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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yer May 27. 2016

시간여행 in 창경궁: <시간여행, 그날>

16년 5월, 창경궁에서 / 1750년 3월, 창경궁으로 짧은 시간여행

환복을 하고, 가채를 묶고, 댕기를 드리고 나서 대기실에서 대기하다가

옆에 앉아 계시던 한 차비 역할 남성분께 사진을 부탁했다. '뒷모습을 남겨놓고 싶어요. 찍어주실 수 있나요?'

갑작스런 요청에도 흔쾌히 폰을 받아들고 사진을 남겨주신 당시 그 차비역 남성 분께 감사드리며.


차비: 특별한 사무를 맡은 임시 벼슬
(출처: 16년 4월 30일에 진행했던, 시민배우들 사전 교육 내용 중에서.)



ㄱ. 우연히, 운 좋게 발견한 '시간여행' 공고문.

우연히 페북에서 '알바'같은 뭔가를 문화재청에서 모집한다고 공고가 떴다.

서울의 4대궁(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과 종묘에서 진행되는 '제 2회 궁중문화축전'의 부대행사 중 하나. '시간여행, 그날' 이라는 제목의 행사에 관한 공고였다.

공고문 이미지 출처: 문화재청 페이스북

시민배우, 한복입고 고궁 속에서 각자의 역할을 하기, 의의도 매력적이었다.

'고궁이라는 문화재의 가치를 활용.'

공고 글을 발견하는 즉시 지원서를 작성했다.


난 장금이의 그 옷이 정말 궁금하고 입고 돌아다녀보고 싶었기에, '나인-의녀-상궁'순으로 우선순위를 정해 작성했다.


사실, '한복 입고 고궁 돌아다니기'라는 내 버킷리스트 목록에서 '한복'이란 정확하게는 '어우동 한복'을 말하는 것이었지만, '그건 뭐, 다음에 기회가 되면 나 혼자라도 대여해다가 입고 돌아다니지 뭐.' 이렇게 생각했다. 

정말 남다른 기회라는 생각에 내게 다가온 이 특별한 '시간여행'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200여 명의 시민배우들과 그 외의 전문배우들이 함께,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에서 각자 역할을 맡아 그 역할대로 움직이고 생활하는 경험!

어쩌면 내가 창경궁 건물들의 내부에까지 발을 들여놓고, 그 안에서 무언가를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을 지도 모르잖아? 이런 기회, 흔치 않잖아?

https://youtu.be/YApt4ddhAYA

*참고로 올려두는, '제2회 궁중문화축전' 홍보 영상. 사전교육 때, 이 영상을 봤던 것 같다. 이것보다 더 짧은 영상이었던가...? 벌써 가물가물하다 ㅋㅋㅋ



ㄴ. 4월30일, 사전교육: 남다른 애정인들 그리고 어머니 파워

어딘가에 갈 때, 그 장소/성격에 맞게 치장을 하는 것에 재미를 느낀다.

예를 들어, 파~란 조명이 많이 나오는 공연에 갈 때는 블루로 드레스코드를 잡거나, 고등학교 후배들을 만나 조언해주러 갈 때에는 그 동생들의 기대에 부응하게 좀 '어른스러워보이는' 옷차림에 눈매를 선명하게 그린 화장을 한다거나.


<시간여행, 그날>사전교육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갈까나~하고 고민하다가 비녀를 꽂기로 했다. 이땐 아직 머리가 그리 길지 않아서 통통통 몇 발자국 뛰면 조금씩 풀려서 길가다 다시 꽂고 다시 꽂고를 수 차례 했지만, 번거로움보다도 '이 코드 맘에 들어~'하는 뿌듯함이 더했기에 괜찮았다.

사전교육을 진행한 강당에 모여드는 사람들을 보는 것도 즐거웠다.


나보다도 더 '코드를 잘 맞춰'온 몇몇 한복을 입고 등장한 시민들도 있었고(알고보니 그 때도 궁중문화축전은 진행중이었고, 그 축제의 일환으로 '한복 빌려입고 돌아다니기'가 있었단다), 한켠에서는 몇몇 어머니들께서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당신의 자녀와 그 친구들을 줄줄줄 데리고 들어서서 자리를 잡으셨다.

역할과 집합시간이 배정되었고, 나는 '나인'역할에 가장 이른 집합조로 배정이 되어 있었다. 온종일 축제에 참여하는 줄 알았지만, 사실 2시간 내외 동안만 참여하는 것이라는 점이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참여한다는 게 어디야~ 쓱쓱 메모를 하고, 교육 내용중에서도 몇가지 쓱쓱 메모하고.

짧은 시간 내에 교육이 끝났다.


교육을 받으면서 정말 안타까웠는데, 지원서를 쓸 때도 얼핏 생각은 했지만, 역할에 대해 소개를 들을 때, 정말 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성별의 한계'.

지금도 성별에 대한 선입견들이 남아 남성이든 여성이든 힘든 점이 있다지만, 그래도 그 시대보다도 이 시대에 태어나 좋다는 생각을 했다.

바느질보다 기획과 정치에 뛰어난 여성은 그래도 궁녀가 되어야 했을 것이다(문무백관XXX), 요리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더라도 남성은 수라간에서 요리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설명을 들으며 '마음아프다, 안타깝다, 다행이다, 감사하다, 맘에 들지 않는다'등의 메모를 여기저기에 끄적여둔 것이 눈에 박힌다.

 

*관람객들에게 이벤트로 '옥의 티를 찾아라' 라는 이벤트도 진행한다고, 안경을 쓴 채 한복을 입고 시간여행을 하고 있거나 하면 관람객들이 찍어서 올리는 이벤트라고, 찍혀도 당황하지 마시라는 말을 막 나오는 순간에 들었다. ㅋㅋㅋ 많이들 참여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린 여학생들의 불만섞인 목소리도 들렸다. '나인으로 지원했는데, 생각시가 뭐야?'라고. 생각시는 견습 나인이라고 이해하면 된다고 했다. 아무래도 '보여지는' 것이다 보니, 나잇대에 맞춰서 배정을 한 것도 있다고. 예를 들어, 나이가 좀 있다면 상궁. 너무 어리다면 나인도 내의녀도 아닌 생각시.



ㄷ. 이동할 때부터 시작된 연기: 옷이 사람을 바꾼다.

나의 집결시간은 가장 이른 시간, 오전 8시였다. 본격적인 행사는 10시에 시작하지만 한복을 수령해 갈아입고, 짐을 한 곳에 모아두고, 머리 장식을 도움받아 하고 나서 조금 쉬고 있다 보니 금방 10시가 되었다.

대기실에서 혹은 환복소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민배우들은 전문배우 차비들의 안내를 받아 각자의 무대로 이동했다.

나는 통명전으로 향했다. 왕후마마께서 거처하시는 곳이었다.

통명전은 바로 저기! 왕후께서 머무시던 곳이므로 안쪽에 위치해 있는 것 아닐까

이동할 때, '이미 관람객들이 많이 들어와 계시니, 지금부터 시작되는 겁니다'라는 안내를 받았다. 자연히 두 줄로 서서 이동을 하는데, 차비 뒤에 상궁이, 상궁 뒤에 나인이, 나인 뒤에는 생각시가 졸졸 따라갔다. 의복에 따라서, 당시의 신분대로.


통명전에 도착하자마자 주어진 임무는 '아침 청소'. 빗자루를 들고 '쓰는 척'을 하시면 된다고 했지만, 어느 순간 보니 너무도 열심히 쓸고 있던 모두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다가와 같이 사진을 찍거나 그냥 멀찍이서 그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가는 모습들이 보였다. '드라마나 영화를 찍는 건가'를 많이 물어보셨고, 축제라는 설명을 하면서 느낌이 굉장히 이상했다. '아, 이 창경궁이라는 공간이 오늘 하루, 수백 명의 무대가 되는 거구나, 정말'하는 실감이 났다.


비질을 마치고 나서는 다듬이질도 하고 서책도 읽고(한자로 되어 있는 서책은 모든 페이지가 다 같은 내용이라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 한자들을 전부 읽을 수 있던 게 아니라서...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모른다. 비질과 다듬이질은 정말 열심히 했지만, 서책 읽기는 정말 '척'밖에 할수 없었다.).


그리고 태자와 공주들의 산책에도 뒤따라갔다. 그런데, 정말 우스웠던 것은, 분명 나와 아무 관계 없고, 저 아이들이 진짜 태자와 공주들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들이 문지방을 나서거나 하면 저절로 손을 배꼽 근처에 모아잡고 허리를 약간 숙이고 벌떡 일어나게 되더란 것이다.

예전에 고등학교에서 '남학생들에게 턱시도 정장을 입혀주고, 여학생들에게 예쁜 드레스 원피스를 입혀주면 지금 이 걸상, 이 교실에 똑같이 자리잡고 앉더라도 앉아 있는 모습, 걷는 행동 하나하나가 달라지게 된다'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는데, 정말 '옷이 사람을 바꾸는 듯'했다. 전에 뮤지컬, 연극을 준비할 때는 연습을 통해 익히고 익혀서 하던 연기를 이때 궁 안에서는 사전 연습도 없이 바로바로 했다. 정말 몰입하고 있었구나. 나 뿐 아니라, 다른 많은 배우들도.


*하지만, 부러 몰입하지 않은 시간도 있었다. 내가 활동 시간동안 거의 상주하고 있던 통명전에는 앞서 언급했듯 '왕후마마'(정순왕후{링크걸어둡니다!}'역이라고 하셨다)께서 쉬시고 계셨는데, 그 왕후마마 역할의 전문배우님과 단 둘이서 조곤조곤 담소를 나누던 시간이 있었다.

처음엔 나는 서책을 읽는 척 하고 있었고, 배우님께서는 통명전 내부의 가구들을 두리번거리고 계셨다. 그러곤 '이리 와보세요'하고 부르시더니 같이 내부의 가구와 화장품(진짜 화장품이 들어 있었다. 정말 고운 파우더. '이따 내 얼굴에 연습해볼래요? 어차피, 왕후 화장할 때 실제로 궁녀들이 도와줬잖아요.'하고 장난스럽지만 진지하게 실험을 권하기도 하시고.)을 구경하다가 자연스럽게 담소를 나누게 되었다. 왕후대 궁녀가 아닌, 그냥 아무사람과 아무사람의 대화.

[시민배우에 어떻게 참여하게 되신건가, 버킷리스트?다른 것들은 뭐를 꿈꾸고 계신가, (오후에 하는 야외공연에서 악녀 역을 맡으셨다기에)어떤 공연인가? 어떤 역할인가, 지금 감기기운이 심히 있으신 것 같은데 야외공연이라니 힘드시겠다 이따 밤엔 비도 온다던데 괜찮으시겠나, 하루 종일 이렇게 있을 줄 몰랐는데 저녁공연만 할 줄 알았는데ㅜㅜ 힘들다, 대단하시다 저녁공연에서도 아름다우시고 멋지실 것 같다, 공연 전석 매진이지만 무대 뒤 한 켠에서라도 만약 보고싶으시다면 말씀드려보겠다] 등등.

나중에 인터넷에서 사진을 검색해보니, '정순왕후의 진맥'이라고 몇 개의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외모만큼이나 목소리도, 처음 만난 사람과의 대화 중에 보여주시던 행동도 아름다우시던 배우님.

출처는 사진 안에!



ㄹ. 내게 마법의 주문을 걸어준, 고마운 두 관객.

1) 볼뽀뽀로 행복한 마법을 걸어준, 한 꼬마 숙녀.

한 꼬마 숙녀가 나의 비질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더니 검지 손가락을 내밀고 쭉 뻗어 내쪽을 가리키며 엄마께 뭐라고 종알종알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우리 아이가 비질을 해보고 싶다고 하는데, 한 번 해봐도 될까요?" 네, 당연하죠! 그런데 빗자루가 다 큰 것 밖에 없으니, 언니랑 같이 해볼까?

무릎과 허리를 굽혀 최대한 눈높이를 맞추고, 아가가 손을 움직이는 대로 비질을 도와주며 함께 사진을 찍었다. 비질을 하고 나서는 창경궁 내부의 다른 건물에 계시는 '임금님'도 뵙고 가라고 안내를 해주었다. "아가, 저~기 가면 임금님도 계시니까, 엄마 손 잡고 뵙고 가요~^^"

그 꼬마 숙녀는 비질을 도와준, 사진을 함께 찍어준, 임금 계신 곳을 안내해준 보답으로 내 왼 뺨에 뽀뽀를 해줬다.

아이의 진심이 느껴지는 뽀뽀는 마법의 힘이 있나보다. 하루 종일 기분 좋은 일이 있었다. 지금도 그 볼뽀뽀를 떠올리면 왼 뺨이 간질간질하고 가슴이 따듯해진다.


2) 함께 2인 셀카를 찍은  '경복궁 파트 진행자'께서 남겨주신 덕담.

언제나 '예쁘다'는 말을 듣고싶었다. 하지만, 나는 '예쁘다'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는 듯 했다. 내게 어울리게 치장하고 다녀도 '그 말'만 비껴가며 덕담을 들었다.

그런데 이 날은 창경궁 안에서 나인으로 지내는 시간동안, 듣고 싶었던 '그 말' 정말 많이 들었다. '아름다우세요/ 예쁘세요' 한복을 입고 궁에 있는 것을 넘어서 이 말들을 계속 듣고 있다는 것까지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라는 생각이 들게끔 했다.

특히, '진행자'라는 명찰을 달고 지나가시며 사진을 남기고 계시던 한 여성 관객분께서 멀찍이서 전신사진을 찍으시다가(사진 찍히는 것, 이상하게 그 느낌이 느껴진다. 시선이 느껴지는 것처럼. 신기했다. 저 멀리서 누가 날 찍는 걸 보기도 전에 느껴서 먼저 알 수 있다는 것.) 다가오셔서는 '같이 사진 찍어도 될까요? / 정말 예쁘세요~^_^'라는 말씀을 해주셨을 때는 표정관리가 안 되었을 정도로 기뻤다.

난 항상 또래들 중에서 통통한 편이었다. 늘 마른 친구들을 보며 부러웠고, 그 친구들이 '예쁜' 모습인 것이고, 나는 '예쁘지 않은'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항상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 날, 이 경험들을 통해 그 콤플렉스에 조금 금이 가게 했다. 

'난 아름답다.'

*메일주소를 알려드렸고, 당일 바로 사진을 보내주신 분! 좋은 추억을, 소중한 추억을 남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ㅁ. 궁궐 밖으로, 다시 나의 시대로.

어색했다. 그리고 아쉬웠다.

궁 안에서는 '내가 원하는 걸 다 할 수는 없다'는 것에 불만스러움은 있었지만(나는 의장수-임금 행렬에서 깃발 드는 역할-도, 문무백관도, 군사도 될 수 없지.) 왠지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과 함께 평온한 마음이 가득했다.

그날, 창경궁 안에서는 어딜 가더라도 이런 모양새로, 역사극/영화에서 톡 튀어나온 듯한 사람들이 돌아다녔다. 나도 그 중 하나였지.

다시 환복을 하고 궁 밖으로 나서서부터는 궁 안에서 겪었던 것들, 저 궁 안에서 두 시간 여의 연기가 나의 진짜 일상이었던 것처럼 느껴져 얼마 후에 다시 (궁으로)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현대의 내가 잠깐동안 과거 궁의 모습으로 시간여행을 '했던' 게 아니라, 과거 궁의 나인 한 명이 잠시동안 현대로 시간여행을 '가는' 듯 한 느낌.

여운이 생각보다 길었다. 여행 후, 며칠동안 시간 날 때마다 사진을 들여다보며 그때 만난 인연들과의 대화를, 에피소드를 떠올렸다.


지원서를 작성하던 때에 내가 바라던대로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고궁 안을, 한복을 입고 누비고 다녔고, 고궁의 건물들 내부까지도 발을 들여놓으며 나의 무대삼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소중한 인연들도 만났고, 좋은 에너지를 얻었다.


흔치 않은 경험, 멋진 시간여행이었다.



  이 활동을 통해 직접 체험해보면서 옛 모습 느껴보고 싶습니다. 이 활동에 참여한 뒤에는 전통의 느낌과 그에 대한 생각을 잊을 수 없게 될 것이라 기대+예상합니다.     

  덧붙여서, 제게는 ‘고궁을 옛 한복을 입고 드나들며 온종일 고궁 속 조상님들의 일상을 상상해보고 싶다’는 버킷리스트가 있습니다. 지난해에는 이런 축제가 있었는지도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올해에 이렇게 공고를 접하게 되어 정말 설렙니다.

-실제로 제출한 지원 신청서 내용 중에서 발췌-

*발췌한 이유는? 이 글을 읽는 사람마다/읽을 때마다 같이 볼 수 있도록. '꿈은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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