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도 해야 할 필요성
조금은 부끄러운 이야기로 이 글을 시작해야겠다.
지금으로부터 20년도 더 전인 1998년인가 1999년 즈음의 일이다. 대학생 시절, <여성학 강의>(지금이라면 '여성학'이 아니라 '페미니즘'이라고 했겠지만, 당시에는 '여성학'이라는 용어도 꽤 쓰였던 걸로 기억한다.)라는 제목의 교양강의를 수강한 적이 있었다. 여성학 또는 페미니즘에 별(또는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왜 그 강의를 수강 신청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듣고 싶었던 교양강의 신청에 실패했거나 우연히 시간대가 맞았거나 여학우들이 작성한 대자보에 등장하는 몇몇 낯선 용어들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강사는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였고(아마도 박사과정 중이었거나 이제 막 박사 학위를 취득한 상태가 아니었을까 싶다.), 교재는 (이 글을 쓰기 위해서 기억을 더듬고 더듬어 간신히 기억해 낸 것인데) 로즈마리 퍼트넘 통이 지은 <페미니즘 사상>이었다. 200명이 넘는 수강생이 앉아 있는 대형강의실에서 이루어지는 교양강의의 특성(즉 산만한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선생님의 얘기는 첫 시간부터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물리적으로 잘 들리지 않기도 했지만,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강의실에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두 번째 강의 시간에도 수업에 참석은 했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여전히 잘 들리지 않았고, 여전히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어차피 교재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수업이니 수업시간에 혼자서 교재를 읽으며 공부해보자는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그런데 이 책 또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무나 어려웠다! 그 당시 내 느낌으로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나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 오히려 읽기가 더 편하게 느껴질 정도였던 것 같다. 나는 책을 덮었고, 강의실을 박차고 나와서 미련 없이 수강 철회를 했다. 그 이후로 페미니즘 관련 책은 지금까지 읽지 않았다.
여기까지가 부끄러운 얘기다. 선생님이 교단에서 강의를 하시는데 학생이 수업 중에 교실을 뛰쳐나갔으니 이는 너무도 무례한 일이고(혹시 여자 강사라서 수업 중 뛰쳐나가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시지 않기를 바란다. 남자 강사의 강의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으니 말이다.), 모르는 내용이 나오면 혼자서 공부하고 고민해서 이치를 깨우칠 생각을 해야지 책을 덮어 버린 것은 학생으로서 너무도 게으른 일이고, 20년 넘는 시간 동안 페미니즘 관련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는 것은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우리 사회에 너무도 무관심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 부끄러움은 온전히 나의 몫일까. 순순히 그렇다고 인정하기는 조금 억울하고, 저 강사님과 <페미니즘 사상>이라는 책 탓을 조금 해야겠다.
우선 <페미니즘 사상>에 대해 얘기해 보자면, 사실 이 책은 대단히 좋은 책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는 <페미니즘 : 교차하는 관점들>이라는 제목으로 새롭게 출판되어 있는데, 페미니즘 공부길에서 훌륭한 지도나 나침반 역할을 할 만한 책으로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너무도 어렵다는 것이다. 책 목차만 보아도 왜 어려운지 금방 알 수 있다. 목차를 보면,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실존주의 페미니즘', '정신분석 페미니즘', '포스트모던 페미니즘', '포스트구조주의 페미니즘', '포스트식민주의 페미니즘' 등등 이런 식으로 다양한 관점의 페미니즘 이론을 소개하고 있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 앞에 붙어 있는 저 다양한 이론과 저 다양한 '주의'들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어려울 수밖에. 페미니즘을 알고자 책을 펼쳤는데, 정작 페미니즘은 만나지도 못하고, 마르크스, 프로이트, 라캉, 사르트르, 푸코, 데리다 등등의 이론 앞에서 헤매다가 좌절하고 책을 덮게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여성학 강의>의 강사님 잘못도 적지 않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자신이 가르치고자 하는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물론 대학이라는 곳이 주입식 교육을 하는 곳은 아니다. 배우는 사람(학생)이 선생이 가르쳐 주는 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곳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나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는 의미가 가르치는 사람이 가르치고자 하는 내용을 몰라도 무방하다는 뜻은 아니다. 소크라테스(플라톤)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서 허구한 날 질문만 하고 다녔겠는가.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자신이 가르치려는 내용은 완벽하게 이해하고 장악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저 강사님은 그 당시 페미니즘 이론 전체는 고사하고 교재인 <페미니즘 사상>에 나와 있는 내용조차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강단에서 강사가 헤매고 있는데 학생이 제대로 배울 수가 있겠는가. 공부는 도서관에서 하고 강의실에서는 강의를 해야 한다.
어떠한 이유가 있었든지 간에 나는 페미니즘에 대해 대단히 무지하다. 그래서 이제 페미니즘에 대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앞으로 공부를 하고 그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과정에서 자연히 밝혀질 것이니 여기서 긴 얘기를 할 필요는 없겠다. 다만 최근 재미있게 본 넷플릭스 드라마 <D.P.>의 마지막 대사를 빌려서 얘기하자면,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페미니즘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우리 사회의 현 상황이 페미니즘 공부의 필요성을 웅변하고 있다. 법조인으로서도 다양한 법현상과 사회현상을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 페미니즘 공부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여성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또는 여성의 권익을 논리적으로 옹호하기 위해서 페미니즘 공부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남성중심주의-가부장주의 체제하에서 오랜 시간 무비판적으로 살아온 내가 페미니즘 책 몇 권 읽는다고 해서 당장 큰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나는 페미니즘이 문제 삼고 있는 우리 사회의 어떤 모습들은 분명히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 변화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실천이 페미니즘에 대한 공부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