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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변호사 Jun 22. 2019

나홀로 소송

변호사 강제주의의 도입은 불가능한 것일까

법무법인에서 근무할 때 다른 변호사님을 대신해서 그 변호사님이 진행하고 있던 사건의 재판에 출석한 적이 있습니다. 많은 사건을 수행하다보면 변론기일이 겹치는 경우가 종종 있고, 그럴 때는 사건의 쟁점과 진행경과를 전달 받고 서로 대신 출석을 하게 됩니다. 비록 제 사건은 아니지만, 소송기록을 시간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꼼꼼히 읽어 봅니다. 대신 출석하는 경우는 대체로 소송이 거의 끝나가고 있거나 특별히 법정에서 법적 공방을 벌이는 일도 없기 때문에 굳이 기록을 다 볼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읽어보게 됩니다. 다른 변호사님이 작성한 서면을 통해 배우기고 하고, 또 사건을 어떻게 풀어갔나하는 호기심을 충족하기도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변호사님을 대신해서 법정에 출석할 일이 생겼고, 기록을 전달 받았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그 기록이 너무나 두꺼웠습니다. 제가 근무했던 법인은 주로 의료소송을 했기 때문에 두꺼운 기록을 하루이틀 본 것은 아닙니다. 1000페이지가 넘어 가는 진료기록도 많으니까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기록은 보통 보던 기록보다 훨씬 더 양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기록을 읽으면서 두께보다 더욱 놀란 것은 그 소송을 수행하고 있는 상대방(원고 측)이 당사자 본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원고가 변호사를 선임하지 아니하고 직접 본인이 이른바 '나홀로 소송'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홀로 소송을 한다는 것 자체는 사실 그리 놀랍지 않습니다. 종종 경험하게 됩니다. 변호사 입장에서는 상대방이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고 나홀로 소송을 할 경우 오히려 마음이 편합니다. 쉽게 넉다운 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별 거 아닌 법률용어를 현란하게 구사하면서 상대를 압박하다가 코너로 몰고 가서 한 방에 보내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법률 문외한인 당사자의 횡설수설과 중언부언을 정리해서 반박하는 것이 조금 힘들 뿐, 소송에서 이기는 것은 기정사실이라고 자못 거만한 마음을 먹기도 합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변호사가 악마의 미소를 머금고 '법과 소송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너를 법정에서 가루로 만들어 주겠어'라고 생각하며 신나게 서면을 쓰는 모습을 말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좀 달랐습니다. 당사자가 직접 쓴 서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잘 썼습니다. 분량도 엄청 났지만, 횡설수설이나 중언부언이 아니었습니다. 웬만한 변호사보다도 훨씬 나았습니다. 그 서면에 들인 노력과 정성과 진심이 느껴졌습니다. 법률서면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각주가 몇 백개(과장이 아니라 정말 몇 백개였습니다) 달려 있고, 그 각주 또한 꼭 필요한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문장 하나하나에 간절함이 배어 있었습니다. 1심에서 거의 패소한 당사자가 항소심에서 사생결단의 각오로 달려 들고 있었습니다. 제가 담당하는 사건이 아니라는 것에 저도 모르게 안도하게 되었습니다. 사건의 내용 또한 대단히 안타까웠습니다. 기록을 읽으면서 저도 모르게 일면식도 없는 그 당사자를 마음속으로는 응원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상대의 승리를 기원한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소송은 이겨야 하니까요.


그렇게 그 사건의 변론기일에 두 번 정도 법정에 출석했고, 결론을 보지 못하고 저는 그 법인을 퇴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달 12일 인터넷을 하다가 어떤 기사 제목을 보았고, 제목만 보고도 제가 대신 출석했던 그 사건이라는 것을 대번에 알았습니다. 꽤 특이한 사건이었거든요. 어떤 여중생이 여드름 치료를 받으러 대학병원에 갔다가 대학병원의 과실로 간이식수술까지 받게 사건이었습니다. 1심에서는 의료과실이 인정되지 않고 설명의무 위반만 인정되어 소액의 위자료가 인용된 정도였지만, 항소심에서는 1심 판결을 뒤집고 의료과실이 인정되었다는 내용의 기사였습니다. 손해배상액수도 1심에 비해 거의 20배 가까이 인정되었습니다. 이쯤 되면 전부승소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법정에서 만났던 그 당사자는 바로 기사 속 여중생의 아버지였습니다. 그 날 변론기일이 끝나고 법원을 나가던 그 아버지와 어머니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면서 한참 서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속해 있던 법인의 의뢰인(대학병원)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 당사자였지만, 손을 꼭 잡고 위로해 주고 싶었습니다. 항소심에서 결과가 좋았다는 기사를 보면서 제 일처럼 기뻤습니다. 몇 년간 홀로 길고도 외로운 법정투쟁 끝에 마침내 병원 측의 과실을 법적으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법률전문가가 아닌 그 아버지가 두꺼운 서면을 작성하기 위해 자료를 찾고 자판을 두드리면서 지새웠을 불면의 밤에 한숨이 나왔습니다. 아픈 딸의 치료를 위해 이 병원 저 병원 뛰어 다녔을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마음이 아파왔습니다. 승소했다고해서, 금전적 보상을 받게 되었다고해서, 아픈 딸이 아프기 전으로 회복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승소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한 달에 약 열 분 정도의 시민들에게 무료로 법률상담을 해 드리고 있습니다. 네이버 지식인 전문가로 온라인으로 상담하는 것까지 포함하면 사십명 정도 됩니다. 법률상담을 할 때마다 매번 무료로 소송까지 해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법정에서 나홀로소송을 하고 있는 분들을 보면 도와 드리고 싶다는 생각도 듭니다. 저 여중생의 아버지를 법정에서 만났을 때도, 기사를 통해 그 아버지를 다시 만났을 때도 역시나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서 하지 못할 뿐입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저는 저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사건을 의뢰해 주신 분들을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변호사 강제주의의 도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변호사 강제주의란 '필요적 변호사 변론주의'라고도 하는데, 변호사를 선임해야만 민사소송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입니다. 뜬금없는 제도가 아닙니다. 독일은 변호사 강제주의를 취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헌법소원의 경우도 변호사 강제주의입니다. 


민사소송을 규율하는 민사소송법의 대원칙 중 하나가 '변론주의'입니다. 변론주의란 주요한 사실은 당사자가 주장해야 하고(사실의 주장책임), 상대방의 주장에 대해 다투지 않고 인정하면 그 사실은 더 이상 다투지 못하며(자백의 구속력), 자신이 주장한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증거를 제출해야 한다는 것(증거의 제출책임)입니다.


법원은 당사자가 주장한 것 이외에는 직권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가령 상대방이 채권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돈을 갚으라는 청구를 합니다. 그런데 사실 돈을 빌려 준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이미 소멸시효가 도과된 상태입니다. 그런데 소멸시효가 도과되었다는 주장을 하지 않으면 갚지 않아도 될 돈을 꼼짝없이 갚아야 되는 상황이 생깁니다. 법원은 소멸시효 도과 여부를 직권으로 판단해 주지 않습니다. 또는 돈을 갚으라는 상대방의 주장에 대해 이미 갚았다고 주장만 하고 제대로 증거를 제출하지 못하면 실제로 돈을 갚았더라도 꼼짝없이 다시 돈을 갚아야 합니다. 법원이 증거를 찾아 주지 않습니다. 사법은 소극적입니다. 당사자가 사실을 제대로 주장해야 법원은 그에 적합한 권리를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변호사 강제주의에 대한 비판도 잘 알고 있습니다. 로스쿨 도입으로 급격하게 늘어 난 변호사들 일자리를 만들려는 수작이라고 비판합니다. 직역이기주의의 발로라는 것이죠. 국민의 재판청구권을 침해한다고도 합니다. 타당한 비판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비판이 타당하다고 해도 변호사 강제주의의 도입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변호사 강제주의를 도입하면서 민사 국선대리인 제도를 같이 도입해야 합니다. 법률보험시장의 활성화, 변호사 수임료의 법정화, 성공보수의 제한도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변호사가 머금은 악마의 미소를 떠올려 보십시오. 나홀로 소송을 수행하는 당사자를 상대하는 변호사의 미소를 말입니다. 그 미소를 지우기 위해서라도 변호사 강제주의를 제도화해야 합니다.


여중생의 아버지가 몇 년간 소송을 수행하면서 생업을 어떻게 유지했을까 걱정이 됩니다. 저에게 법률상담을 받은 분들이 집에 돌아가서 과연 제가 조언해 준 대로 소송을 잘 수행하고 있을까 걱정도 되고 궁금하기도 합니다. 합리적인 선임료로 변호사에게 사건을 의뢰할 수 있다면 여중생의 아버지는 몇 년간 고생을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변호사 강제주의를 도입하고 민사 국선대리인 제도를 도입한다면, 변호사 조언 구하겠다고 어렵게 무료법률상담실에 찾아 오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변호사 수만 늘린다고해서 국민들의 사법접근권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변호사 강제주의는 사법접근권을 향상시킬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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