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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변호사 Jan 02. 2024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창비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빨치산이었고, 현재진행형 사회주의자인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죽음이 소환하는 사람들과 그 아버지와 그 사람들이 얽힌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슬픈 사건이지만, 때로 화해의 시간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특히 많은 시간 누군가와 또는 자신이 속한 사회와 불화하면서 살아온 이에게 죽음은 아마도 화해와 용서의 장이 될 가능성이 더 커진다. 작가의 아버지의 경우가 그러했다. 아버지는 빨치산이었으니까. 사회주의자였으니까.


작가의 아버지는 이념형 인간,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사람이었다. 이데올로기는 신념의 체계이다. 이데올로기는 가족, 친구, 사랑, 종교, 관습, 사회 총체적으로 기존 질서와 대립하고 투쟁한다. 그래서 이데올로기를 믿는 사람은 누군가와 또는 사회와 불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문자를 통해서 학습된다. 문자의 구속력은 실로 강력하다. 활자화된 무언가를 우리는 쉽게 믿는다. 법전에 적혀 있는 그 글자들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구속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실제로 작가의 아버지는 농사도 문자를 통해서 배운다. 


작가의 아버지는 군사독재 정권 하에 교련선생을 했던 친구인 박 선생을 타박한다. 독재 정권 밑에서 교련선생이 뭐냐는 것이다. 그러나 저 무서운 이데올로기의 시절에 군인이었던 박 선생은 자기 손으로 빨치산이었던 형제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자책감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박 선생은 자신을 타박하는 아버지에게 하염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묻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하염없다'라는 말이 이토록 마음에 사무치는 말인지 새삼 깨달았다. 


그런데 어쩌면 작가의 아버지와 대척점에 있을 것만 같은 박 선생은 작가의 아버지가 가장 자주 어울리는 친구이다. 그래도 사람은 박 선생이 가장 낫다는 것이 그 이유다. 작가의 아버지에게 이데올로기와 사람은 다른 것이었다. 여기서 이데올로기의 세계도 아니고, '하염없이'의 세계도 아닌, '항꾼에(함께, 같이의 전라도 방언)'의 세계가 열린다. 마음에 맞는 좋은 사람이라면, 아마도 우리는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함께'의 시간 속에서 이데올로기가 해내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의 가능성이 열릴 것이다. 정지아 작가는 그 가능성을 슬몃 보여줌으로써 실패한 사회자주의자였던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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