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봉준호 감독
-영화의 내용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지만, 보시는 분에 따라서는 <기생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계급사회라는 점, 서로 다른 계급 사이에는 넘지 못할 혹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는 점, 각 계급에는 그 계급 고유의 지울 수 없는 냄새가 있다는 점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기서 서로 다른 계급은 물론 부르조아지(부르조아계급)와 프롤레타리아트(프롤레타리아 계급)를 말한다. 이 글에서는 부르조아지를 '부자'로, 프롤레타리아트를 '도시빈민'으로 칭한다. '부르조아지-프롤레타리아트'라고 하면 어쩐지 우리의 이야기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기생충>은 놀랍고 새롭고 특별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우리가 모르던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단언컨대, 그렇지 않다. <기생충>은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가 매일 마주치고 있는, 그러나 똑바로 마주하기 겁나서 회피하고 있는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무섭고 불편하다. 부자에게도 도시빈민에게도 악몽같은 이야기이다.
아이들이 임대아파트에 사는 다른 아이들을 '휴거(임대아파트 휴먼시아에 사는 거지의 줄임말)'라고 놀릴 때, 인기 있는 비싼 브랜드 옷을 입지 않은 아이를 왕따시킬 때, 같은 아파트 단지 내에서도 몇 동에 사는지를 확인하려 할 때(동마다 평수가 다르니까), 정규직이 같은 직장 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반대할 때, 과거 국번이 있었던 시절 전화번호가 4로 시작하는지 혹은 5로 시작하는지 혹은 8로 시작하는지 등을 확인하려 할 때(4가 송파, 5가 강남, 8이 구로신도림이었다), 학교 생활기록부에 아빠의 직업을 기재하도록 할 때, 이 모든 것은 각자의 계급을 확인한 후, 너와 내가 다른 계급이라면 넘어설 수 없는 선을 긋는 행위이고, 그 선을 넘어올 경우 언제든지 제압할 준비를 하는 행위이다.
구로동에서 출발하는 6411번 버스(노희찬 의원의 연설로 알려진 버스로, 구로 기점 개포동 종점인 버스다)에 새벽에 몸을 싣고 강남의 빌딩에 청소를 하러 가는 도시 빈민들과 그 빌딩에 기사가 운전하는 외제 승용차를 타고 느긋하게 출근하는 부자들은 도무지 같은 인종일 수가 없다. 이 둘의 차이는 <기생충>에서 비오던 날 기택 가족이 뛰어내려오던 그 계단의 수만큼이나 크다. 봉준호는 이 두 계급의 구별 징표로 '냄새'를 두드러지게 얘기했지만, 어디 냄새뿐이랴. [물론 냄새가 가장 감각적이고 효과적인 장치다. '냄새난다'라는 말은 사람을 주눅들고 부끄럽게 만드니까. 힘을 빼버리는 것이니까. 자신이 서 있는 그 자리, 그 계급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니까.] 옷차림, 제스처, 말투, 사용하는 어휘 등에서, 도처에서, 가난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칠칠맞지 못하게 흔적을 남긴다. 부자의 절약은 검소고, 도시빈민의 절약은 궁색이다. 부자가 많이 먹으면 입맛 까다롭지 않고 소탈한 것이고, 도시빈민이 많이 먹으면 평소에 많이 못 먹어서 궁기를 드러내는 것이다.
부자의 악몽(혹은 불안이기도 하다)은 도시빈민이 선을 넘으려고 할 때 시작된다. 빈민의 냄새가 자신의 영역에 스멀스멀 틈입할 때 시작된다. '선'은 수평적 이미지이므로 어쩌면 적절하지 않다. 부자의 악몽은 계급의 밑바닥에 있는 도시빈민이 사다리를 잡고 기어오르려고 할 때 시작된다. 빛 한 줌 들지 않는, 와이파이가 잘 잡히지 않는 반지하방에 처박혀 있어야 할 두더지같은 도시빈민이 감히 사다리를 잡고 기어 올라와 대저택의 잘 정리된 푸른 정원에서 햇빛을 감히 나눠 가지려고 할 때 시작된다. 그래서 부자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법을 만들었고,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법을 해석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법을 집행한다. 민법은 돈을 지키고, 형법은 영역을 지킨다. 그래서 부자들은 사다리 걷어차기를 시작했다. 정시를 축소하고 수시를 확대했고, 학생부 전형을 강화했고, 사법시험을 폐지하고 (현대판 음서제라 불리는 합격률이 50%가 넘는) 로스쿨을 만들었다. 부자들은 악몽을 꾸지 않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철저하고 체계적으로 도시 빈민들을 반지하에 가둬 두려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부자가 악몽을 꾸지 않을 때, 도시빈민의 악몽이 시작된다. 같은 노동자이면서 정규직이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반대할 때, 기득권자들이 허용해 놓은 그나마 유일한 계급 상승의 통로인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1평 남짓한 노량진 고시원에서 몇 년을 몸을 구길 때, 초등학생들의 장래 희망이 공무원˙교사 혹은 임대사업자라고 말할 때, 회사에서 부당한 일을 당해도 면전에서는 아무 말도 못하고 감성팔이 말랑말랑한 에세이를 읽으면서 눈물 지을 때, 자신이 도시빈민 계급임을 망각하고 1%(많이 잡아서 10%)의 기득권을 대변하는 정당이나 그 정당의 후보자에게 투표할 때, 도시빈민들끼리 부자들이 떨궈 놓은 빵부스러기 주어먹으려고 박 터지게 경쟁할 때, 부자들은 박수를 치며 웃고, 도시빈민의 악몽은 계속된다. 그리고 더욱 무서운 것은 그것이 단지 안 좋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자자손손 대물림 되어 갈, 반지하방의 퀴퀴한 냄새가 나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기우(최우식)가 돈을 벌어서 지하에 갇혀 있는 아버지 기태(송강호)를 지상으로 끄집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현실이다.
어떤 영화는 도대체 감독이 이런 영화를 왜 만들었을까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반면, <기생충>처럼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하느라 영화에 집중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영화도 있다. 심지어 <기생충>은 같은 상영관에 앉아 있는 다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 [아마도 이 영화는 상영관에 불을 켜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반지하방에 살고 있는 사람들, 여름 홍수로 물난리가 나면 똥물을 퍼내야 하는 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 학비와 용돈을 벌기 위해 부잣집 아이들 과외를 하러 가야 하는 대학생들(그나마 이들은 학벌이라는 상징자본이라도 있으니 처지가 훨씬 낫다), 학교에서 냄새 난다고 왕따를 당했던 아이들, 대왕카스테라 창업했다가 쫄딱 망하고 빚만 왕창 진 사람들, 6411번을 타고 새벽에 강남의 빌딩으로 청소하러 가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생각을 하면서 불편했다.
누구나 알다시피 봉준호는 영민하다. 그가 이 영화를 통해 계급혁명을 노골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그러나 모를 일이다). 다만 그는 우리에게 현실을 노골적으로 극대화해서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에게 선택지를 던지는 것 같다. 봉준호 특유의 청명하고 뚜렷한 발음으로 '자, 잘 봐봐, 너희가 지금 이런 세상에서 살고 있는거야, 이게 좋아? 계속 이런 세상에서 살래? 이제 어쩔래? 이제 이 영화가 보고나면 뭐 할래?'라고 말하는 것 같다. 참, 그런데 생각해보니, 봉준호는 영화 초반에 기우의 친구 민혁 역을 맡은 (목청 좋은) 배우 박서준을 통해서 자신의 목소리를 우리들에게 크게 들려준 것도 같다.
-사진 출처 : Daum영화 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