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트의 문제인가 디자인의 문제인가 그것이 알고 싶다
좋은 폰트를 찾고 싶다고요? 텍스트를 더 잘 표현할 방법도요? 이용제 활자 디자이너와 신민주 에디터가 함께 그 방법을 찾아봅니다. 첫째주와 셋째주 금요일마다 연재하는 좋은 폰트 가이드입니다.
최근 인스타그램용 배너를 만들었는데 만족스럽지 않다. 배경 위에 올린 텍스트가 어딘가 답답한 느낌. 배치의 문제인가, 크기의 문제인가? 자간? 행간? 아니면 폰트의 문제인가? 디자인을 갈아엎어야 하나? 이것도 잘 못 하는 내가 디자인을 하는 게 이상한 것인가?
'으, 자괴감에 빠지기 전에 물어봐야지.'
오늘폰트에서 함께 프로젝트를 하는 이용제 교수님께 직접 여쭤봤다.
"글자가 답답해 보이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음, 폰트의 문제일 가능성은 매우 적어요."
교수님은 한글 가독성 실험을 언급하면서, 가독성은 10가지 이상의 요인에 영향을 받는다고 짚어주셨다. 그 결론은 '글자를 사용하는 방식 때문에 글자의 가독성이 낮아질 가능성이 높다'였다. 물론 글자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경우도 전혀 없진 않지만. 이런 좋은 정보를 혼자 듣긴 아까워서 교수님의 이야기를 정리해 봤다.
글자와 글자 사이의 간격인 자간과 글자의 넓이인 장평을 과도하게 줄이면 글자가 검은 덩어리처럼 엉긴다. 또 글줄과 글줄의 사이인 행간을 줄여도 하나의 단락이 덩어리처럼 보이게 된다. 역시 좋지 않다.
"그럼 장평과 자간을 절대 줄이지 말고 있는 그대로 쓰라는 건가요?"
"영어든 한글이든 그게 원론적으로 맞는 말이긴 하죠. 다만 활자 디자이너가 '완벽'하게 사용자의 의도에 맞춰 글자를 그렸다는 전제하에서."
그래서 교수님은 완전히 건들지 않는 게 좋은지, 나쁜지를 말하는 것보다는 얼마나 조절하는 게 좋은가 고민하는 게 훨씬 소득이 있는 주제가 아닌가 생각한다고. 무조건 1%라도 줄이면 균형이 무너지진 않는다고 하니 적당한 그 지점을 찾는 안목은 있어야겠다.
그래도 장평이나 자간을 조절할 때 참고해 두면 좋은 두 지점이 있다.
하나는 역전현상. 글자의 장평을 너무 많이 줄이면 가로와 세로획(줄기) 굵기가 역전될 수 있다. 기본적으로 글자는 가로 줄기보다 세로 줄기의 굵기가 두껍다. 그런데 글자의 너비를 좁히면 세로 줄기보다 가로 줄기가 더 두꺼워진다. 글자의 가독성은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다른 하나는 글자가 우선순위에 맞게 결합하고 있는지 살피는 거다. 낱자(ㄴ-ㅏ-ㅌ/ㅈ-ㅏ)간의 결합은 가장 단단하게, 그 뒤에 낱글자(낱/글/자) 간의 결합, 그 뒤에 낱말 간의 결합 순으로 조화롭게 간격을 이뤄야 한다.
그러니 글자가 잘 읽히게 하기 위해서는 1) 낱자(자음 모음 글자)끼리의 결속을 가장 단단하게 해서 낱글자(음절)를 잘 그리고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 2) 그러한 낱글자를 결합한 낱말이 잘 읽히는지 파악해야 한다. 3) 이렇게 만들어진 낱말을 모아, 하나의 글줄로 의미를 매끄럽게 전하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띄어쓴 건지, 자간인지 헷갈리거나 멈칫하게 만들면 안 된다는 소리다.
폰트를 받을 때 이 글자는 48pt~72pt의 크기로 쓰는 것이 좋다든가 본문용 폰트라든가 하는 정보들을 그냥 지나칠 때가 많다. 그러고는 원하는 대로 아무렇게나 쓰는데, 사실 폰트의 최적 사이즈와 용도를 밝힌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거였다.
예를 들어 굴림체의 경우는 크게 쓰라고 줄기의 간격을 일정하게 배치한 게 하나의 특징이다. 이런 폰트를 본문용에 그것도 긴 글에 작게 쓰면 굉장히 볼품없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폰트가 되어 버린다.
'흥, 나는 잘 어울릴 거 같은데.'라고 생각해서 썼던 과거가 떠오른다. 하지만 크기를 지정해 주고 용도를 밝혔던 건 모두 활자 디자이너의 배려랄까, 조언 같은 거였다.
"그럼 일반 디자이너가 현수막에 한 글자 크게 쓰고 싶으면 어떻게 해요? 72포인트로는 모자라잖아요?"
알파벳으로는 큰 공간에 쓸 목적으로 만든 폰트도 있다지만, 아직 우리나라엔 없다. 그래서 교수님은 글자를 크게 쓰면 잘 보일 것이라는 생각 보다, 글자를 크게 쓰지 않아도 잘 보일 수 있는 방법을 찾기를 권했다. 그래도 크게 써야 한다면 글자에 스트로크를 먹여 획을 두껍게 만드는 게 차선책이라고. 다만 이때도 적당한 정도로 먹여야 하는데, 그 기준은 출력했을 때 어딘가 까맣게 뭉치거나 겹쳐 보이지 않을 정도여야 한다.
'를'은 '느'나 ‘니'에 비해 획이 많은 글자다. 좋은 폰트는 획이 많은 글자여도 하나의 검은 덩어리처럼 보이지 않게, 글자의 고른 농도를 위해서 굵기를 조절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글자를 쓰게 되면 조금만 멀리서 봐도 까맣게 뭉쳐 보인다. 글을 잘 보다가도 '이건 [를]인가?'란 의문이 들며 읽는 행위를 방해할 수 있다. 만약 그런 글자가 많이 들어 있는 텍스트를 디자인에 올려야 한다면, 내가 쓰는 폰트가 혹시 농도 굵기 조절은 잘 되어 있는 건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언제부터인가 컴퓨터 속에 깔려 있던 폰트나, 누가 만들었는진 모르지만 무료라서 받은 폰트를 쓰는 경우 종종 그래요. 대부분이 얼룩덜룩하게 뭉쳐 보이죠.”
여기서 과거의 내가 떠올라 아무 생각 없이 썼던 적이 있음을 고백했다. 교수님은 얼핏 예쁘면 그냥 쓰는데, 사실 그러면 안 된다고. 그런 폰트를 발견하면 지금이라도 컴퓨터에서 지우는 걸 추천하셨다.
"좋은 폰트를 써야 폰트를 찾는 눈도 생기는 건데, 무료고 쓰기 쉬워서 아무거나 쓰다보면 뭐가 문제인지 몰라요."
이런 문제를 방지할 방법은 지면에 '니'나 '를'처럼 차이가 극명한 글자가 들어간 문장을 한 줄로 써보는 거라고 했다. '를'이 너무 거슬릴 정도로 까맣고 '니'는 속공간이 크니까 거슬릴 정도로 하얗게 보인다면 문제가 있는 거라고.
"근데 그것도 너무 주관적이지 않나요. 거슬릴 정도라니요...."
"사실 경험이 있어야 볼 수 있는 거긴 해요. 그러니까 아무거나 쓰면 안 된다니까."
"ㅇㅏ...."
일단 한 번도 그렇게 글자를 봐야지 생각해 본 적도 없던 나로서는, 다음에 폰트 사이트에서 글자를 골라야 할 때면 '니모를 찾아서' 같은 거라도 써봐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럼 주르륵 펼쳐진 폰트들을 비교하면서 더 적합하고 농도 조절이 잘 된 폰트를 찾아볼 수 있을 테니까. 흠, 보다 보면 늘겠지요?
위의 이미지에서 한 일자가 '一'로 읽히는 건 위아래에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 공간이 보기 싫다고 다 지워버리면 어떻게 될까? 세로 쓰기로 사용하는 경우 그 의미가 전혀 전달되지 못할 거다. 문장부호도 그렇다. 그런데 그사이가 보기 싫다고 폰트를 제작하는 과정에서부터, 알파벳 폰트에서 커닝 줄이듯이 다 지워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그런 글자는 ').' 같은 부분들이 거의 엉겨 있어서 답답하기 짝이 없다고. 쌍따옴표(") 뒤의 공간을 줄이는 경우도 비슷하다.
이런 일이 생기는 건 흰 공간을 필요한 여백이 아니라, 불필요한 공백으로 보기 때문이다. 물론 글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 갑자기 띄엄띄엄 빈 곳이 보이면 거슬리긴 할 거다. 글자가 그 역할을 다 하기 위해서 기능하는 여백을 지켜주면서도, 그 공간이 불필요해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이 디자이너들의 역할이라고 교수님은 덧붙이셨다.
"축하해요. 답답한지 모르는 사람들도 매우 많은데, 답답하다는 걸 인지했다니 일단 평균 이상인 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처음 질문을 드렸을 때 교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주셨다. '폰트 탓인가, 아니면 내가 폰트를 쓰는 방법의 문제인가, 아니면 그냥 디자인 자체의 문제인가' 알 수 없어 애매함의 늪을 헤매는 분들에게 이 글이 조금은 실마리가 되었으면 한다. 나도 자괴감 버튼에서 손을 떼야지. 일단 평균 이상인 거 같다잖아(행복회로).
인터뷰 이용제 활자 디자이너
정리 신민주 에디터
디자인 김민기 그래픽 디자이너
좋은 폰트를 써야 좋은 폰트를 찾는 능력도 생긴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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