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21일
책을 읽을 때 우리는 뭔가를 생각하게 되잖아. 그럼 그때 눈은 뭘 보고 있는 거야. 아무것도 안 보고 있는 걸까. 그때 우리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동공이 풀린 채 멍한 표정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때 눈은 뭘 하고 있을까. 생각할 때, 우리는 생각하는 것을 본다. 물론 생물학적인 눈으로, 신체의 한 기관인 눈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뭔가 생각하고 있는 내용, 생각하는 장면을 보고 있는 것이다. 관조(theoria)하고 있는 것이다. 관조에도 '보다'라는 의미가 이미 들어 있는데, 분명 신체기관인 눈으로 보는 상황이 아님에도 '관조'라고 한다. 그러면 이때 우리는 무엇으로 보고 있는가. 이성의 눈, 마음의 눈인가. 이성의 눈으로 무엇을 보고 있는가. 플라톤은 이데아를 이성의 눈으로 보았을까. 그는 보았기에 이데아가 '있다'라고 한 것일까. 이데아가 내 눈앞의 책이나 시계처럼 있는 것일까. 그러면 누군가에게 신은 어떠한가. 그들은 이성의 눈으로 신을 보았기에 신이 '있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플라톤이 이데아가 '있다'라고 할 때, 그 '있다'의 의미에 대해서 '존재의 유비'와 같은 애매한 설명이 아니라 직접적인 설명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지하철을 타고 있는 시간은 책 읽기에 가장 좋은 시간으로, 내게는 대단히 소중한 시간인데, 갑자기 걸려 온 전화 때문에 30분을 날렸다. 지하철이라 말을 거의 할 수 없었고, 그저 듣기만 했는데...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전화를 바로 안 받으면 되는데, 그게 잘 안 된다. 좋지 않은 습관이다. 상대방이 내 입장을 헤아려 줄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일까.
서부지법 난동 사태를 보면서 아 이제 우리 사회의 어떤 경계, 마지노선이 무너졌다는 생각이 든다. 이념적으로 사법부는 헌법 수호,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이다. 사법부 구성원이 잘나서가 아니라 우리 헌법이 그렇게 설계가 되어 있는 것이다. 현실적으로도 분쟁을 최종적으로 종식하는 기관인 법원과 구체적으로 그 판단을 하는 판사의 권위는 지금까지 인정되어 왔다. 결과가 불만족스럽더라도 대체로 법원의 판단에 대해서는 수긍을 해 왔다(물론 석궁을 쏘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 역시 판사 개인이 인격적으로 훌륭하거나 능력이 탁월해서가 아니라 어떤 사회적 합의(그 합의가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가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 근거도 없이 체포영장 발부가 위법하다는 억지를 부리면서 체포를 거부하는 행태를 보일 때도 넘지 말아야 할 어떤 선을 넘는구나 하는 생각에 충격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그런 자가 우리나라의 검찰총장이었다니...나는 도대체 어떤 나라에 살고 있었던 것일까.). 탐욕스러운 자본주의에 저항한다는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시하기 위하여 은행 유리창을 깨는 행동을 할 수는 있다(물론 당연한 얘기지만 이런 행동은 불법이다). 그런 행동은 그래도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법원의 판단에 대해 법원에 침입해서 난동을 부리는 방식은 어떤 기본권의 영역에도 포함되지 않는,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더러운 범죄일 뿐이다. 정상적으로 사고하지 않는 자들이, 아니 아예 생각을 하지 않고 행동하는 자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살기가 점점 더 무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