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지8(이문열)/근대의 가을(장석준)/초인수업(박찬국)
재판이 있어서 부산에 다녀왔다. 날씨가 좋았다. 아직은 약간 더웠지만, 확실히 여름은 물러가고 있다. 올여름은 잔인하게 더웠지만, 막상 여름이 가니 서운하다. 또 이렇게 내 인생에서 한 번의 여름이 가는구나. 태풍이 오는 게 아닌가 싶게 부산은 바람이 많이 불었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은, 그렇지 않아도 엉망인 머리가 더 엉망이 된다.
오랜만에 기차를 탔다. 재판이 아니면 기차를 탈 일이 거의 없다. 여행 때문에 기차를 탄 거라면 더욱 좋았겠지만, 재판 때문에 기차를 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약간의 긴장감을 가지고, 한정된 시간 속에서 알차게 뭔가를 하고 있는 기분이 들어서다. 기차를 타기 전 날에는 기차에서 읽을 책을 고른다. 신중하게 골라야 한다. 기차를 타는 날은 일찍 일어나야 하고, 따라서 대체로 수면 시간이 부족한 상태에서 기차를 타기 때문에, 아주 재미있는 책을 골라야 한다. 절대로 졸리지 않을 책을! 그러나 경험상 기차에서 졸지 않은 적이 없다. 그래도 부산 같은 경우는 대략 5-6시간의 독서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올해 6월 경에 갑자기 삼국지를 읽기 시작해서 초한지에 완전히 빠져 들었다가 내친김에 아직 읽지 않은 수호지를 읽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수호지가 삼국지보다 더 재미있다고 하는데, 나에게는 수호지가 조금 지루했다. 같은 패턴의 이야기가 계속 반복되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수호지 완독은 거듭 실패했다. 이번만큼은 완독 하리라 마음을 다잡고 시작했지만, 역시나 실패. 총 10권 중 7권까지 읽고 방치 상태였다. 그래 졸다 깨다 읽어도 별 지장이 없는 수호지, 너다, 기차를 같이 타자꾸나. 그렇게 수호지 8권이 부산행 기차에 탑승했다.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 끈 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모택동은 수호지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하질 않는가. 무기력할 때 수호지를 읽으면 약간 힘이 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수호지 인물들에게는 뭔가 짠한 느낌이 든다. 하는 짓을 보면 딱히 동정할 만한 위인들은 아니기는 한데, 한편 그네들의 인생이 참 기구하다 싶기도 하다. 나는 아직 수호지를 끝까지 읽지 않아서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대략 결말을 알고 있어서 더 그런 기분이 드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번엔 반드시 완독 해야지. 제발!
장석준의 <근대의 가을>은 정말 좋은 책이다. 지식을 전달해 주는 종이 묶음이 그냥 '책'이라면, 익숙한 사실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주거나 다른 해석을 통해 그 사실에 완전히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책은 '정말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 기준에 의하면, <근대의 가을>은 정말 좋은 책이다. 세 번은 읽어야 할 책이다.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수호지가 지겨워질 때쯤 펼쳐서 44페이지까지 밖에 읽지 못했지만, 정말 곱씹으면서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87년 체제를 언제까지 참아 줄 것인가. 현행 헌법 개정은 언제 어떠한 내용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인가. 시민들은 언제쯤 제대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인가. 정치라는, 이 중요한 문제를, 언제까지 저들 직업 정치인들에게만 맡겨 둘 것인가. 의견을 달리하는 시민들 상호 간 대화와 토론을 통한 합의는 가능한 것일까. 어느 쪽이든, 나는 광신도들이 무섭다. 그들은 민주주의의 적이다.
초인수업이라니. 선생님, 어찌 이런 제목의 책을 쓰셨습니까. 그러나 박찬국 선생님은 실망시키지 않는다. 니체를 싸구려 인생철학자로 포장해서 돈 좀 벌어보려는 책장사들이 많은데, 박찬국 선생님은 이런 책장사들과는 격과 결을 완전히 달리한다. 책 제목 '초인수업'에서 '초인'은 '위버멘쉬'이다.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위버멘쉬)을 가르친다. 인간은 초극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라고 짜라투스트라가 외치지 않았던가. 바로 그 '초인'이다. <초인수업>은 '힘에의 의지'-'운명애'-'영원회귀'-'위버멘쉬' 등 니체 철학의 핵심 개념들을 쉽게 설명한다. 그러면서도 정확하다. 이 책의 큰 장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