, 유시민, 고종석 등과 더불어 스승이었다. 그의 단정한 문체에 실린 급진적이고 불온한 사상은 지배 이데올로기와는 다른 사유를 자극하였고, 다른 세상을 상상할 수 있게 했다. 그의 글에서 배운 대로 살아오지는 못했지만(대체로 좋은 글에서 말하는 내용들은 실천하기는 무척 어렵다.), 그의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뭔가 조금은, 아주 조금은 이전보다는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학고, 직장을 다니고, 시험공부를 하고, 변호사로 바쁘게 일을 하면서는 선생의 글은 거의 읽지 않게 되었다. 세상은 더욱 나빠지고 있는데, 그래서 더욱 선생의 글이 절실하게 필요한 세상인데, 어쩐지 읽은 기억이 거의 없다. 물론 홍세화 선생의 글에 대해서만 무관심해진 것은 아니다. 위에 지적 스승으로 열거한 저분들의 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둔감해진 탓이 가장 클 것이다. 아니면 홍세화 선생과 박노자 선생 같은 분들이 지치지 않고 꾸준히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글을 쓰고 있는데도, 세상이 점점 나빠지는 것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무력감과 회의감에 사로잡힌 탓이 클 수도 있을 것이다.
한겨레 신문에서 홍세화 선생의 별세 소식과 동시에 그의 마지막 인터뷰를 읽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병상에서 진행된 그 인터뷰를 보면, 선생의 평생 목표는 '자유인'이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에게 '자유'란 곧 '고결함'이다. 그러니까 자유인이 된다는 것은 고결한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고결한 인간은 존엄성을 지킬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지 않는 곳에서 인간이 고결해질 수는 없다. 그런데 존엄성과 고결함은 저 혼자 지킬 수는 없는 가치다. 또 타인은 고결하지 않은데 자기만 고결해지는 것도 불가능하다.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사회구성원들의 존엄성과 고결함을 존중하고 지켜주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단적으로 말해서 민주주의가 실현된 사회다. 선생은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서 시민들이 주체성, 비판성, 연대성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주체성은, 자기가 이 사회의 주체라는 것. 이 사회를 움직여가는 본체라는 생각. 비판성은, 비판 능력을 갖게 되는 것. 그리고 연대성"(2024. 4. 20. 자 한겨레 이문영 기자) 어느 것 하나 갖추기 어려운 덕목이다. 그리고 이 셋은 따로따로 습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세 가지가 동시에 갖추어질 수밖에 없는 덕목이다. 사회의 구조와 시스템과 현상을 비판적으로 사회를 바라볼 때, 사회에 대해 주체적인 개인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거대한 사회의 힘은 홀로 비판하기는 어렵다. 연대가 필요하다. 비판적인 시선을 가진 타인과 연대할 때, 우리는 주체가 될 수 있다. 주체로서의 시민들이 연대하여 사회를 비판함으로써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는 것이고, 민주주의라는 토양 위에서만 진정 자유인이 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소박한 자유인으로 살기가 무척 어려운 세상이다. 선생은 "한때는 외롭고, 한때는 자유로웠습니다."라고 했다. 돈에 미쳐 있는 세상에서 선생 같은 분이 외롭지 않게 사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이 우리 사회에 던진 질문과 몸소 보여주신 가치는 여전히 살아남아 누군가에게는 삶의 지표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선생이 가시는 길이 덜 외롭기를 바란다. 선생이 가신 곳이 더 자유로운 곳이기를 바란다. 그곳에서는 꿈꾸시던 대로 소박한 자유인으로 살아가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