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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변호사 May 25. 2019

어린 왕자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 우물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황현산 옮김, 열린책들, 2015]

#이제야 읽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이제서야 읽었다. 모든 일에는 적절한 때가 있듯이, 책도 읽어야 할 적절한 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한 정신과 한 정신의 가장 내밀한 만남이고, 따라서 독서는 인격과 정신과 정서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래서 감수성이 예민하고, 외부의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해서 그 자극을 쉽게 수용할 수 있는 '어린 시절'에 어린이가 읽으면 좋을 책들이 분명히 있는 것이다. 어린이가 좋은 책을 읽는 것은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다. 나는, 아니 '어린이였던 나'는 어린이에게 좋은 책들을 많이 읽지 못했고(그래서 좋은 어른이 되기가 힘든가 보다), '어른인 나'는 적절한 때를 놓쳐 버린 책들에 대한 아쉬움이 항상 컸다. 더 늦기 전에 이제라도 놓쳐 버린 그런 책들을 읽고 싶었고, 어쩌면 내 마음 속에서 놓쳐 버린 책들의 목록 중 맨 앞 자리는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였나보다.


너무 늦은 것이 아닌가 싶어 두 가지 변명을 생각했다. 우선 생텍쥐페리는 <어린왕자>를 (어린이들에게 용서를 빌면서) 어른에게 바쳤다. 그렇다면 오히려 이 책은 어린이들이 읽을 책이 아니라 어른이 읽어야 할 책 아닐까? 물론 결국 생텍쥐페리는 한 때는 '어린이였던 어른'에게 이 책을 바친 것으로 보이니 꼭 어른에게 바친 책으로 한정지으면 안 될 것이다. 결국 이 책은 '어른인 나'와 '어린이였던 나'가 함께 읽어야 할 책인 것이다. (그런데 이미 사라져 어딘가에 흔적만을 남기고 있는 '어린이였던 나'를 소환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계속 '어린이였던 나'를 불러 오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한 것 같고 '어른인 나'만이 이 책을 읽어낸 기분이다.) 다음으로 좋은 책이라면, 어린이든 어른이든 읽어야 할 것이다. 어른이라고해서 생각이 자라지 않는 것은 아니니까. 어린이 책과 어른의 책이 날카롭게 구별되는 것은 아니니까. 어린이가 보는 것과는 다른 것이 보일수도 있으니까. 이렇게 남들 다 읽은 <어린왕자>를 뒤늦게 읽는 것에 대한 변명을 해 본다.


#길들이기

<어린왕자>의 문장들은 아름답다. 잠언에 가까운 이런 문장들은 인생과 삶과 사람과 사랑에 대한 깊은 고민과 통찰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그래서 가장 유명하기도 한) 대목은 어린왕자가 여우와 만나는 장면이다. 여우의 입을 빌려서 생텍쥐페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의 본질을 말한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길들이는 것이고, 상대를 길들인다는 것은 많은 시간을 쏟는다는 것이며, 그렇게 길들인 것에는 언제까지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길들여서 관계를 맺게 된 상대는, 이제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특별한 존재가 된다.


그런데 무작정 시간을 쏟는다고해서 올바른 관계 맺기(길들이기)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상대를 제대로 볼 줄 알아야 되는데, 그건 눈으로 보아서는 안 되고, 마음으로 볼 때만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눈으로 보이지 않으니까 말이다. 또 하나 필요한 건 '의례'다. 의례란, "어떤 날을 다른 날과 다르게, 어떤 시간을 다른 시간과 다른게 만드는 것"이다. 연애를 해 본 사람은 누구나 알 것이다. 오후 4시에 만나기로 했다면, 오후 3시부터 행복해지고 설레는 그 마음을 말이다. 이런 설레는 마음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의례'이다. 균질한 시간을 특별하게 만드는 그 무엇. 회색의 시간을 유채색의 시간으로 만드는 그 무엇. 관계에서 설레는 마음이 없다면, 길들이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두 가지 의문

어린 왕자는 왜 자신이 살고 있던 소행성 B612를 떠난 것일까? 어린 왕자가 지구에 와서 처음 만난 생명체인 뱀과 나눈 대화로 미루어 보면, 어느 꽃하고 말썽이 나서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돌보던 장미, 이것저것 요구하는 게 무척 많았던 까다로운 장미와의 갈등이 어린 왕자가 긴 여행을 떠나게 된 이유인 것일까. 이별여행일까. 견문을 넓히기 위한 것일까. 이걸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는, 결국 나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알아 보지 못하고, 단지 모자로 보고 있다는 의미이겠지. 


어린 왕자가 다시 자신이 살던 별로 돌아가기 위해서 꼭 뱀에게 물려야만 하는 것이었을까? 지구에 올 때처럼 철새들의 이동을 이용해서 돌아갈 수는 없었던 것일까? 뱀에게 물린다는 것은 상징적이다. 최초의 인간에게 선악과를 따 먹게 한 이후로, 뱀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어떤 지혜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어린왕자>에서도 뱀은 수수께끼처럼 말하면서 그 모든 수수께끼를 다 풀 수 있는 존재, 누구든지 건드리기만 하면 그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려 보낼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로 나타난다. 뱀에게 물리는 것을 스스로 선택한 어린 왕자는, 이제 지혜와 깨달음을 얻어 한 단계 더 성장해서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간 것일까? 깨달음과 성장은 '과거의 나'와 철저한 결별, 영원한 작별(극단적으로 '과거의 나'를 죽이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면, 어린 왕자의 선택이 어렵사리 이해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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