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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변호사 Jan 09. 2025

좋은 판사

2025년 1월 9일

오전 11시 20분 재판이 12시 10분에 시작되었다. 무려 50분을 기다린 것이다. 재판시간을 제대로 못 지키는 판사를 신뢰할 수 있겠는가. 어떤 변호사는 재판시간도 제대로 못 지키는 판사가 재판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고 혹독하게 비난을 하기도 한다. 재판시간을 준수하지 못 한 이유가 판사의 게으름이나 업무에 대한 무관심 내지 부실한 재판 준비 때문이라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나는 마음속으로도 판사님을 비난하지 않은 채 조용히 내 차례를 기다렸다.


오늘 사건 재판부 판사님이 재판 시간을 지키지 않는 것은 너무도 흔한 일이다. 이 재판부에서 진행하고 있는 사건이 많아서 자주 오는 나는 잘 안다. 여러 번 당한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비난하지 않는다. 앞 사건이 밀리는 이유가 판사님의 무능 때문이 아니라 판사님의 사건에 대한 애정과 관심, 당사자 의견에 대한 경청 때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만 이 사실을 아는 것 같지는 않다. 매년 각 지방변호사회에서는 법관 평가를 하는데, 올해 이 판사님은 서울지방변호사회 소속 변호사들이 우수법관으로 평가한 분이다. 심지어 이 판사님이 속한 법원에서 단 두 분만이 우수법관으로 선정되었다.


'나쁜 법관'으로 평가된 판사들의 공통점은 당사자에게 고압적인 태도로 막말을 한다는 것이다. 고압적인 태도와 막말은 곧 판사가 당사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법대로 처리할 것이니 너는 입을 다 물어라, 한 얘기 또 하지 마라, 처리해야 할 사건이 많다, 이미 결론은 났으니 더 이상 딴소리 하지 마라와 같은 마음으로 당사자의 입을 막는 것이다. 하루에 여러 건의 사건을 처리해야 하는 판사 입장에서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당사자들의 태도를 보면, 판사들의 위와 같은 태도가 이해가 전혀 안 되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법정까지 온 사람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판사가 자기 얘기를 들어주는 것이다. 비록 사건이 밀리더라도 당사자 마음에 맺힌 것 없게 그들이 말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결국 재판이다. 자, 나는 들을 준비가 되어 있으니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해 보세요라는 태도가 판사에게는 필요하다. 오늘 내 사건의 판사님은 (변호사인 내가 보기에도 이제 좀 말을 잘라 줘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피고인의 호소를 잘 들어주시는 분이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사건이 밀리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변호사들이 그 판사님을 우수법관으로 선정한다. 재판을 빨리 진행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당사자의 얘기를 잘 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이런 판사님의 성향을 잘 알기에 변호인인 나는 다른 법정에서라면 시도해 보기를 주저하게 되는 의견들을 마음껏 피력하는 편이다. 틀린 주장이라고 하더라도 법정에서 발화되어, 검사나 판사도 '아, 저런 의견도 있을 수 있겠군'하는 생각이 들게 해야 한다. 말이 막히면 우리는 타성에 젖어 그저 해오던 대로 재판을 하게 될 것이다. 법정 안에서 새로운 말이 자유롭게 흘러나와야 한다.

    



동부지법 우체국 직원 분은 왜 이리 친절했을까. 오늘 그 직원분에게서 받은 친절을 잊지 말아야겠다. 누군가에게 돌려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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