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그는 대학교수로 10년 가까이 재직하면서 좋은 명성과 평판을 쌓았다. 이제 곧 종신교수직을 얻게 된다. 그런데 그는 안정된 일상과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떠나려 한다. 그와 친하게 지냈던 동료교수 몇 명이 그가 떠나는 날 마지막 인사를 나누기 위해 그의 집으로 찾아 온다. 아쉬운 마음 반, 궁금한 마음 반이었을 것이다.
동료 교수들은 도대체 그 좋은 교수직을 왜 그만두고 다른 곳으로 가려 하는가, 이유가 무엇인가를 묻는다. 이 남자는 머뭇거리다가 중대한 결심을 한 듯 어렵게 말을 꺼낸다. 자신의 나이는 만 사천 살이고, 마들렌기(후기 구석기 시대)부터 살아 온 사람으로 외모가 늙지 않는다는 것이다. 10년 가까이 한 곳에 머물러 살다 보면, 늙지 않는 외모 때문에 정체가 탄로날 수 있어서 거주지를 옮겨 다녀야 하는 것이다. 물론 동료 교수들은 코웃음을 치며 믿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들은 이 남자의 정신상태를 진지하게 걱정한다.
남자는 불신하는 동료들에게 자신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후기 크로마뇽인으로 뗀석기를 사용했고(그 뗀석기를 여전히 집에 가지고 있다), 동굴 벽화를 보았고, 빙하가 사라져 가는 것도 보았으며, 동쪽으로 가서 부처를 만나 그에게 가르침을 받기도 했으며, 콜럼버스와 함께 배를 타고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확인하기도 했고, 반 고흐의 옆집에 살면서 고흐의 자필 서명이 들어간 그림을 선물로 받기도 했다는 것이다(고흐의 그림을 가지고 있다).
동료 교수들은 이 남자가 미쳤거나 지적인 거짓말쟁이라고 하면서도(동료 중 누군가는 너무 심한 장난이라며 화를 내기도 한다), 자신들의 인류학, 고고학, 생물학 지식을 동원해 그의 이야기를 자기합리화해 보려 한다. 동료들은 남자의 이야기를 쉽게 거짓말로 치부하지 못한다. 그럴듯하기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반대로 그의 이야기가 거짓이라고 쉽게 단정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동료들은 이제 반신반의, 긴가민가하게 된다.
영화는 남자가 자신이 예수였다고 고백하는 데서 정점으로 치닫는다. 누군가는 미쳤다며 이제 그만하라고 하기도 하고, 독실한 기독교인인 동료는 신성모독이라며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남자는 부처의 가르침을 받고 돌아와 그 가르침을 설파한 것일 뿐이라고 한다. 남자는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한 적도 없으며, (사실 죽지 않았기 때문에) 부활한 적도 없으며(잠깐 죽은 척하다가 잠잠해지면 몰래 빠져나가 자취를 감추려 했는데, 열성지지자들에게 발각되었다는 것이다), 물 위를 걷거나 죽은 자를 살린 적도 없다고 한다. 나아가 자신이 말한 신성은 지상에서 인간적 선을 행하라는 것이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많은 부분이 후세인에 의해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변형되고, 윤색되고, 가공되었다는 것이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동료는 너는 예수가 아니라고 강하게 부정한다. 누군가는 산상수훈을 말해 보라고 한다. 진짜 예수인지를 확인하고자 하는 끈질긴 시도이다. 남자는 담담하게 성경 속 예수의 말로 대답한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Who do you think I am)?"(마태복음 16:15) 성경 속 예수가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직접 판단하게 했듯이 남자는 이제 진실을 얘기했으니 자신이 누구인지는 동료들의 판단에 맡기고자 한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냐는 질문에 남자는 이제 아니라고 한다고 해도 확신할 수 있겠냐고 반문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상식이나 믿음에 반하는 진실 앞에서 화를 낸다. 믿기를 거부하고 머뭇거린다. 진리를 탐구하고 진실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실상 믿고싶은 것만 믿고 보고싶은 것만 보는 것일 수도 있다. 선택적 진실이다. 자신들이 보편적 진리의 수호자라고 믿는 동료 교수들에게 당신들이 알고 있는 역사란 사실의 집적체가 아니고 해석과 믿음이 뒤범벅된 지적 구성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존재 자체로 입증하고 있는 남자의 존재는 무척 불편한 것이 된다.
남자의 존재로 동료 교수들의 모든 것(지식, 신념의 체계 등등)이 허물어진다.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도 마찬가지다. 데카르트가 모든 것을 회의한 자리 위에서 코기토(Cogito, ergo sum)를 찾았듯이 무너진 자리 위에서, 폐허 더미 속에서 재구축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영화가 남긴 실마리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묵직한 질문이다(비단 기독교인에게만 의미있는 질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데카르트가 코기토 위에서 무너진 체계를 재구축한 것처럼 이 묵직한 질문 위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쌓아 올려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겨져 있다.
<이미지 출처-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