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돌담길 올래 분식
헌법재판소에서 변호사 실무수습을 할 때였다. 변호사 실무수습이므로, 대부분의 연수생들은 로펌에서 수습을 받았고, 따라서 변호사 실무수습을 위해 헌법재판소에 지원한 사람은 전체 연수생 중 나 혼자였다. 그래서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헌법재판소 지도부장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었고, 지도부장님은 일주일에 한두번쯤은 꼭 점심을 사주셨다. 헌법재판소가 위치한 삼청동 인근에는 이런저런 숨은 맛집들이 많았고, 부장님과의 식사 자리가 연수생 입장에서 마냥 편한 것은 아니었지만, 마다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게다가 부장님은 이런저런 책도 많이 읽는, 법조인으로서는 드물게 유식한 분이라서 부장님과 대화하는 것도 역시 마냥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지만, 적지 않게 즐거웠다.
그러던 어느 날, 꽤 먼 곳까지 점심을 먹으러 간 적이 있었다. 6월 초여름 더위가 막 시작하고 있을 즈음이었는데, 부장님과 나는 삼청동에서부터 안국역, 경복궁, 세종문화회관을 지나 덕수궁까지 걸어 갔다. 걸으면서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도 했다. 당시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 신설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었고(지금도 이 논의는 여전히 한창이다), 나는 검찰이 수사를 못 할 것은 없지 않느냐, 옥상옥이라고 생각한다,라는 견해를 피력했는데, 부장님께서는 코웃음을 치며 핀잔을 준 기억이 난다. "○시보는 순진하군." 맞다. 근거가 아주 없는 건 아닌 얘기이기는 했지만, 참으로 현실 모르는 순진한 소리였다.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 신설을 두려워하는 반동 세력의 반대 논리 중 하나가 바로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는 옥상옥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틀린 논리다.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는 옥'상'옥이 아니라, 과도하게 집중된 (게다가 부패하기까지한!) 검찰의 권한을 '수평적으로' 분산시키기 위한 기관이기 때문이다.
아, 이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니다. 초여름 더위에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우리가 도착한 곳은 시청역 앞 덕수궁 돌담길이 시작하는 곳이었다. 나는 "오호 오늘은 또 무슨 맛있는 걸 사주시려고 여기까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부장님이 나를 데리고 들어 간 곳은 작은 분식집이었다. 이름은 올래(來)분식. 이 먼 곳까지 데리고 와서 고작 분식집이라니,하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부장님의 선택을 나는 믿었다. 그는 상당한 미식가였으니까. 그리고 놀랍게도 이 집 김밥은 맛있었다. 특별했다.
어제 아침 일찍부터 의정부에 갔다가 오후에 서울시청에서 3시간 법률상담이 예정되어 있어서 점심을 든든히 먹어야했다. 그러나 어디서 먹을지는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 몇 년 동안 다시 가고 싶었던, 부장님과 함께 김밥을 먹었던, 덕수궁 돌담길 옆 작은 분식집 올래를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이 분식집의 이름은 '올래(來)'다. 천자문의 '찰한-올래-더울서-갈왕'에서 나오는 그 '올래'다. '오다'의 '올래'다. "(들어) 올래?"라고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아마도 이 이름을 지은 사장님은 제주도 올레길의 인기에 편승해서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라는 뜻의 제주 방언 '올레'의 의미도 부여하고 싶었을 것이다. 게다가 저 유리문에 '빠름~빠름~빠름~'의 KT 올레 이미지까지 붙여놓으신 걸 보면, 사장님은 '올래-올레'라는 말에서 떠올릴 수 있는 모든 걸 상호에 쏟아 부으신 것이다. "집밥같은 음식이 LTE급의 속도로 빠르게 나오는 이 곳으로 들어 올래?", 뭐 이런 의도가 아니었을까.
올래김밥은 맛있다. 단순해서 맛있다. 단순한 김밥이 맛있다. 계란, 당근, 오이, 단무지, 어묵만으로 충분히 맛있다. 화려하고 복잡한 치장을 하지 않고, 재료 본연의 맛을 최대한 활용해서 특별한 맛을 낸다. 가장 맛있는 음식은 재료 본연의 맛이 충분히 우러나는 음식아닐까. 재료가 신선하지 않거나 맛이 없을 때,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과도하게 간을 하고 소스를 덮는다. 요즘 김밥은 돈까스김밥이니 새우김밥이니해서 복잡해지고 있지만, 역시 가장 맛있는 김밥은 단순한 김밥이다. 어디 김밥만 그러한가. 핫도그에도 치즈를 넣는 등 이상한 수작(?)을 부리고 있지만, 역시 가장 맛있는 핫도그는 소세지에 두껍게 옷을 입혀 튀겨내고 거기에 설탕을 묻힌 것이다. 가장 맛있는 도너츠는 적당한 두께의 밀가루 반죽을 깨끗한 기름에 튀겨 낸 것이다. 빵과 버터만 맛있다면, 빵을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은 빵에 버터를 발라 먹는 것이다.
올래김밥은 담백하다. 간도 별로 하지 않은 것 같다. 어찌보면 단무지에서 나는 약간의 짠맛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맛이 나지도 않는다. 김에 기름을 바르지도 않는데, 이 점도 마음에 든다. 먹고나서도 속이 더부룩하지 않고 소화가 잘 된다. 밥이 부드럽고 단맛이 난다. 김도 질기지 않고 부드럽다. 어쩌면 좋은 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가장 기본적인, 단순한 재료를 이용해서, 단순하게 만든 올래김밥은 맛있다. 단순한 김밥이 가장 맛있는 김밥이다. 올래라면과 같이먹으면, 배도 부르고 더욱 맛있다. 물론, 같이 먹지 않아도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