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교황

장벽이 아니라 다리를 지어라(Build bridges,Not Walls)

by 글쓰는 변호사

좋은 책도 그렇지만, 좋은 영화는 두 번째 볼 때 진가를 발휘한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놓쳤던 말들에 귀 기울이게 되고, 새로운 의미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두 번째 볼 때, 더욱 재밌다. 안소니 홉킨스, 조나단 프라이스 주연의 영화 <두 교황>은 좋은 영화의 기준에 완전하게 부합한다. 넷플릭스에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있지만, 현재까지로는 감히 최고의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물론 개인의 취향이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어 말하면, 이 영화는 단 한 순간도 지루하지 않고, 단 한 장면도 버릴 것이 없다. 메시지는 무겁고, 내용은 어둡지만,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유쾌함을 잃지 않는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어쩐지 마음과 영혼이 조금은 치유되는 느낌이 든다. 상처받은 마음이 위로받고 타락한 영혼이 영화를 보는 순간만큼은 정화되는 기분이 든다. 이런 기분이 드는 이유는 아마도 이 영화가 반성과 고백, 용서와 화해, 치유와 (자기)구원의 드라마이기 때문이리라. 또 이 영화가 보는 이에게 치유와 정화의 세례를 줄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시종일관 잃지 않는 '유쾌함' 덕분일 것이다. 죄에 짓눌려 있다면, 유쾌할 수 없다. 유쾌한 자, 웃을 수 있는 자만이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다(예수님을 떠올려보자). 베르고글리오 추기경(프란체스코 교황이 되기 전의 속명, 조나단 프라이스 扮)과 교황 베네딕토 16세(안소니 홉킨스 扮)가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베르고글리오는 교황청 화장실에서 손을 씻으며 아바의 '댄싱퀸'을 휘파람으로 부는데, 그냥 들어간 장면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은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데 가톨릭 교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교회와 세속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낙태, 피임, 동성애 등의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고통받고 억압당하는 자들, 빈곤에 짓눌려 신음하는 사람들, 집과 고향을 잃고 떠도는 사람들에게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지키려는 자이다. 그는 신은 움직이며 않으며, 한 자리에 있고, 세상과 교회 사이에는 선을 그어야 하고, 교회를 지키기 위한 튼튼한 담이 필요하며, 변화는 단지 타협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프란체스코 교황은 바꾸고자 하는 자이다. 신은 어디에나 있고, 항상 움직이며, 세상과 교회 사이의 담은 '자비'라는 다이너마트로 폭파될 것이며, 변화는 더 나은 길을 내기 위한 노력이다.


가톨릭 교회 내부의 성추문과 최측근의 범죄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고 베네딕토 16세는 사임하고자 한다. 그러면서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에 후임 교황이 되어줄 것을 부탁한다. 베르고글리오는 자신의 씻을 수 없는 죄를 고백하며 강력하게 거부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대화를 통해서 자신의 죄를 반성하면서 고백하고, 서로에게 치유받으며, 종국에는 구원받기에 이른다. 말은 치유의 마법을 지니고 있다(프로이트).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은 마음을 돌려서 베네딕토 16세의 후임 제안을 수락하고, 콘클라베를 통해 교황이 된다. 이 교황이 바로 현재의 교황(제266대 교황)인 프란체스코이다.


영화에서 두 사람의 대화는 진정한 의미의 대화란 어떠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대화란 두 이성(logos)의 만남이고 마주침이다. 그 마주침의 과정에서 배경과 가치관이 다른 만큼 당연히 충돌과 갈등이 생긴다. 그러나 좋은 대화는 마음을 움직인다. 그 마음의 움직임이 충돌과 갈등을 봉합하고, 대립하는 두 견해 사이에서 어떤 상위의 종합을 낳는다. 서로 다른 두 견해가 단순히 평면적으로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조화를 이룬다. 누가 옳고 틀린 것이 아니라 각자 견해의 타당함을 인정하면서 더 나은 생각을 만들어낸다. 더 나은 생각은 기존 질서의 담을 허물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내며 그 길 위에서 더 나은 세상을 꿈꾸게 한다. 말씀(logos)은 태초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성(logos)간의 대화를 통해 영속적으로 살아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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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토 16세는 베르고글리오 추기경과의 대화 끝에 함께 있어서 좋다고 말한다. 추기경은 놀라며 하느님이 항상 함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나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이사야서 41장 10절>). 베네딕토 16세는 하느님은 함께 있겠지만, 그 분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마도 그 분은 웃고 있겠지만, 적어도 자신에게는 그 분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교황의 자리에서 사임해야 한다는 것이다(자신이 가진 것을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내어 놓을 수 있는 자세. 참된 보수의 모습이다). 신의 웃음소리를 듣지 못하는 자, 자신의 마음속에서 유쾌함이 소멸되고 웃음을 잃어 버린 자, 신나는 음악에 맞춰 춤출 줄 모르는 자, 흥겹게 휘파람을 불지 못하는 자는 누군가를 구원하지 못한다(니체의 짜라투스트라가 말한 낙타-사자-아이로 변하는 정신의 변증법을 떠올려 보자). 그러니 당연히 신의 대리인이 되기는 어려운 것이다.


올해의 마지막 날이다. 간단히 끝날 줄 알았던 코로나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사람들 간의 심리적 거리도 멀어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고통받고 있다. 대립과 갈등과 반목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다. 무엇보다도 무엇이 옳은 일인지 무엇이 정의인지 알 수가 없다. 2021년에는 사람들이 조금은 덜 고통받고 조금은 더 행복해지기를 바라며 영화 속 프란체스코 교황의 연설을 인용하여 글을 맺는다.


"무관심이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갈등의 문화가 팽배해져 우리 자신만 생각하며 비누 거품 안에서 살아가게 만들었습니다. 이 역시 아름다워 보일지 몰라도 공허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익숙해져 왔습니다. '나하고는 상관 없어'. 이 세상의 누구도 책임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형제자매들이 흘리는 피는 누구의 책임입니까? '난 관계없는 일이야''다른 사람의 일이겠지''나는 분명히 아니야'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면, 모두의 잘못입니다."


[이미지 출처-다음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